종강을 해서 긴장이 풀렸나. 토요일 병원에 갔다 몸이 안 좋아서 저녁에도 계속 누워 있다 밤늦게까지 티브일 켜 놨다. 교육방송의 <스페이스 공감>에서 '쇼규모 아카시아 밴드'란 소박한 음악을 듣게 되었다. 어린 시절 동요같은 소프트 락이 나름대로 귀에 와 닿는다. 그걸 보다 어느덧 <세계의 명화> 시간. 무슨 영활하는지도 몰랐는데, 제목은 <약속>이었다. 알고보니 바로 다르덴 형제의 <약속>이지 않나!
![](http://www.segye.com/photo/2006/12/8/aoo1209-16-4.jpg)
너무나 반갑게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아들>의 '올리비에 구르메'가 아버지로, <더 차일드>의 '제레미 르니어'가 아들로 나온다. 겉늙어 보이는 황폐한 얼굴로 사회의 주변에 떨어져 돈이 되는 좀도둑질로 먹고 살던 20대 초반의 청년. 관계가 만들어내는 책임을 배우지 못하고 귀찮고 돈이 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아기를 팔아버렸던 어린 아버지 이고르. 그는 결국 책임을 선택했었다. 바로 그 이고르의 10년 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영화는 벨기에의 소도시 작은 자동차 정비소에서 기술을 배우며 일하는 소년 '이고르'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냉각수가 떨어진 자동차를 몰고 온 노부인의 차를 봐 주고 공짜로 냉각수를 갈아준다. 이고르는 부인이 수고비를 주겠다는 데도 한사코 사양하고 지갑이 없어졌다는 부인에게 오는 길에 주차장에서 흘렸을 거라며 거긴 질 나쁜 사람들이 많다는 주의도 잊지않는 친절한 소년이다.
그러나 곧 다음 장면, 설마 했더니 화장실에 간다던 이고르는 정비소 뒤뜰로 가 여자 지갑에서 돈만 챙기고 지갑은 땅에 묻는다.(나도 깜박 속았다!) 그는 열네살, 도둑질과 거짓말이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다.
알고보니 그의 아버지 '로제'는 이민자들을 밀입국시켜 임시 거처를 마련해 주고 노동을 강요하는 악덕 업자다. 아들 이고르는 아버지를 충직하게 돕는데, 그는 아버지의 불같은 성미와 매질을 잘 알고 있고 이미 그것이 삶의 방식이 되었다. 그런데 이고르는 가나에서 온 불법이민자 남편 '아미두'를 찾아 온 부인과 아들을 보게 된다. 부인은 새집에 오자마자 아기를 위해 악귀를 쫓는다고 아프리카식 푸닥거리를 한다. 엄마 없이 한번도 보호받지 못한 이고르는 그 낯선 광경을 통해서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받은 걸까. 그녀는 항상 그의 주의를 끈다. 어느날 임시 거처에 경찰이 들이닥쳐 급히 피하려던 아미두가 건물에서 떨어지고 정신을 잃어가던 그는 이고르에게 자신의 부인과 아기를 돌봐 줄 것을 부탁한다. 이고르는 약속한다고 대답한다.
정신을 잃은 아미두를 병원에 데려가려는 이고르는 일이 커질 것을 두려워하는 아버지가 막는다. 로제는 아직 죽지 않은 그를 나무 상자에 넣고 시멘트를 부어 생매장해 버린다. 이고르는 아버지를 용납할 수 없지만, 따르지 않을 수도 없다. 몰래 그녀를 도우려던 이고르는 아버지에게 들켜 매질을 당하고는 다시 아버지와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으로 부자지간의 신의를 다짐받고 아버지에게 복종한다. 그러나 로제가 남편을 기다리며 돌아가지 않는 그녀를 속여 급기야 사창가에 팔아 넘기려하자 이고르는 더 이상 아버지를 참지 않는다. 차마 아버지를 고발하지는 못하지만 아미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손에서 부인과 아기를 구해 집에서 도망치는 것을 선택한다.
그녀는 다리 위에서 다리 밑의 그녀에게 노상방뇨하는 양아치들, 그녀를 겁주는 오토바이족들 보며 이고르에게 말한다. '너의 아버지도 그렇고 너네 나라에는 나쁜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냐'고. 서구식 자본주의는 연대하게 하기보다 성과 인종, 그리고 빈곤과 종교에 의해 서로 차별하고 구분짓게 할 뿐만 아니라 약자의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다.
그들은 열병이 난 아기 때문에 병원에 갔다가 흑인 여자 청소부의 도움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남편 아미두를 기다린다. 결국 이고르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녀는 떠나려던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 이고르는 짐을 들고 그녀를 따르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들은 어디까지 동행하게 될까. 그녀가 짐을 풀고 안식할 수 있는 장소는 있을까. 어린 이고르가 언제까지 그들 모자를 보호할 수 있을까. 카메라는 그들의 뒷모습을 쫓으며 걱정스러운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게 한다. 나라도 나서서 그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절박함, 그러나 나서는 것은 연약한 어린 소년 뿐인 것을 보여주며, 쉽게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르덴 형제의 스타일을 확립한 첫번째 장편이라는 <약속>은 이후 영화의 시선과 주제 의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특히 <더 차일드>가 <약속>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영화의 인물들은 제도권의 관심과 혜택 바깥에 거주한다. 말 그대로 주변부 인생인 그들은 몸뚱이-로 하는 절도, 폭행- 외엔 어떤 재산도 없다. 그들은 그러한 삶을 빠져나올 길을 찾지도 못하고, 그들을 보호하려는 사회의 관심 역시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스스로 방어하고 그들 보다 더 약한 이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주변인들의 삶의 윤리다. 결국 <약속>이란 이들에게 암묵적으로 남겨진 자기-구원의 가능성이 아닐까. 그래서 이들의 약속은 지키지 않는 헛된 약속이 아니라 엄중하고 무겁게 서로를 책임지는, 책임지우는 관계의 윤리이다. 우리 사회는 우리 속의 수많은 이고르들에게 약속의 윤리나마 허용하고 있을까, 아니면 최소한의 약속마저 외면하도록 강요하는 어두운 시절에 접어든 것은 아닐까.
(2006.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