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이의 칠일장 (합본 양장 특별판) - 제14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천효정 지음, 최미란 그림 / 문학동네 / 2022년 4월
평점 :
품절


어머! 합본으로 나오는군요. 초판 독자로서 반가운 마음에 씁니다. 아이 어릴 때 열심히 책 읽어준 거 말곤 해준건 없어선지 초저 때 정말 재밌게 수십번 본 책이라 6학년 아이가 지금도 아낍니다. 건방이 시리즈도 재밌었고. 천효정 작가님 사랑해요^^ 물론 그림도 압권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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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수 <오래된 정원>(2007)

 

약 한달 전 쯤이었나. 그날 작은 모임이 이 있어 새해 들어 처음 술을 했다. 양은 백세주 몇 잔에 불과했지만.. (맘이 힘드니 근래 술맛을 잃었다^^;;)  학교 앞 거의 유일하게 남겨진 학사주점의 분위기 때문인지, 요 며칠 계속 이어진 감상 때문인지 돌아오는 길, 남의 집 대문에 붙여진 박종철 열사 20주기 추모행사 포스터가 눈에 띄어 떼 오는 치기를 부렸다. 이미 그 며칠 전 토요일 그의 모교에서 치른 행사였다. "박종철이란 이름..", 그것은 내게 87년이고, 고교 시절 목격했던 부산 거리의 함성, 다시 지울 수 없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뭉쳐진 기억으로 이어진다. 여하튼 나는 추모제 소식을 부산 지역 뉴스를 통해 알았고, 우연하게도 같은 주 일요일, 남편과 함께 <오래된 정원>을 관람했었다.


씨네21에 의하면, <오래된 정원>은 임상수 감독의 다른 영화들, <바람난 가족>과 <그때 그 사람>과 함께 한국 현대사 3부작을 완성한다고 한다. 내가 그의 영화 전부를 보지 않았기에 임상수의 영화를 결산하거나 할 맘은 없지만, 그의 전작들은 한국 사회의 변화된 시대정신을 읽으려는 자의식으로 가득하다 . <처녀들의 저녁식사>는 성과 결혼이라는 습속에 대한 희화화와 여성들의  반란(?)에 대한 기대를, <눈물>은 소위 주변인들에 대한 기성의 시선과 그 어긋남이 만드는 소통불가능을 직접화법으로 보여주려 하고,  <바람난 가족>은 일부일처제의 위선을 소재로 한국현대사의 뒤엉킨 이중성들( 그 현실과 균열을), <그때 그 사람>은 합리(rationality)가 부재하는 시절, 기억은 블랙코메디로서만  전달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식이었던 것 같다. (이것은 순전한 내 주관적인 평가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시절, 그는 <오래된 정원>을 기웃거렸나?   


나는 영화를 만든단 소식을 접했을 때도, 막상 영화를 보면서도, 그리고 씨네21의 인터뷰를 보면서도 내내 그것이 궁금했다. 나는 위에서 "왜..기웃거렸나?"고 표현했다. 듣기 따라서는 감독에 대한 예의가 아닐 수 있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를 떠올린다면 너무 정해진 순서를 밟아가는거 아닌가 하는 삐딱한 시선이 있었나 보다.


나도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소설로 <오래된 정원>을 보지는 않았다. <손님>이 낫다는 중평을 따라 그건 읽었다.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을 보면서도 왜 우리는 <손님>을 영화로 만들 능력이 없나 하는 답답함이 들어 아일랜드 이야기엔 좀 심드렁했던 것 같다. 각설하고, 왜 하필 <오래된 정원>인가? 씨네21-585호(이래 저래 많이 갖다 쓰고 있는 585호는 년초 어딜 다녀오면서 버스터미널에서 정말 오랜만에 구입했던 인연(!)이 있다^^)에서 임상수는 "시대나 역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물결 속에 휩쓸리며 헤엄쳐가던 하찮고 가냘픈 개인의 나날을 통해 세계를 보아야 한다고도 생각했다"는 황석영의 이야기를 전한다.

 

황석영 선생이 이 소설을 구상한 것은 독일의 윤이상 선생 댁에서였다고 한다. 비틀린 역사에 의해 내몰린 윤이상이 망향의 슬픔으로 관현악 조곡 <뤄양>에서 태곳적 평화로운 고향을 꿈꾸었던 것처럼, 황석영도 감방에서 냉전과 분단을 살아온 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가상의 유토피아 "갈뫼"를 꿈꿨다는 것이다. 이미 지나와버린 낡고 버려진 과거 속에서 말그대로 어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미처 다 살피고 못한 기억 속에서 현재의 암담함에 대한 어떤 가느다른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섣부른 짐작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사실 직접 소설을 잃어야만 확인될 수 있지 싶다).

 

그 두사람, 윤이상과 황석영에게  임상수는 어떤 반향을 일으켰나? 임상수는 적어도 내가 짐작하는 바에 의하면, (그리고 리뷰의 내용도 대체로 그렇지만) 소설과 달리 과거 운동권의 집단성과 한윤희의 개인의 시간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는 관점을 취함으로써 과거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장소에 서려 한다.  한윤희는 영화 속 인물일 뿐만 아니라, 영화 속 운동권의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며 늘 함께하는 개인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 시간은 과거의 오현우를 받아주었고, 사랑했고, 기다려주었고, 현재의 딸과의 대면을 통해 다른 시간의 가능성의 싹을 틔어주게 된다. 

그래서 "오래된" 정원은 오래되었지만 계속 새로운 계절들 속에서 "정원"은 가꾸어질  것인가?  임상수는 이제 어떤 정치적인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는 과거의 운동권이 꼭 다 망각해야 하는 존재들인가 하는 물음을 가졌던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의 임상수의 화법에 너무 편견을 가졌던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게 딜레마인 건 맞다. 거대한 담론보다 개인에 집중할수록 정치적인 힘은 갖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도 싶다. 그런데 그렇게 아직도 정치적인 힘으로 하고 싶은 게 있는 건가? 한국 현대사 3부작에는 쿨한 태도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정치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고 개인보다는 사회 전체와 이야기하려는 시도였다. 사실은 이런 영화를 보고 즐기도 토론하는 행위 자체도 어느 면에서 원자화되고 개인만 남은 삶의 태도를 반성하게 하는 요소가 있는 것 같다." 

 

 

P.S)1. 사실 소설은, 아는 선생님이 어떤 사이트에 올린 브레히트의 시로 기억하고 있었다. 가슴 저릿한 슬픔과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겹쳐 깊은 울림을 주었던 그 시가 다시 생각난다.

 

너희들은 어디로 날아가느냐
아무 곳도 아닌 곳으로
누구로부터 떠나왔느냐
모든 것들로부터
그들이 함께 있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
조금 아까부터
그러면 언제 그들은 헤어질 것이냐
이제 곧
Wohin ihr?
Nirgendhin.
Von wem davon?
Von allen.
Ihr fragt, wie lange sind sie schon beisammen?
Seit kurzem.
Und wann werden sie sich trennen?
Bald.

 

P.S)2. 그런데 영화 본 날 극장에 사람이 너무 없어 섭섭했다. 극장이 반 정도 찼던 것 같다. 운동권이었고 이러저러한 사건에 연루돼 감방 경험도 했던 남편의 표정은 무심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우리의 민주화라는 게 왜 이 모양이냐는 억울한 감정이 치밀었다(내가 뭘 했길래? 웃기네!). 제대로 됐으면 박종철 이한열 등등의 분들이 국민적 영웅은 못 돼도 뭔가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 이런 게 있을 텐데...

그런 의미에서 민주화는 아직 진행중이라면 너무 비약일까? 

 

**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은 소비에트 영화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쉬쩨인의 영화 제목에서 가져왔다. 

*이 글 마치기 전, 마침 최근 오마이에 실린 황석영선생의 글에 대한 반론이 있단 얘길 듣고 함께 올린다.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91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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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강을 해서 긴장이 풀렸나. 토요일 병원에 갔다 몸이 안 좋아서 저녁에도 계속 누워 있다 밤늦게까지 티브일 켜 놨다. 교육방송의 <스페이스 공감>에서 '쇼규모 아카시아 밴드'란 소박한 음악을 듣게 되었다. 어린 시절 동요같은 소프트 락이 나름대로 귀에 와 닿는다. 그걸 보다 어느덧 <세계의 명화> 시간. 무슨 영활하는지도 몰랐는데, 제목은 <약속>이었다. 알고보니 바로 다르덴 형제의 <약속>이지 않나!

 

 

너무나 반갑게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아들>의 '올리비에 구르메'가 아버지로, <더 차일드>의 '제레미 르니어'가 아들로 나온다. 겉늙어 보이는 황폐한 얼굴로 사회의 주변에 떨어져 돈이 되는 좀도둑질로 먹고 살던 20대 초반의 청년.  관계가 만들어내는 책임을 배우지 못하고 귀찮고 돈이 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아기를 팔아버렸던 어린 아버지 이고르. 그는 결국 책임을 선택했었다. 바로 그 이고르의 10년 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영화는 벨기에의 소도시 작은 자동차 정비소에서 기술을 배우며 일하는 소년 '이고르'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냉각수가 떨어진 자동차를 몰고 온 노부인의 차를 봐 주고 공짜로 냉각수를 갈아준다. 이고르는 부인이 수고비를 주겠다는 데도 한사코 사양하고 지갑이 없어졌다는 부인에게 오는 길에 주차장에서 흘렸을 거라며 거긴 질 나쁜 사람들이 많다는 주의도 잊지않는 친절한 소년이다.

그러나 곧 다음 장면, 설마 했더니 화장실에 간다던 이고르는 정비소 뒤뜰로 가 여자 지갑에서 돈만 챙기고 지갑은 땅에 묻는다.(나도 깜박 속았다!) 그는 열네살, 도둑질과 거짓말이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다.

알고보니 그의 아버지 '로제'는 이민자들을 밀입국시켜 임시 거처를 마련해 주고 노동을 강요하는 악덕 업자다. 아들 이고르는 아버지를 충직하게 돕는데, 그는 아버지의 불같은 성미와 매질을 잘 알고 있고 이미 그것이 삶의 방식이 되었다. 그런데 이고르는 가나에서 온 불법이민자 남편 '아미두'를 찾아 온 부인과 아들을 보게 된다. 부인은 새집에 오자마자 아기를 위해 악귀를 쫓는다고 아프리카식 푸닥거리를 한다. 엄마 없이 한번도 보호받지 못한 이고르는 그 낯선 광경을 통해서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받은 걸까. 그녀는 항상 그의 주의를 끈다. 어느날 임시 거처에 경찰이 들이닥쳐 급히 피하려던 아미두가 건물에서 떨어지고 정신을 잃어가던 그는 이고르에게 자신의 부인과 아기를 돌봐 줄 것을 부탁한다. 이고르는 약속한다고 대답한다. 

정신을 잃은 아미두를 병원에 데려가려는 이고르는 일이 커질 것을 두려워하는 아버지가 막는다. 로제는 아직 죽지 않은 그를 나무 상자에 넣고 시멘트를 부어 생매장해 버린다. 이고르는 아버지를 용납할 수 없지만, 따르지 않을 수도 없다. 몰래 그녀를 도우려던 이고르는 아버지에게 들켜 매질을 당하고는 다시 아버지와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으로 부자지간의 신의를 다짐받고 아버지에게 복종한다. 그러나 로제가 남편을 기다리며 돌아가지 않는 그녀를 속여 급기야 사창가에 팔아 넘기려하자 이고르는 더 이상 아버지를 참지 않는다. 차마 아버지를 고발하지는 못하지만 아미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손에서 부인과 아기를 구해 집에서 도망치는 것을 선택한다.

그녀는 다리 위에서 다리 밑의 그녀에게 노상방뇨하는 양아치들, 그녀를 겁주는 오토바이족들 보며 이고르에게 말한다. '너의 아버지도 그렇고 너네 나라에는 나쁜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냐'고. 서구식 자본주의는 연대하게 하기보다 성과 인종, 그리고 빈곤과 종교에 의해 서로 차별하고 구분짓게 할 뿐만 아니라 약자의 대한 폭력을 정당화한다. 

그들은 열병이 난 아기 때문에 병원에 갔다가 흑인 여자 청소부의 도움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남편 아미두를 기다린다. 결국 이고르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녀는 떠나려던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 이고르는 짐을 들고 그녀를 따르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들은 어디까지 동행하게 될까. 그녀가 짐을 풀고 안식할 수 있는 장소는 있을까. 어린 이고르가 언제까지 그들 모자를 보호할 수 있을까. 카메라는 그들의 뒷모습을 쫓으며 걱정스러운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게 한다. 나라도 나서서 그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절박함, 그러나 나서는 것은 연약한 어린 소년 뿐인 것을 보여주며, 쉽게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르덴 형제의 스타일을 확립한  첫번째 장편이라는 <약속>은 이후 영화의 시선과 주제 의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특히 <더 차일드>가 <약속>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영화의 인물들은 제도권의 관심과 혜택 바깥에 거주한다. 말 그대로 주변부 인생인 그들은 몸뚱이-로 하는 절도, 폭행- 외엔 어떤 재산도 없다. 그들은 그러한 삶을 빠져나올 길을 찾지도 못하고, 그들을 보호하려는 사회의 관심 역시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스스로 방어하고 그들 보다 더 약한 이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주변인들의 삶의 윤리다. 결국 <약속>이란 이들에게 암묵적으로 남겨진 자기-구원의 가능성이 아닐까. 그래서 이들의 약속은 지키지 않는 헛된 약속이 아니라 엄중하고 무겁게 서로를 책임지는, 책임지우는 관계의 윤리이다. 우리 사회는 우리 속의 수많은 이고르들에게 약속의 윤리나마 허용하고 있을까, 아니면 최소한의 약속마저 외면하도록 강요하는 어두운 시절에 접어든 것은 아닐까. 

(2006.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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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블로그 > 커피한잔
원본 http://blog.naver.com/itel21/10000397326
 
이 곡은 1969년 “Nuvole Barocce (바로크의 구름)이란 타이틀로 발매된
파브리지오 데 안드레의 실질적인 5집에 담긴 곡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들려주던 Gino Marinuzzi의 'Il Valzer’를
파브리지오가 가사를 붙여 완성한 곡으로 ‘사랑을 위한 왈츠’란 뜻이다.
아버지가 들려주던 클래식 음악 중 특히 파브리지오가 좋아했던 곡이며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기에 직접 가사를 붙인 것이다.
이 곡은 25살 때 완성하여 29세가 되던 해에 발표했다.
 
사랑하던 여인이 떠나고 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름다운 기억과 환상속에 세월이 채워질 때
그 여인이 자신의 노래를 찾게 되지만
예전에 불렀던 아름다운 노래들은
더 이상 그 여인을 위해 부르지 않는다는
 

상당히 추상적이지만 애달픈 사연을 담고 있는 곡이다.
 

Valzer per Un Amore
 
Quando carica d'anni e di castità
tra i ricordi e le illusioni
del bel tempo che non ritornerà,
troverai le mie canzoni,
nel sentirle ti meraviglierai
che qualcuno abbia lodato
le bellezze che allor più non avrai
e che avesti nel tempo passato

ma non ti servirà il ricordo,
non ti servirà
che per piangere il tuo rifiuto
del mio amore che non tornerà.

Ma non ti servirà più a niente,
non ti servirà
che per piangere sui tuoi occhi
che nessuno più canterà.

Ma non ti servirà più a niente,
non ti servirà
che per piangere sui tuoi occhi
che nessuno più canterà.

Vola il tempo lo sai che vola e va,
forse non ce ne accorgiamo
ma più ancora del tempo che non ha età,
siamo noi che ce ne andiamo
e per questo ti dico amore, amor
io t'attenderò ogni sera,
ma tu vieni non aspettare ancor,
vieni adesso finché è primavera.
 
 
 
Via Della Poverta

 

 

파브리지오 데 안드레는 이태리인들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스타로서 작곡가이자 뛰어난 재능을 지닌 뮤지션이다. 여느 다른
뮤지션들보다 인간적이고 품위있는 발라드 곡들을 들려주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창녀, 도둑, 법관, 살인자 등 그늘진 민중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노래했으며 그만의 즉흥성과 진실성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1940년 제노바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살던 작은 마을에서 전쟁으로
인해 위험속에서 그 도시를 떠나 숲으로의 도피는 어린 파브리지오
에게 자연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이는 먼 훗날
그의 곡들에서 주요 테마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70년대 초 밴드를 조직하여 첫 무대 공연을 갖게 되고 첫 싱글
Nuvole Barocche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99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 대중 음악의 대부 파브리지오 데 안드레가 남긴
곡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명곡 La Canzone Dell Amore
Perduto 등이 수록된 1974년 Canzoni 앨범 가운데 선곡합니다. 

 
    
 
얼마전 예정에 없던 술자리가 이어져 갔던 Bule-Trip에서 알게 된 이태리 음유시인 파브리지오 데 안드레. 위의 글은 어는 카페에서 찾은 소개글이다.
그날 술자리에서 들었던 음반이 뭐였는지도 확인않고 구입한 그의 시디 두 장.
다행히 별로 실패하진 않았다. 음악 올리기를 할 수 없는 기술 탓에 다른 블로거에게서 퍼 온다. 음조리듯 나른한 음성 속에 묻어있는 짙은 감성이 감미롭고 애잔하다. 내가 구입한 시디에서
레너드 코헨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Nancy>를 올리고 싶은데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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