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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은 발표들을 보니, 그 자체로 흐드러진 향연이 아닐 수 없다. 실컷 듣고 즐기고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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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과 실천의 간격 혹은 차이에 대한 지적은 구태를 못 벗어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공부의 행간에 자기 삶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나도 요즘 이런 고민이 새삼스레  드는 차에 박노자의 글이 있어 가져온다. 나역시 최근 작은 발표회에서 철학자들의 계보와 문제의식을 이리 저리 재구성해보려는 작업을 보면서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다. 그 자체의 유의미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가 누구를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 1920년대의 철학적 질문과 대답이 1960년대에 반향을 일으키고 영향을 행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는가? 근거가 빠지니, 철학자 놈들의 의도와 지향은 빠지고 애매모호한 개념들만이 남는다. 우리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골머리를 앓게 된다. 이해에 급급하고 그의 이야기를 따라 읽기 바쁘다.  이 철학의 공허를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라는 걱정이 있다. 소위 한국의 철학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또 그 안에서 내 공부의 의미는 무엇인가?

 

학술의 의미: 미국의 아시아 학회에서 돌아와서 | 만감: 일기장 2007/03/28 00:00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5102  

한 일주일을 미국, 보스톤, 아시아학회 (AAS)의 정기 발표회에서 보내고 어제 귀국을 하여 거의 하루 종일 피곤해 자고 있었습니다. 시차가 11시간이나 되어 낮과 밤이 맞바꾸어서 몸이 괴로워도 아주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몸보다 마음이 더 괴로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럽보다 아시아학이 더 발전됐다고 볼 수 있는 미국에서는 저는 많은 훌륭한 동료들을 만나고, 몇 차례의 꽤나 재미있는 발표를 듣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학회의 여러 분과 사이에 정신 없이 배회하면서 여러 발표를 듣는 그 동안에는 가슴은 왠지 좀 허전했습니다. 도대체 사회가 주는 큰 돈을 써가면서 이 일을 우리가 왜 하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어떤 답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한 학자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생에 대한 연구 저서를 낸다고 칩시다. 아쿠타가와라는 사람이 선해야 할 인간이 왜 이렇게 악하게 사는가, 왜 악을 이렇게 탐하는가 라는 물음에 답을 찾는 중에 결국 극히 비관적인 세계관을 갖게 돼 자살이라는 "마지막 도피"를 선택한 위대한 작가이셨는데, 이 작가에 대한 "연구 저서"를 낸다고 해서 이 작가가 평생 고심했던 "악"의 화두 풀기에 약간이라도 도움을 주는 것입니까? 글쎄, 특히 미국에서 나오는 연구서적이라면 십중팔구는 일본 학자들의 연구 성과들을 대충 미국적인 이론에 맞추어 "짜깁기"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아쿠타가와의 그 영원한 화두를 거의 발견하기도 어렵습니다. 물론 "짜깁기"라 해도 아주 전문적으로, 정확하게 한 것이고, 그 만큼의 가치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어를 못하는 사람이 그걸 보고 공부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과연 일생일업으로서의 학술이 과거의 위대한 창조적 개인이 이루어낸 업적을 "소개", "분석"하는 데에 그치고, 그 개인의 위대성을 이루는 중핵적인 "질문"에 어떤 형식의 답은 물론 그 존재 자체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게 인생을 바쳐가면서 할 만한 일인가요? 아쿠타가와는, 제가 워낙 좋아하는 작가다 보니 예로 든 것인데, 그 대신에 <날개>를 지은 이상 (제가 보기에는 아쿠타가와와 참 흡사한 면이 많은 듯한 사람이에요)을 이야기해도 똑같습니다. 이상의 구도를 계승하고 그것보다 더 멀리 갈 자신이 없다면 이미 좋은 세상에 가고 없는 이상의 연구를 왜 합니까? 물론 연구를 한다고 해서 민폐를 끼치는 일도 (사회적 자원의 낭비 이외) 없지만 그래도 중생들을 위해 뭔가를 해놓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상구보리도 하화중생도 못하고 의미 없는 말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다가 그저 그냥 돌아가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 좀 허무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다고는 니체의 연구자마다 다 초인이 되라는 이야기는 아닌데, 일단 초인의 면모 일부라도 보여주지 못하고 죽은 니체의 "말"만을 백번 천 번 더 옮겨쓴다면 그게 중생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재판관에게 가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설파한 목사가 예배 끝나고 곧바로 고액 부동산 관련 소송을 하는 관계로 변호사 사무실로 간다면 이건 "종교"라기보다는 "연극"인 것처럼 말씀입니다. 물론, "연극"의 질이 좋으면 볼만도 하지만...

 

요즘 세상에 "마르크스주의"라 하면 곧바로 바웃고 조소할 무리들이 많지만, 그래도 마르크스의 학술은 구체적인 인간에게 구체적인 도움이 되는 측면이 크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강남의 한 회사에서 회사원 ㄱ 아무개가 회사일을 월급 받으려고 그냥 시키는 대로만 억지로 적당히 하고 오로지 생각하는 것이 옆 골목의 대딸방이라면  우리는 이것이 생산자로부터의 생산 수단의 소외로 인한 "노동의 소외"라는 판단을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병명을 안다고 해서 병을 당장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병을 고치려면 이 회사가 사회의 재산이 되어 ㄱ 아무개와 그 동료들의 민주적인 참여 형식으로, 이득이 아닌 "대타 서비스"를 위해서만 계획적으로 운영돼야 되는데, 그렇게 하자면 이 사회가 아주 크게 바뀌어야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마르크스 덕분에 병명도 알고, 대략적인 "처방"까지 알게 됐다면 마르크스는 위대한 학자이자 보살도의 실천가이었던 것이지요. 저를 비롯한 우리 동료들이 마르크스 만큼 실천하지 못하고, 결국 요익중생할 것 없이 "빈 말"의 속에서 살다가 돌아가는 것이 한이라면 정말 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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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 2007-04-02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고민해야 할 문제군요. 소개 감사합니다.^^:

린(隣) 2007-04-02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낙 게으르다 보니 처음 받는 댓글이네요. 제 글은 아니지만 댓글 주셔서 고맙네요.
 

뭐, 좀, 거창한 제목이 됐네요.^^;;

알고 계십니까? 혹은 알고 싶습니까?

제가 궁금증을 해결하거나 검증해 드리겠단 건 아니고, 사실은 어제 우연히 본 EBS <토론카페>의 제목입니다. 아주 재밌게 봤거든요.

그래서 안 보신 분들은 다시 보기로 한번 보십사 권해드립니다.

토론자들의 이야기도 균형잡혀 있지만, 무엇보다 이 토론과 더불어 함께 고민할 접점과 그 공론화의 필요성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하더군요.  

어제도 밤늦게 들어와 12시엔 자려고 했는데 이 토론프로 때문에 또 늦게 잤네요.(저는 아침형이라..)

암튼 바빠서 저는 이만, 설 연휴 잘 보내세요. 

(<토론카페> 홈피에 들어가보니 아직은 다시보기가 뜨진 않더군요. 참고하세요.)  

 

* 아래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http://www.ebs.co.kr/homepage/cafe/02_weekmenu_view.asp?menu_no=104&curPage=1&col=&str=

 

<연속기획 - 한국의 진보와 보수>
2월 15일 / 제 1편-진보 대 진보 논쟁 : 한국의 진보, 어디로 가나
2월 22일 / 제 2편-보수 대 보수 논쟁 : 한국의 보수, 균열인가 변화인가

제 1편 / 한국의 진보, 어디로 가나

한국 사회의 향방을 가름할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우리 사회 이념을 이끌어가는 진보와 보수가 제도정치권은 물론 시민사회 내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진보의 위기’가 화두로 들어선 지 오래지만, 그동안 대안 없는 비판과 자책의 목소리만 있었던 진보는 열린우리당의 분열로 일단 일정 기간의 혼란은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현재의 혼란은 진보세력 내 노선과 대안의 차이를 명확히 드러내며 ‘헤쳐 모이는’ 과정을 통해, 결국 차기 대선의 방향타를 설정하는 견인차가 될 것이다.

이에 <EBS 생방송 토론카페>는, 한국 진보의 위기를 올바르게 진단하고 대선 정국 등 향후 진보의 갈 길을 모색하는 <제 1편 진보 대 진보 논쟁 : 한국의 진보, 어디로 가나> 에 이어, <제 2편 보수 대 보수 논쟁 : 한국의 보수, 균열인가 변화인가>라는 주제로 2주 연속 두 차례에 걸쳐 토론을 벌인다.

이번 주 EBS 생방송 <토론카페>(진행 김주환/연출 엄한숙)는 <제 1편 한국의 진보, 어디로 가나>에서 진보개혁 세력 위기의 원인에 대해 알아보고, 진보세력의 정권 재창출은 가능할 것인지, 진보세력의 결집과 그 생산적 대안은 무엇인지, 또한 진보가 가야할 방향과 미래에 대해 토론해 보고자 한다.

▷▶ 초대손님 (가나다 순)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
김수진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윤태 계간 <한국의 전망> 편집인
정영태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지금종 창조한국 미래구상 사무총장
진중권 평론가, 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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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성의 지형학에 관한 개요 : 세계적 폭력시대의 시민성과 시빌리티
에티엔 발리바르
[편집자주]

<무장한 세계화 목차>
알랭 족스, 무질서의 제국: 두 개의 좌담, {사회진보연대} 2003년 1·2월호, 3월호
끌로드 세르파티, 21세기 초, 미국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위한 군사 교리, {사회진보연대} 2003년 4월호
메리 켈도어 세계화된 전쟁 경제, {사회진보연대} 2003년 5월호
마틴 쇼, 위험전가 군사주의, 소규모 학살과 전쟁의 역사적 합법성, {사회진보연대} 2003년 6월호
알렉스 드 와알, 아프리카의 전쟁들, {사회진보연대} 2003년 7·8월호

이번이 "무장한 세계화" 기획의 마지막입니다. 시간의 간격이 너무 길어 이렇게 말하는 게 참 쑥스럽지만, 지금까지 기획을 일단 마무리하고 앞으로 이 주제를 더욱 보강할 수 있는 기획을 마련하려는 뜻으로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군사세계화"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반전-반군사주의, 평화운동의 역사적 사례들로부터 교훈을 얻으며, 현재의 긴급한 과제를 풍부히 이해하기 위한 기획을 앞으로 새로이 마련하겠습니다.
이번 글은 잔혹한 극단적 폭력이 벌어지는 서로 이질적인 장소와 형태들, 그리고 상호관련성을 "지형학"이라는 이름으로 분석한 글입니다. 필자는 극단적인 폭력은 서로 다른 이유에서 발생하지만, 분명한 누적 효과를 생산하며, 결국 세계를 생명의 지대와 죽음의 지대로 분할하는 "초국경" (원한의 경계선) 을 생산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세계적인 시민성을 창출할 수 없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정치적" 조건으로 인하여, 죽음의 지대의 인민은 불필요한 "잉여"로 간주되고 , 외부세계는 예방적 "반봉기"라는 관점에서 이 지대에서 벌어지는 상호제거 또는 절멸을 조장하거나 개입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초국경 주변에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에 대한 (전쟁과 결합된) 인도주의적 개입 또는 불개입은 서로 시소처럼 반복되지만, 오히려 초국경을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한 애초부터 사태의 해결 능력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국경의 민주화"를 위한 집단적 실천이 긴급한 과제라고 제안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범유럽적인 차원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제도화하고 있는 유럽연합은 극히 우려해야할 경향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번역 대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tienne Balibar, "Outline of a Topography of Cruelty: Citizenship and Civility in Era of Global Violence", We, the People of Europe?: Reflection on Transnational Citizenship, trans. James Swenson (New Jersey: Prinston University Press, 2004), pp. 11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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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성의 지형학에 관한 개요: 세계적 폭력 시대의 시민성과 시빌리티
에티엔 발리바르

나는 이런 젠 체하는 제목으로 내가 이미 여러 번 다루었던 이론적이며 철학적인 문제들의 연계에 관한 탐구를 지속하고자 한다. '잔혹성' (cruelty) 이라는 용어는 극단적 폭력의 형태들을 지칭하기 위해 관습적으로 (그러나 학문적 관련성을 고려하여) 선택되었는데, 그것들은 의도적인 것이든 체계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도덕적인 것이든 - 하지만 이러한 구별은 우리가 극단성의 선을 넘어서는 바로 그 때 미심쩍게 된다 - '죽음보다 더 나쁜'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말해, 잔혹성의 현실적 또는 가상적 위협은 정치에게, 특히 '세계화'라는 맥락에 있는 오늘의 정치에게 정치의 가능성 그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결정적인 실험을 의미한다는 게 나의 가설이다. 나는 정치에 대한 정치 (politics of politics) 또는 2차적 정치라는 사변적 관념을 가리키기 위해 '시빌리티' (civility) [시민적 예절] 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용어에는 실제로 많은 다른 사용법들이 있다). 시빌리티는 공적인 일들에 대한 집단적 참여로서의 정치가 가능하거나 또는 최소한 그것이 완전히 불가능해지지 않도록 일련의 조건들을 창조하고, 재창조하며,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시빌리티'는 분명히 모호한 용어지만, 나는 그것의 함의가 다른 용어들 예컨대 문명화, 사회화, 도시행정과 질서유지 (police and policing), 공손함 (politeness) 등등 보다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시빌리티'는 사회 내의 '갈등'과 '적대'에 대한 억압이라는 관념을 반드시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갈등과 적대가 항상 폭력의 선구자이지 그 반대가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오히려]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극단적 폭력의 상당수는 ―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 사실상 '합의'와 '평화'에 대한 맹목적인 정치적 선호의 결과며, 세계적 범위에서의 법과 질서라는 정책들의 실행에 관한 맹목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른 여러 이유들이 있지만, 바로 이 때문에 나는 그러한 쟁점들을 '지형학' (topography) 이라는 관점에서 토론할 것이다. 나는 그 용어를 통해서 구체적·공간적·지리적 또는 지정학적인 전망과 - 이를테면 '북반구와 남반구', '중심과 주변', '국경의 이쪽 편 또는 국경의 교차점', '세계적인 것과 지방적인 것' 등과 같은 변화하는 구획들을 고려한다 - 추상적·사변적 전망을 동시에 이해한다. 이는 극단적 폭력의 원인과 결과가 하나의 그리고 동일한 무대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장면들' 또는 '무대들'에서 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장면 또는 무대는 각각 '현실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 또는 '허구적인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가상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보다 덜 물질적이거나 덜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 글은 1999년 11월 제네바 대학의 인도주의적 행동(Humanitarian Action) 대학원 과정의 개강 때 요청 받은 강연에 기초한다. 이 글은 세계화된 세계질서에서의 시민권과 인종분리, 난민과 이주, 대량빈곤과 집단학살 등이 왜 이러한 논의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가를 설명한다. 내가 보기에, 그러한 문제들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고 왜 오늘의 세계에서 민주적 시민성 (citizenship)이 시빌리티의 구체적 형태와 전략을 발명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는가를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가 위치를 부여하고 연결시켜야 할 결정적인 '코스모폴리탄적인' 쟁점들이다.
나는 두 가지 일련의 문제들에 초점을 맞춘다. 첫 번째는, 전형적으로 유럽적인 것으로, 포스트-민족적 통합과 '유럽의 시민성'의 도입의 부정적 반향에 관한 것이다. 이는 단지 '공동체주의적' (communitarian) 요구와 '동일성의 정치'의 부활뿐만 아니라, 나아가 특히 준-아파르트헤이트적인 사회적 구조와 기관들이 발전이다. 그것은 하나의 모순적 유형을 형성하는 데, 그 유형은 이제 많은 측면에서 매우 불안정해지고 있다. 두 번째는 세계적인 것이다: 그것은 지배의 구조들을 변혁하려는 집단적 해방운동을 예방하기 위해 극단적 폭력과 대중의 불안을 체계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 그리고 또한 토마스 홉즈가 {리바이어던}에서 예방적 대항폭력을 염두에 두고 묘사한 국가 형성의 유형을 참조로 해서 ― 나는 세계적인 예방적 반혁명 또는 반봉기의 정치에 대해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러한 '정치'는 현실적으로 반정치적이다. 왜냐하면 허무주의적인 방식으로, 그것은 하나의 정체 (polity) 를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들 그 자체에 대한 억압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전쟁과 일종의 '인도주의적' 행동 또는 개입이 결합하여 발전하는 것을 목도한다. 많은 경우에 그러한 행동과 개입은 정확히 고통을 낳은 바로 그 권력에 봉사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두 가지 일련의 문제들에서, 국경들이라는 전통적 제도가 ― 나는 그것이 현대 시대에서 민주주의 그 자체의 '주권적' 또는 '비민주적' 조건으로 정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주로 안전의 통제, 사회적 분리, 생존수단에 대한 불평등한 접근의 수단으로 작동하며, 종종 생과 사의 제도적 분배 수단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적 폭력의 초석이 된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국경의 민주화를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그것은 단지 국경의 개방뿐만 아니라 (이는 국경의 일반적인 철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국경의 일반적인 철폐는 많은 경우에서 경제적 세력들간의 야만적 경쟁이라는 형태로 부활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으로 귀결될 뿐이다), 무엇보다도 인민들 (물론 이주한 인민들을 포함한다) 그 자신이 국경의 기능을 다자적으로, 협상에 의해서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단순히 '영토적'이지 않고 결코 순수하게 '민족적'이지도 않은 새로운 대의기관이 세워져야 한다. 이는 내가 시민성과 시빌리티가 밀접히 결합되는 '인권의 세계정치' (cosmopolitics) 라고 부른 것의 일부다.

시민성과 시빌리티: '권리들을 가질 권리'의 문제

두 가지 일련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세부적으로 검토하기에 앞서, 나는 우리가 인권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반성이라는 더 광범위한 시각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약간의 철학적 도구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작업이 필수적 출발점을 제공한다는 점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 그리고 나도 이러한 관점을 상당히 공유하고 있다. 우리가 그녀로부터 끌어올 수 있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자. {전체주의의 기원}에 나오는 제국주의에 관한 논의에서 그녀는 모든 시민적·공민적 권리를 박탈당한 '국가 없는' 인민들의 문제를 제기한다.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그러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들에 대한 논의에서 그녀는 정치철학이라는 전망을 이중적인 방식으로 전도한다.
첫 번째, 그녀는 [인간이라는] 종의 단순한 대표물로서의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배제의 형태와 극단적 폭력의 상황을 시민성과 정치 체제에 관한 논쟁의 중심으로 재도입한다. 그녀의 목적은 정의를 행하는 것과 관련된 인간주의적 기준을 주장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는 우리가 오직 그와 같은 상황에 대한 해법을 발견함으로써만 공적 영역, 즉 인민 운동들의 관리와 사회적 갈등의 통제 (policing) 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정치적 행위 (또는 실천(praxis)) 가 이루어지는 영역을 위한 새로운 토대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최근에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기원 바로 그 직후부터 정치적 영역 내에서 만인에 대한 평등한 자유의 척도는 '아무런 몫도 갖지 못한 사람들의 몫', 즉 공공선 (commonwealth) [국가 또는 공동체] 내에서 아무런 몫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정당한 몫을 주는 것 또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정치적 인정에 기초한다고 주장했다. 달리 말해, 이는 차별 받는 범주들의 배제의 과정이 '도시' 또는 '정치조직'으로의 포함의 과정으로 능동적으로 변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 도시에서 이소노미아 (isonomia) [모든 시민들에게 평등권을 적용시킨 원칙] 가 의미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런 관점에서, 강한 의미의 '정치'는 아마도 아렌트가 로자 룩셈부르크로부터 물려받은 통념인 '영구 혁명'과 분리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시각에서, 평등한 자유의 법률적 형태는 분명하게 제거되지 않지만 완전히 재가공되어야 한다. 현대의 인간주의와 보편주의라는 원칙의 측면에서, '권리 없는 인간'이라는 통념은 용어 자체가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명목상 권리 없는 인간은 없으며, 심지어 아동이나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를 들어 우리가 브라질의 무소유 (propertyless) [무토지] 농민들의 권리 주장 ― 그들의 모토는 '권리 없는 사람들에게 정의를' (justice for rightless) 인데,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위협하는 준군사집단들이 법정에서 심판 받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 또는 공식적 서류발급을 거부당한 것에 항의하며 무적자 (undocumented) 의 합법적 거주를 요구하는 프랑스 이주 노동자들의 권리 주장을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면, 우리는 저항과 폭력에 대한 거부에 기초한 이러한 요구들은 권리들의 창조 과정, 즉 '인민주권' 또는 민주주의라고 인정되는 정치적 헌정질서 (constitution) 를 허용하는 역동적인 과정의 부분적이지만 직접적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시민성에 대한 아렌트의 반성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교훈들의 한 가지 측면이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은 더욱 더 오늘날 현실에 적합하다. 나는 민주적·민족적 혁명의 시대 이후부터 국제적 갈등의 일반화와 제국주의의 발전에 이르는 민족국가의 역사가 '인권'과 '정치적 권리' (또는 인권과 시민권) 사이의 전통적 관계를 역전시켰다는 점을 보여준 [그녀의] 유명한 논증을 생각하고 있다. 인권 일반은 더 이상 주어진 민족적·주권적 국가의 경계들 내부에서 제정되고 보존되는 정치적 권리들을 위한 단순한 전제이자 추상적 기초로 간주될 수 없다. 또한 그것은 법률적인 것에 대한 정치적인 것의 지배에 대한 제한으로도 간주될 수 없다. 20세기의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비극적 경험은 그 반대가 진실이 되었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평등한 시민성의 현실적 승인이자 조건인 정치적 권리는 생존, 즉 단순한 생명의 유지와 관련된 가장 초보적인 권리들부터 시작하여, 인권에 대한 정의와 승인을 위한 진정한 토대다. 정치적 동물 (zo n politikon) 그 자체에 새롭고 '비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어떤 국가의 시민이 아닌 사람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시민이 아닌 사람들'이 되고 결국 실천적으로는 더 이상 인간으로 승인되고 간주되지 않게 되었다. 시민의 능동적인 제도적 권리들이 파괴될 때 ― 예를 들어, 시민성과 민족성이 밀접히 결합되는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개인들과 집단들이 그들의 민족적 소속에서 쫓겨나거나 또는 단순히 억압받는 민족적 '약소자'의 상황에 처하게 될 때 ― '자연적' 또는 '보편적으로 인간적'이라고 여겨지는 기본적 권리는 위협 당하고 파괴된다: 우리는 이른바 과소인간 (Untermenschen) 과 과잉인간 ( berrmenschen) 이라고 여기지는 '인간' 사이의 구별이 확립되는 극단적 폭력의 형태를 목도한다. 이는 결코 우연적 현상이 아니다. 이는 오늘의 정치에서 공통적인 것이 되고 있는 비가역적 과정의 결과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기초를 일신해야 한다는 긴급한 임무를 부과한다. 여기서는 정치의 본질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정치는 생명, 교통, 문화의 사회적·자연적 토대 위에 서 있는 단순한 '상부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의 진정한 개념은 인간들간의 특정한 공동체의 가능성 자체와 이미 관련되어 있다. 즉 그것은 해후를 위한, 다양한 구성 부분들과 집단들 사이의 적대의 표출과 변증법적 해결을 위한 공간을 건설하는 것과 이미 관련된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아렌트가 제안한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결정적 통념은 헌법에 의해 보호되어야 할 법률적·도덕적 요구들로 구성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최소의 준거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최대에 관한 이념이다. 또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한 통념은 인간이 '공통의' 실존 영역 (그리고 따라서 노동, 문화, 공적·사적 발언의 영역) 에 소속되는 것을 최소한 승인하는 것이 이미 권리들의 총체를 수반하는 ― 그리고 가능하게 하는 ― 연속적 과정에 준거를 둔다. 나는 이것을 민주주의의 '봉기적' 요소라고 부른다. 그것은 민주주의적 또는 공화주의적 국가의 모든 헌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국가는 정의상 위로부터 부여된 지위와 권리로 구성될 수 없다 (또는 그것만으로 구성될 수는 없다). 그것은 데모스 (dm os) [인민, 시민권을 혈통적인 방식이 아닌 이소노미아에 따라 성취한 인민] 의 직접적 참여를 요구한다.
아렌트의 논증은 민주주의적 시민성을 구성하는 평등주의적 또는 봉기적 요소의 중요성을 분명히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녀는 또한 그것을 시빌리티의 정치와의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서 개념화한다. 이는 극단적으로 배제된 사람들, 곧 시민성이 부정됨으로써 또한 자동적으로 생활의 물질적 조건과 인간 존엄에 대한 인정을 부정당한 사람들이 단지 이상적인 헌정 모델에 대비하여 역사적 제도들을 평가하는 이론적 기준을 제공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들이 오늘의 정치사회들 내에서의 ― 아니, 그들의 일상생활의 핵심에서의 ― 극단적 폭력의 현실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도록 강제한다. 이는 단지 외견상으로만 역설적이다: 칼 슈미트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한계 또는 '예외 상태'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진부한'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민주주의적'이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그렇게 믿고 있는 사회적·정치적 체계들의 기능에 침투해 있다. 그것은 그 체계들이 권력에 부여한 이익의 연속성을 위한 수단인 동시에 체계의 생명력에 대한 영구적 위협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시민성의 권리에 대한 접근 [이용할 수 있는 권리] 과 그것에 대한 부정 사이의 ― 더욱 일반적으로는 포함의 (inclusive) 정치적 질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의 ― 선택을 사변적 쟁점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구체적인 도전이다. (민주주의적) 정치질서는 내생적으로 깨어지기 쉽거나 불확실한 것이다: 만약 그것이 시빌리티의 정치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창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국경들 국경 내부에서 또는 국경을 가로질러 또 다시 '전쟁 상태'로 전화할 것이다.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 국경의 폭력

우리는 아렌트의 논증이 유럽 역사의 '파국'의 경험, 즉 나치즘, 2차 세계대전, 유럽의 유대인·집시·여타 집단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절멸주의 등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는 그것의 '기원'을 민족형태의 제국주의로의 진화에서 밝혀내려고 했지만 동시에 [유럽의] 고유성을 주의 깊게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국가의 민족적 구성이 우리를 덫에 빠뜨렸던 치명적인 순환을 말함으로써 그녀의 생각을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인권과 '불가능한' 권리를 인식하기 위한 유일한 긍정적 또는 제도적 지평이었으며, 그것이 지지해온 보편적 가치들의 파괴를 낳았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여전히 동일한 조건 속에서 생활하며 행동하고 있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가 오늘의 정치에서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우리가 비록 민족형태가 단순히 쇠퇴한 것은 아니더라도, 정치·경제·문화, 그리고 권력의 물질적 분배와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 등의 조건들이 점점 더 초민족적으로 되어간다는 사실을 관찰할 때, 이러한 문제는 첨예해진다. 세계화라는 일반적 틀 내에서 '포스트-민족적' 국가 또는 준-국가 기구가 출현해왔고, 여기서 '유럽 공동체'는 특권적 사례가 되었다. 우선 이러한 과정의 모순적이고 우려되는 몇몇 측면들을 살펴보자. 사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런 측면이 훨씬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나는 공식적인 '유럽적 시민성'의 발전과 함께 현실의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가 출현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결정적 쟁점이라고 생각한다. 장기적 또는 오히려 단기적으로, 그것은 민주주의적인 유럽 공동체의 건설에 장애물 또는 차단물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전체적으로 유럽의 통일을 막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비록 세계의 경제적·정치적·군사적 초강대국에 필적할 수 있는 권력의 축적 또는 지역 권력의 창조를 위한 것이라 할 지라도, 비스마르크식의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성취되는 민족-이상적 (supranational) 공동체의 진정한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민족적 헌정질서와 비교해볼 때, 민족-이상적 유럽 공동체는 오직 그것이 다수를 위한 민주주의적 잉여 (democratic surplus) 를 창조할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두 가지 대칭적 문제를 제기하여 쟁점을 더욱 명확히 해볼 수 있다: 왜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를 말하는가? 왜 유럽에서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말하는가?

왜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를 말하는가?

이는 단지 외국인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외국인의 일부 범부들, 주로는 합법적으로 또는 불법적으로 유럽의 부유한 '문명'을 보호하는 국경을 건너 동구나 남반부에서 온 이주 노동자와 임시수용소를 찾는 사람들, 이런 측면에서 발칸 지역은 외부성의 두 형태의 일종의 조합을 보여준다) 권리를 덜 승인 받기 때문일 수 없다.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용어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질적으로 새로운 것이 있어야만 한다. 1993년 마하스트리히트 조약 이후로 유럽 건설의 새로운 전개는 실로 그러하다. 유럽의 모든 민족국가들에서, 시민성 또는 민족성에 대한 불균등한 접근권을 강요하는 차별 구조가 존재하였고, 특히 이는 식민주의의 과거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유럽경제공동체 이후 막 바로 등장한) 유럽 연합의 탄생으로 추가된 사실은 유럽 시민 (civis europeanus) 의 지위가 점차적으로 새로운 내용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개인적·집단적 권리는 점차 유효성을 획득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각각의 민족 정부와 법에 반하여 유럽재판소 (European Courts) 에 호소할 수 있는 가능성).
이제 결정적 문제가 시작된다: 누구를 위한 새로운 권리인가?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유럽의 인구 모두를 위한 것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단지 좀더 제한된 유럽 인민을 위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여기서 현재 독일에서 벌어지고 인민 (Volk) 과 주민 (Bev lkerung) 사이의 구별을 둘러싼 딜레마를 확장한다. 왜냐하면 사실상 유럽의 모든 나라들에서 이러한 딜레마가 나타나고 있으며, 독일의 논쟁은 하나의 패러다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럽 헌법을 위한 상징적·법적·물리적 기초로서 유럽 인민을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곤란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마하스트리히트 조약은 하나의 입헌 민족국가에서 이미 시민성 (즉 민족성) 을 소유한 사람들, 오직 이 사람들만이 자동적으로 유럽적 시민성을 보장받는다고 진술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 이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내에서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 이미 하나의 방향을 결정한다. 유럽에서 영구적으로 거주하는 이민자들의 양적·질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프랑스의 정치학자 까뜨린느 위똘 드 웬뎅은 이들을 '16번째 회원국가'라고 불렀다), 그것은 포함의 기획을 배제의 프로그램으로 즉각적으로 변형한다. 이는 세 가지 변태로 요약될 수 있다.

1. 외국인 (foreigner) 에서 [이질적인] 이방인 (alien) 으로 (이는 다른 종류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2등 계급의 거주자들을 의미한다).
2. 보호에서 차별로 (오스트리아의 사례가 보여준 것처럼, 이는 민감한 쟁점이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자면 이는 정도와 언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유럽의 일반적 문제다: 정치적 시민성이 허용되지 않은 이주 노동자의 일부가 약간의 사회적 권리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즉 그들이 '사회적 시민성'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복지와 사회보장 또는 이와 유사한 것들에서 추방하는 것은 보수주의 세력에게 결정적인 정치적 쟁점이자 강박이 된다 ― 프랑스의 민족전선 (National Front) 은 이를 '민족 우선' (national preference) 이라고 부르지만, 민족적 제도들 내에 이미 그러한 우선이 어느 정도 존재하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은 '유럽 우선'이 될 수 있다).
3. 문화적 차이에서 인종적 낙인으로. 이는 포스트-식민적 그리고 포스트-민족적 '새로운 인종주의'의 창조 과정의 중심에 있다.

왜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와 유사한 것을 제안하는가? 이는 단지 쓸데없는 자극이 될 수 있다...

정말 우리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아프리카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이제 유럽에서 (그리고 아마도 다른 곳에서) 재출현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 '제국의 역습' 과정에서 더욱 심화되었다고? 우리는 제도화된 인종주의의 다른 역사적 사례들과의 비교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우리가 아는 것처럼 미국은 '짐 크로우' [흑인 일반, 또는 흑인차별주의] 체계를 완전히 망각한 적이 결코 없으며, 보수적 정책이 의제에 오를 때, 주기적으로 그것을 재창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의 독일 동료인 헬무트 리트리히 (Helmut Detrich) 는 유럽의 '동쪽 국경'에서의 난민과 이주자 문제에 관해 오랫동안 작업을 해왔는데, 그는 유럽제국의 새로운 배후지 (Hinterland) 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나는 하나의 또는 다른 체계에 의해 창조되는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 라는 문제는 제쳐놓고 대신에 그 구조에 초점을 맞출 것이며, 아프리카, 아시아 또는 유럽의 여타 지역 출신의 이주자들이 과거에 생활하던 지역의 상황과 남아프리카적 의미에서의 자치구 (homelands) [남아공 흑인 반투족의 자치구] 사이의 비교라는 관점에서 아파르트헤이트의 역사적 사례로부터 최소한 교훈을 빌어 오기 위해 두 가지 보충적 논거를 제시한다. 하나는 국경의 한쪽 편에서 그들의 생활을 '재생산'하고 또 다른 쪽 편에서 '생산'하며, 따라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부자도 아니고 외부자도 아니거나 또는 (우리들 다수에게) 공식적으로는 외부자로 간주되는 내부자인 중요한 노동자 집단의 상태가 '안전' 통제의 규모와 그 폭력을 점차 증가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전' 통제는 상당히 오래된 '인종적 프로파일링' (profiling) 을 신원확인과 기록의 현대적 기술과 결합하면서 사회의 모든 곳으로 확산되고 '유럽적' 영토 전역에서 경계선들을 세분화한다. 쉥겐 (Schengen) 협정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EU 회원국간의 국경을 철폐하고 출입국수속을 없애기 위해 1986년 룩셈부르그의 쉥겐에서 체결된 협정]. 두 번째 보충적 근거는 이주자 가족 (그리고 그들의 구성, 그들의 생활방식) 의 존재는 이주 정책과 여론의 진정한 강박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방인 가족은 분리되어야 하는가, 통합되어야 하는가 (즉 재통합되어야 하는가)? 만약 그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국경의 어느 편에서, 어떤 종류의 가족이 (전통적 또는 현대적), 어떤 종류의 친척들과 (부모 또는 자식), 어떤 종류의 권리를 갖고? 내가 다른 곳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민족적 '공동체'에 대한 정의를 통해서 가족 정치, 또는 더 일반적으로 계보의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역사적 인종주의의 결정적인 구조적 생산양식이다. 물론 민족적인 것이 다민족적 공동체가 될 때에도 이는 진실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에서 우리는 인종분리를 폐지하는 유럽, 즉 민주주의적 유럽은 결코 의제에 오르지 않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사실상 상황은 훨씬 더 모순적인데, 왜냐하면 두 가지 방향의 경향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부분적으로만 마지못해 인정되는 역사적 교차점에 서 있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생각을 주장하고 싶은데, 이는 다음 논지로 넘어가기 위해 필수적이다. 즉 이러한 쟁점들이 전형적으로 하나의 세계적-지역적 ('세계-지역적'(glocal)) 문제를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부착된 유럽적 시민성' (또는 법률-지위적·귀속적 시민성) 의 모순적·진화적 모형은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화의 현실적·가상적 효과에 대한 반작용이다.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역사적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효과의 단순한 투영이다.

세계적인 예방적 반봉기: '국경 없는 폭력'

나는 이제 내가 말했던 중심 주제인 '세계적 반봉기'라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기하고자 한다: 이는 국경의 폭력이 아니라 국경 없는 또는 국경을 넘어선 폭력이다.
나는 로잔 대학의 피에르 드 세나르클랜이라는 스위스 전문가가 출판한 인도주의적 행동에 대한 최근 저작을 인용할 것이다. 그는 오늘의 폭력에 대한 공식적 정의의 중요성과 '인도주의적인 개입'의 범위와 의미를 확대하기 위한 정당화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1981년, UN 총회는 새로운 국제 인도주의적 질서를 위한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그 직후, 총회는 저명한 인사들을 모아놓은, 국제적인 인도주의 문제들에 관한 독립위원회의 창립을 지지하였다... 위원회의 1986년 보고서는 환경파괴, 인구변화, 인구이동, 인권침해, 대량살상무기, 북반구-남반구의 양극화, 테러리즘, 마약 등과 같은 이 시대의 주요한 정치적·사회적 도전을 인도주의적 기획 내부에 포함시켰다.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 "우리는 인도주의를 동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을 규정하기 위해 참고해야할 틀로서 그리고, 해결을 위한 처방으로서 고려해야 한다." 이후 저자는 1989년 이후 "양대 진영"이라는 냉전 체계의 붕괴가 어떻게 초강대국들 사이의 대치로 인해 정치적 폭력에 부과되었던 한계를 무너뜨리고, '전쟁'과 '평화' 사이의 경계선을 흐리게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어느 누구도 냉전의 빠른 종말의 서곡이었던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예견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국제적 구조의 변형과 그에 따르는 폭력을 예상하지 못하였다. 1990년대 중반까지 50건 이상의 새로운 군사분쟁이 있었고, 이러한 분쟁들은 본질적으로 내전이었다. 이 중 특정 분쟁들―르완다, 유고슬라비아, 체첸 또는 알제리의 분쟁들―은 폭력과 잔혹성, 파괴의 광범위함, 그리고 분쟁이 야기한 인구이동이라는 점에서 충격이었다. 국제사회는 단 한번도 이처럼 짧은 시간 내에 이토록 많은 희생자를 낸 이렇게 많은 전쟁을 대면한 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우리는 대량폭력과 극단적 폭력의 다면적 현상이 일반적으로 국가들 사이의 내부적·외부적 세력관계를 포함하는 정치를 대체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는 우리는 정치와 폭력 ― 합리적 조직이 결여되어 있으며, 자기파괴를 포함하는 것처럼 보이는 폭력 ― 의 영역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할 수도 있다. 정치와 폭력은 점차 상호 침투해왔다.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인도주의적 행동' 또는 '개입'이라 불리는 어떤 것이 정치의 필수적 보충물이 되어버린 바로 그러한 조건 속에서 정치와 폭력의 상호 침투가 일어난다. 나는 이 같은 변이의 모든 측면을 논의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정치 그 자체의 개념에 있어서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세 가지 질문을 간략히 언급하려고 한다.

우리는 '전례 없는' 극단적 폭력 (또는 극단적인 것의 폭력) 의 확산에 직면하고 있는가?

나는 이 문제에 관해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싶다. 이 문제는 '과거의 전쟁과 새로운 전쟁'이라는 쟁점에서부터 왜 그리고 어떻게 역사 속에서 벌어진 '집단학살들을 비교해야 하는가'라는 도덕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토론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마도 전례가 없는 것은 기본적으로 극단적 폭력의 새로운 가시성일 것이다. 특히 매체의 포괄 범위와 텔레비전 방송과 이미지 변형 등의 현대적 기술이 ― 마침내 우리가 사상 최초로 걸프전 동안 거대한 규모로 '가상 현실'이 생산되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 극단적 폭력을 하나의 쇼로 변형하고, 세계의 시청자들에게 동시에 이 쇼를 펼쳐놓는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가시성은 전례가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기술의 효과가 (앙골라나 시에라리온에서 수백 명의 불구가 된 아이들의 모습과 같은 진정으로 끔찍한) 어떤 폭력적 과정들 또는 끔찍한 장면들은 드러내 보이고 (바그다드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처럼 똑같이 끔찍한) 다른 것들은 덮어 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극단적 폭력에 대한 [매체의] 보도가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라는 법적·도덕적이지만 거의 정치적이지 않은 개념의 무차별적 사용을 통해 냉전 동안의 '공포의 균형'이 '희생자들 사이의 경쟁상태'로 정치적으로 이행했다는 매우 단순한 관념을 믿게 만들 때, 우리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편향이 작용한다는 의심을 품는다. 결국 우리는 일상적 공포의 이미지들에 대해 말하고 그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특히 인류 중에서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보호받는 지역 내에서 매우 양가적인 효과를 생산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동정심과 함께 혐오를 불러일으키고, 이처럼 인류가 질적으로 다른 문화 또는 문명으로 실제로 분할되어 있으며, 이러한 문화 또는 문명은 오직 그들간의 '충돌'을 초래할 것이라는 관념을 강화한다.
나는 이러한 모든 곤란함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현실은 '전례 없는' 어떤 것이라는 통념의 이면에 놓여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아마도 수많은 절멸의 이질적 방법들 또는 과정들 (나는 이를 통해 어떤 개인들이 객관적 또는 주체적 집단들에 속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 개인들로 구성된 대중을 제거하는 것을 지칭하고자 한다) 이 스스로 '세계화'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즉, 그것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동시에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점차적으로 하나의 '연쇄'를 형성하며, 20년 전 E. P. 톰슨 (E. P. Thompson) 이 '절멸주의'라는 이름으로 예상했던 것에 완전한 현실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일련의 연속된 과정들 속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은 포함해야 하는데, 정확히 왜냐하면 그것들이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그것들은 하나의 그리고 동일한 '원인'을 갖고 있지 않지만 누적된 효과를 생산한다.

1. 전쟁 ('내전'과 '외국과의 전쟁' 양자 모두, [하지만] 유고슬라비아나 체첸과 같은 많은 사례들에서 이런 구별은 쉽지 않은 일이다).
2. 인종적 또는/그리고 종교적 '정화'(cleansing)의 이데올로기를 동반하는 [보통 '인종청소'라고 부르는], 공동체에서의 폭동.
3. 전통적 또는 비전통적 경제의 파멸로 야기된 기근과 다른 종류의 '절대' 빈곤.
4. 외관상 '자연적인' 대재앙들. 그러나 그것들은 사회적·경제적·정치적 구조들로 과잉결정 되었으므로 실제로는 대규모의 살인이다. 여기에는 발전된 시민적 보호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의 세계적 유행병 (예를 들면, AIDS의 분포와 치료 가능성은 유럽·북아메리카와 아프리카·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차이를 보인다), 가뭄, 홍수 또는 지진 등이 포함된다.

결국 나는 다양한 종류의 극단적 폭력의 '세계화'가 '세계화된' 세계를 점차 생명의 지대와 죽음의 지대로 분할하고 있다고 제안하고자 한다. 이들 지대 (심지어 그것들은 하나의 나라 또는 도시의 경계 내에서 복잡하게 중첩되고 빈번하게 재생산된다) 사이에, 결정적이고 깨지기 쉬운 초국경 (super-border) 이 존재한다. 이는 인류의 통일과 분할에 대한 공포와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 현대 유럽의 세계 정복 초기에 존재했던 '친선의 경계선' (amity line)과 유사한 세계적·지역적 '증오의 경계선' (enmity line) 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 영원한 쇼의 대상이자 동시에 개입과 불개입을 위한 뜨거운 지역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초국경이며 증오의 경계선이다. 우리는 현재의 국제 정치에서 가장 우려되는 측면이 '인도주의적 개입'인지, '일반화된 불개입'인지, 아니면 후자 이후의 전자인지 토론할 수 있다.

우리는 극단적 폭력을 시장자본주의 (또는 '자유주의 경제') 관점에서 '합리적'이거나 '기능적'이라고 간주해야 하는가?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지만 ― 사실 나는 이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 회피될 수 없다. 따라서 이는 또한 지적으로도 가장 어려운 도전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매우 명백하지만 자주 범하는 그릇된 추리를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결과와 목표 또는 목적을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체계들을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토론하는 것이 진정으로 가능한가? 다른 한편, 우리는 자본주의와 같은 어떤 구조의 내재적 목적 또는 '논리'에 대한 반성을 회피할 수 있는가?) 매우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난점은 대량폭력의 연쇄 ― 예컨대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축적을 위한 전제조건들의 창조를 빈민에 대한 폭력적 억압이라는 관점에서 묘사하면서 시초 축적 (primitive accumulation) 이라고 부른 것과 비교될 수 있다 ― 의 출현에 기원을 둔 두 가지 대립적인 '세계적 효과'에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
그 효과들 중 하나는 수백만 명의 잠재적 노동자들의 물질적·도덕적 불안전 (insecurity) 을 일반화하는 것, 즉 대규모의 프롤레타리아화 또는 재프롤레타리아화를 유발하는 것이다 (불안전이 '프롤레타리아적 조건'의 핵심에 위치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는 다수의 사람들이 다소간 벗어났던 프롤레타리아 상태로의 복귀를 결정적으로 포함하는 프롤레타리아화의 새로운 국면이다). 이러한 과정은 자본과 또한 인류의 이동성이 증가된 것과 동시대적이며, 그리고 그 때문에 이는 국경을 가로질러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과정은 또한 몇 개의 정치적 변종으로 분류될 수 있다.

1. '북반구'에서 그것은 내가 '민족적 사회적 국가'라고 부르는 복지국가가 창조한 사회정책과 사회적 시민성의 기관들의 부분적 또는 심층적 해체를 포함하여, 따라서 복지에서 근로연계복지 (workfare) [노동하는 것을 조건으로 국가가 공적인 부조를 베푸는 것]로의 폭력적 이행과 사회적 국가에서 징벌 국가 (penal state) 로의 폭력적 이행을 포함한다 (루익 와깡이 최근의 에세이에서 설득력 있게 논증한 것처럼, 미국은 이런 관점에서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
2. '남반구'에서 그것은 '발전주의적' 프로그램과 정책들의 파괴와 전도를 포함한다. 발전주의는 대체로 희망했던 [경제적] '도약'을 낳기에는 충분하지 못했지만 빈곤화에 저항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보여주었다.
3. 이매뉴엘 월러스틴의 범주를 빌려오면, '반주변부'에서 그것은 '현존 사회주의'라고 불렸던 독재 구조의 붕괴와 연관되었다.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는 결핍과 부패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다시금 특정한 한계들 내에서 부와 빈곤의 양극화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제안하고자 한다. 노동력의 재프롤레타리아화로 귀결되는 이 모든 과정들의 공통적인 형식적 특성은 그것들이 국가장치 바로 그 내부에서 [역사를 만드는] 기층 민중 (subaltern) 의 대표 형태와 가능성을, 또는 당신이 이 표현을 더 선호한다면, 다소 유효한 대항권력의 가능성을 억압하거나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주목함으로써 우선 주로 '경제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과정의 정치적 측면을 강조하고자 한다.
나는 다른 장면, 즉 대량폭력이 야기한 다른 종류의 결과들을 살펴볼 때, 정치적 측면은 훨씬 더 결정적이게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원인과 결과의 메커니즘은 지극히 불가사의하다. 그러나 이는 또한 의문의 여지가 없이 현실적이다. 나는 훨씬 더 파괴적인 경향, 즉 복지나 전통적 생활양식에 대한 파괴의 경향이 아니라, 사회적 유대 그 자체에 대한 그리고 결국 '생명 그 자체'에 대한 파괴적 경향을 염두에 두고 있다. '생을 명령하는' 정치와 '죽음을 명령하는' 정치라는 두 가지 종류의 정치를 대비시키곤 했던 미셸 푸코에 대해 생각해보자. 내가 인류의 '죽음의 지대'라고 불렀던 곳에서 펼쳐지는 극단적 폭력 또는 잔혹성의 다양한 형태들의 누적된 효과에 직면하여, 우리는 현재의 생산 및 재생산 양식이 제거를 위한 생산의 양식이자, 생산적으로 활용되거나 착취되기보다는 오히려 항상 이미 불필요한 잉여 (superfluous) 가 되는 인구의 재생산 양식이 되었으며, 따라서 이러한 인구는 '정치적' 또는 '자연적' 수단을 통해 제거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이른다―라틴 아메리카의 몇몇 사회학자들은 도발적으로 이들을 세계 도시 밖으로 '내던져진' '쓰레기 인간' (poblacion chatarra) 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또 다시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한 것의 합리성은 무엇인가? 또는 우리는 비합리성의 완벽한 승리를 대면하고 있는가?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비합리적이지만 (왜냐하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축적 규모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합리적이다 ― 또는 더 적절히 말하자면, 그것은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사실상 역사는 단순히 순환적인 방식으로 즉 축적의 연속적 국면들의 순환 유형을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19세기와 20세기에 경제적·정치적 계급투쟁이 출현했고, 그 결과로 착취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세력 균형을 창조하였다. 이러한 사건은 말하자면, 체계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 체계는 (그리고 아마도 그 체계의 이론가와 정치가의 일부는) 계급투쟁이 없는 착취는 없고, 착취 받는 자들의 조직과 대표가 없는 계급투쟁은 없으며, 정치적·사회적 시민성을 향한 경향이 없는 대표와 조직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것이 정확히 현재의 자본주의가 제공할 수 없는 것이다: 지난 세기 동안 세계의 일부에서 실현된 '민족적 사회적 국가'에 상응하는 '세계적 사회적 국가'가 실현될 가능성은 없다. 내 뜻은 정치적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세계적 사회적 국가'를 향한 모든 움직임에 대한 [현재 자본주의의] 정치적 저항이 존재하며, 게다가 그러한 저항은 매우 폭력적이다. 기술혁명은 현재적 또는 잠재적 노동력의 탈프로레타리아화를 위해 긍정적이지만 불충분한 조건을 제공한다. 바로 이 때, 직접적인 정치적 억압 또한 불충분할 것이다. 가능한 한 '수동적으로' 그리고 필요하다면 '능동적으로' 제거 또는 절멸이 일어나야 한다: 상호 제거가 '최상'이지만, 그것은 외부로부터 조장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나는 '세계적 폭력의 경제'가 기능적이지는 않지만 (왜냐하면 그것의 내재적 목표는 실로 모순적이다) 목적론적 (teleological) 의미에서 유지되고 있다고 제안한다 (여기서 우리는 나의 세 번째 질문으로 나아가게 된다): '동일한' 인구가 광범위하게 목표물로 삼아진다 (또는 역으로 목표물로 규정되지 않은 인구는 점점 동화되며, '동일한 사람들'처럼 보이게 된다). 질 들뢰즈의 표현을 빌자면, 그들은 외연적 의미가 아니라 내포적 의미에서 질적으로 '탈영토화된다'. 그들은 항구적인 제거의 위협을 받으면서 도시의 변두리에서 '생활'한다: 그러나 역으로 그들이 그들의 본국 내부로 고정될 때에도 그들은 '유목민'처럼 생활하고 또 그렇게 인식된다. 즉, 그들의 실존 그 자체, 그들의 양, 그들의 운동, 권리와 시민성에 대한 그들의 잠재적 요구가 '문명'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된다.

결국, '극단적 폭력'은 '세계적 체계'를 형성하는가?

폭력은 고도로 '비정치적'일 수 있다―이는 내가 제안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폭력의 다양한 형태가 서로를 강화한다면, 그리고 그 다양한 형태들이 그 자신의 연속과 잠식을 위한 조건을 창출하는데 기여한다면, 그리고 결국에는 그것들이 잔혹성과 절멸의 확산을 예방하거나 그 효과만을 제한하려는 행동들이 체계적으로 가로막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인간 (주의) 적 파국'의 연쇄를 확립한다면, 폭력은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거나 또는 '체계적인' 것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목적 없는 목적론은 내가 가장 객관적인 방식으로 '예방적 반혁명'으로 또는 아마 더 나은 표현으로 '예방적 반봉기'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것은 외양상으로만 '홉즈적'인데, 왜냐하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에 대항하여 사용되는 무기는 또 다른 종류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르 몽드}는 최근에 콜럼비아를 국가와 마피아에 의해 수행된 '사회에 대한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언급했다). 이는 반정치로서의 정치이지만, 폭력의 이질적 형태들 사이에 수많은 연관으로 인해 하나의 체계로 나타난다 (국가예산에 필수적인 무기거래는 부패를 동반하며, 부패는 범죄행위를 동반하며, 마약·장기매매·현대적 노예무역은 독재를 동반하고, 독재는 내전과 테러를 동반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악'의 형상을 그리기 위해서 모든 형태의 폭력을 혼돈하게 만드는 극단적 폭력의 정치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인도주의적 개입은 종종 여기에 참여한다), 방송과 개입 양자 모두를 수익성 있는 사업의 원천으로 만드는 극단적 폭력의 경제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깨지기 쉬운 경계선을 갖는 생명의 지대와 죽음의 지대 사이의 분할에 대해 말하였다. 그것은 세계화의 '전체주의적' 양상에 대해 말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세계화는 분명히 그것만이 아니다. 인류가 경제적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로는 문화적으로 '통일되는' 바로 그 시점에, 인류는 폭력적 방식을 통해 '생-정치적으로' (bio-politically) 분할되었다. 시빌리티의 정치 (또는 인권의 정치) 는 파괴된 통일성에 대한 가상적 대체물이 될 수도 있고, 동시에 모든 곳에서 그리고 특히 국경 자체에서 평등이라는 쟁점을 정치적 행동의 지평으로 재도입하는 일련의 주도성이 될 수도 있다.

결론

'진정한' 결론은 없을 것이고, 단지 몇몇 민감한 쟁점에 관한 직접적 반성과 토론의 시도들만이 있을 뿐이다: '대항폭력'이라는 쟁점, 국제법이라는 쟁점, '시민성'에 대한 접근이라는 쟁점, 그리고 내가 '봉기'라고 부른 것 등. 우리는 서로 다른 종류의 '시빌리티 전략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그 전략들의 실현 가능한 토대와 실행에 관한 논의는 또 다른 에세이에서 다룰 문제다. 나는 간략하게 다음과 같은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극단적 폭력 또는 잔혹성의 연계 속에서 현실적 측면과 가상적 측면이 매우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하나를 다른 것에 비해 특권화하는 태도를 벗어나기는 매우 어렵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정치적 행위에 관한 고전적 개념들이 항상 행해왔던 것이다: 고전적 개념들은 주로 공동체들과 공동체적 감정을 형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거나 (그리고 나는 모든 역사적 공동체들이 일차적으로 '상상된 공동체'라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주장에 확실히 동의한다), 또는 더 유물론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 즉 사회적 구조들, 특히 지배와 착취의 구조를 변혁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는 전형적인 사례다). 나는 오늘의 정치에서 극단적 폭력이라는 쟁점의 핵심적 특징은, 이러한 이중적 양상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양상들의 요구와 제약을 비판적인 방식으로 결합하기 위해 실천적·구체적으로 노력함으로써, 그러한 이원성의 지양을 탐색하고 발명하는 것을 훨씬 더 긴급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때문에, 예를 들어, 나는 국제법이 세계적 규모의 민주주의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요소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시빌리티의 정치의 토대가 국제법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만족하지 않는다. 예컨대 위르겐 하버마스는 그 [국제법] 이면에 있는 교통 (communication) 의 윤리에 대한 강조를 덧붙이면서 일관되게 이러한 방향으로 움직여왔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교통'의 관문들이 때로는 강제에 의해서, 때로는 폭력적 방식으로 열려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잠겨진 채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여기서 국제법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정반대 각도에서 보면, 우리는 어렴풋이 나타나고 있는 대량폭력의 반혁명적 또는 반봉기적 특징은 혁명이라는 관념의 갱신으로서 '반-반봉기' (counter-counterinsurrection) 를 요청한다고 제안할 수 있으며, 이를 옹호하는 충실한 사례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 이 때 아마도 진정한 '세계혁명'은 폭력과 자본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최근 '제국'이라고 부르는 것 등을 연계시키는 바로 그 세계적 구조에 대항하는 방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여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 어려움은 정치적 수단과 목표가 바로 그 [자본주의, 제국주의, '제국'과 똑같은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 대칭성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사회주의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인 최초의 혁명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름으로 권력을 장악하려한 이래로, 정치적 수단과 목표는 극단적 폭력이 해방의 정치의 핵심에 구축되는 데 일조했고, 20세기가 에릭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라 부른 것이 되는 것에 일조했다. 국가나 경제뿐만이 아니라 혁명 그 자체가 '문명화'되거나 '시민적' (civil) 이게 될 필요가 있다. 나는 오늘 많은 곳에서 그러한 역사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이 적극적으로 탐색되고 있지만 분명히 발견되거나 제시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좀 더 조심스럽고 아마도 아포리아에 가까운 방식으로 네덜란드 정치학자 헤르만 판 군스테렌의 최근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고자 한다. 나는 모든 정치적 공동체들 ― 여기에는 근린에서부터 도시, 국가, 대륙, 지구 그 자체에 이르는 (가야트리 샤크라보티 스피박은 이런 맥락에서 행성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또는 '영토'에서 '네트워크'에 이르는 가상적 공동체들이 포함된다 ― ( [위대한 결말을 암시하는] '숙명' (destiny) 과는 반대로)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지만 비극적으로 투쟁할 수는 있는] 운명 (fate) 의 공동체라는 판 군스테렌의 제안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공동체들은 이미 차이와 갈등을 포함하며, 그 곳에서 이질적인 인간과 집단들은 역사와 경제에 의해 '함께 내던져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이익이나 문화적 이상은 자연발생적으로 수렴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호파괴 (또는 외부 세력에 의한 공멸) 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완전히 분기될 수도 없다. 인권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비판 (그리고 또한 1796년 칸트의 에세이 '영구 평화를 향하여'의 정식, '그들은 ... 결국 서로 가까이 있는 것을 참아야 한다')에서 영감을 얻어서, 판 군스테렌은 모든 집단의 모든 개인에게는 그 또는 그녀가 '시민'으로 인정되는 적어도 하나의 '장소'가 세계 내에 존재해야만 하고, 따라서 인권을 누릴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메타정치적 (metapolitical) [정치에 대한 정치라는 차원의] 원칙을 명확히 한다. 그러나 그 원칙을 넘어 단 한 걸음만 더 나아간다면 (이 원칙은 다른 의미에서는 단지 우리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한 장소는 어디인가? 공동체가 '운명의 공동체'라면 가능한 유일한 대답은 급진적인 것이다: 개인들과 집단들이 속한 어느 곳이라도 그러한 장소가 될 수 있다. 어디든 그들이 '우연히' 살게되고, 그래서 일하며 아이를 기르고, 친척을 부양하고, 모든 종류의 '친교'를 위해 동료를 찾는 모든 곳이 그러한 장소다. 오늘날의 세계화되고 잔혹한 세계의 '지형학'에 대해 내가 제안한 것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우리가 다음과 같이 더 정확히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권에 대한 승인과 제도는 실천적으로 인권의 발전을 명령하며 하나의 공동체에 대한 배타적 소속 (membership) 을 넘어 조직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국경 위에' 위치해야 하는데, 우리의 수많은 동시대인들이 실제로 그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당연히 이는 불안정한 상황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매우 정확한 요구를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판 군스테렌은, 내가 '시빌리티'의 관점이라고 부른 것에 입각해 볼 때 중요한 문제는 단지 시민성과 따라서 인간성에 대한 소속의 자격이 아니라 항구적 접근권이라는 (또는 그가 쓴 것처럼 '형성 중인' 시민성이라는) 관념을 타당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법적 지위라기보다는 적극적이고 집단적인 시민적 과정이다. PSSP
2004년06월14일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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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평론 19호 / 발행일:2007-01-05

[논쟁: 문화사회론과 자율주의] 문화에서 다시 삶-노동으로

-조정환 



글머리에


1990년대는 노동에서의 이탈, 탈노동이 사회적 삶과 앎의 전 부면에서 나타났던 역사적 시기였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은 노동 담론에 대한 비판을 공통적 근거로 삼는다. 거대서사에 대한 거부, 공통성에 대한 반박, 생산주의 비판, 혹은 생산에서 소비로의 관심이동, 탈중심주의 등의 특징들은 일관되게 노동 담론에 대한 비판과 연결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러한 방향정립은 역설적으로 근대성이 노동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었음을 사후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한국의 문화운동에서 나타난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라는 슬로건은 넓은 의미에서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의 일부이다. 그것은 노동에 대한 거부와 그것의 문화로의 대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역설함으로써 근대성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작업에 동참해 왔다.


노동에 대한 비판과 탈노동의 경향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우리는 이것이 1968년을 전후한 혁명적 운동들의 욕망이었음을 알고 있다. 이탈리아 오뻬라이스모(operaismo)1)운동의 노동거부는 대표적 사례이다. 그것은 전 인구의 노동자화를 추구한 서구 복지국가에 대한 대항운동으로 나타났다. 1968혁명에서 이와 동일한 성격의 운동들이 전 지구적 수준에서 표현되었다. 여기에 이어진 노동조합의 쇠퇴는 노동에서의 이탈로 특징지어지는 이 운동의 효과였다. 전 인구의 노동자화 속에서 유효한 저항형태들이었던 노동조합, 노동자당 등은 더 이상 전망을 제시할 수 없게 되며 정치적으로는 '좋았던 옛 시절'을 조금이라도 더 지키려는 보수적 성격을 띠어 가게 된다. 이렇게 노동에 대한 거부가 아래로부터의 광범위한 욕구로 대두되었고 그것이 전 지구적 수준에서의 집단적 운동으로 표출되었던 만큼 탈노동의 경향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이 경향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든 또 하나의 흐름이 있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탈노동의 고착화, 노동거부 운동의 자본주의적 역이용이 그것이다. 세계 어디서나 확인되는 신자유주의적 정리해고, 대량실업, 불안정노동화는 탈노동의 운동에 대한 반-혁명으로서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지배의 논리로 역전시키는 방식이다. 생존에서 삶으로의 상승을 달성하려던 운동은 자본의 역공에 직면하여 생존 그 자체마저도 보장받을 수 없는 위기 속으로 내몰린다. 산업으로부터 자본의 대량이탈과 금융자본화가 기존의 공공성, 복지 체제의 와해와 결합되면서 사람들은 빚더미에 짓눌리고 거리로 내몰리며 하루하루 공포와 불안의 시간에 대면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운동의 일부는 다시 복지 체제의 수호, 공공성의 복원, 노동의 재정립을 주장하지만 아래로부터 욕망될 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강제되는 탈노동의 경향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상황적 진실은, ‘일하지 말자’ '게으르자' 식으로 협소하게 정의된 노동거부 주장이나 탈노동의 운동이 현재의 상황 속에서 더 이상 운동적 의미를 갖지 못하며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유효성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그것은 자본의 요구로 쉽게 흡수되며 신자유주의적 반노동의 공격을 정당화해주는 뜻하지 않은 효과를 가져온다.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라는 슬로건이 직면하는 위험도 바로 여기에서 주어진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적 반노동의 정치가 현실에서는 노동사회로부터의 이탈을 추구하면서 그 대안을 문화사회화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산업재구조화 노력과 1990년대에 적극적으로 추진된 정보사회화는 그 근본적 지향에서 보면 문화사회화라고 이름 부를 수 있다. 사회 전체의 컴퓨터화와 정보적 소통망의 발전, 그리고 오래 지속된 이른바 ‘한류’는 아마도 자본의 이러한 문화사회적 재정향의 분명한 결실들 중의 일부일 것이다. 이 때문에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라는 슬로건은 ‘문화사회’ 대신 ‘생태적 문화사회’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부분적 개념보완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근본적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이 나의 글 「생태적 문화사회론의 탈노동의 문화관 및 도식적 사회론의 문제점 비판」(이하 「비판」)이 근거하고 있는 이론적이자 동시에 실천적인 문제의식이다. 여기에서 나는 문화사회론의 탈노동의 문화관이 노동의 세계창조적 가능성을 이론화할 수 없게 되면서 유토피아적 대안으로 함몰했고 그것이 도식주의적 사고를 유발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시간2)의 망각이라는 근대 철학의 일반적 경향을 구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심광현 교수는 「<자본을 넘어 생태적 문화사회로>에 대한 조정환 선생의 논평에 대한 반론」3)에서 현실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꿈꾸기로서의 유토피아의 적극성을 다시 한 번 옹호했다. 그것은 문화사회론이 노동자평의회, 노동자연합,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에 기초한 생산양식의 변형을 사회구성체론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는 정치학적 선언으로 이어지며 공장노동자가 사회적 노동자로, 대중은 다중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사실의 승인에 의해 보충된다. 과연 이러한 정치철학, 정치사회학이 문화사회론의 골간과 결합 가능할까? 혹은 문화사회론이 일관성 있게 이러한 정치학으로 전개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평의회, 노동자연합 등의 생각이 우리 시대의 주체형성을 위한 실재적 가능성을 충분하게 표현할 수 있는가? 그것이 추상적 가능성에 기초하여 대안을 도식적으로 그리고 절충적으로 상상하는 수준을 넘어설 수 있는가? 심 교수의 반론의 뒷부분에 등장하는 국가와 공공성, 기술, 양극화, FTA에 대한 논의는 이 문제와 연관되어 있고 또 그로부터 도출되는 세분되고 실제적인 논점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의 재비판에서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와 문화사회론 사이의 쟁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좀 더 확실하게 밝히기 위해 실재적 가능성과 유토피아적 가능성의 차이라는 근본적 문제에서 출발하기로 하겠다.


두 가지의 가능성: 유토피아적 가능성과 실재적 가능성


심 교수에 따르면 문화사회론은 다음과 같은 기획이다.


"문화사회론은 자본주의적인 지배적 삶의 논리와 방식과는 다르게 작동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기에 분명히 유토피아적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 유토피아란 문자 그대로 아직까지 현실에 없는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그런데 꿈꾸기란 한편으로는 현실을 외면하고 공상에 매달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을 비판하고 거부한다고 하는 적극적 성격을 지닐 수 있다. 문화사회론은 전자적 의미의 유토피아는 거부하지만 후자적 의미의 유토피아를 적극적으로 추구한다."4)


문화사회론이 '유토피아적' 대안이라고 비판하면서 내가 염두에 둔 것도 '현실을 외면하고 공상에 매달린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역설적이지만 나는 문화사회론의 유토피아주의가 기존의 현실을 외면하기는커녕 지나치게 존중하고 그것에 순응하는 경향을 보인다고까지 말했다.5)


"‘새로운 사회구성체론을 위한 사회적 매트릭스’라는 이름을 단 심 교수의 도식은 부르주아 사회의 사회분할 형식들(경제, 정치, 문화; 사적, 협동적, 공적) 모두를 인위적으로, 그리고 실증주의적으로 긍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의 효과는 무엇인가? 삶의 역사적으로 특수한 형식들이 이 매트릭스 속에서는 보편성의 형식으로 승격된다."6)


유토피아주의라는 비판과 실증주의라는 비판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 그렇다. 모순된다. 그러나 이 모순은 문화사회론의 이론 내적 모순, 즉 그 내부에 공존하면서 화해하고 있는 두 경향이다. 이것들이 어떻게 공존하는가? 우리는 문화사회론이 말하는 유토피아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즉 '현실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적극적 꿈꾸기'(심광현)로서, 혹은 '현실의 외면이 아니라 차라리 현실의 거부요, 오늘의 삶의 전체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더 이상 용남하고 싶지 않은 태도에서 나오는,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미래를 위한 몸짓'(강내희)으로서. 문제는 이러한 유토피아적 기획이 현실의 모순을 극복해 나가는 실재적 운동으로 유효하게 기능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당연히 나의 생각은 그것이 현실 극복의 실재적 운동으로 나아가기에는 너무나 유토피아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실재하는 가능성, 실재적 경향을 발견할 수 없고 새로운 삶을 꿈꾸려는 몸짓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낡은 삶의 현실적 형태들(국가, 시장, 화폐 등등)에 붙들린다는 것이다. 경향을 발견한다 함은 '경향'이라는 말을 쓰느냐 쓰지 않느냐하는 것에서는 독립적인 문제이다. 경향은 실재(reality)로서의 잠재력(virtuality)의 현실화(actualization)로서, 다시 말해 잠재력의 강도적 표현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7) 이런 의미에서 경향은 현실화로 나아가는 가능성이면서 그 자체 실재하는 가능성이다. 그것은 '전개된 현실을 규제하는 법칙'과는 동일시될 수 없으며 따라서 전개된 현실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서 도출될 수도 없다. 반대로 그것은 실재의 분화/미분화 운동에서 벗어난 유토피아적 꿈꾸기에서 도출될 수도 없다. 물론 과학과 유토피아를 '절합'해서 '과학적-유토피아적 대안'을 생각해 본다고 해서 그 실재적 경향이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8)


가능성은 많은 경우에 현실성의 투사(投射)이다. 해답을 미리 생각하고 그 답이 나올 수 있는 가능한 문제를 상상할 때의 가능성이 그것이다. 이때의 가능성은 어떠한 표현적 힘도 갖지 못하며 이미 상정된 해답에 예속된다. 그것은 실재적이지 않으며 재현된 것, 상상된 것이다. 그것은 자유롭지 않다. 반면 실재적 가능성은 현실성의 투사가 아니라 잠재력의 표현이다. 그것은 해답에 예속되지 않는 물음이자 문제제기이다. 그것이 어떤 현실적 해(解)로 귀착될지는 알 수 없으며 열려 있다. 즉 실재적 가능성은 자유롭다. 그것은 '대안'이라기보다 우선 '기획'이며 대안에 구속된 기획이 아니라 대안을 산출하는 기획이다. 어떤 미래도 불확정적이며,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지금-여기에서의 삶과 싸움을 통해서만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유토피아(Utopia)가 아니라 디스토피아(Dystopia)이다.


그렇다면 문화사회론의 가능성 개념은 어떠한가? 그것의 메커니즘과 위치는 다음과 같다. (1)현실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한다, (2)현실에 없는 다른 세계를 꿈꾼다(즉 다른 해답을 상상한다), (3)이 양자를 결합시킨다. 가능성 범주의 위상은 (2)에 있다. 그것은 (1)에서 도출되는 현실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대체할 노동자평의회적, 노동자 연합적, 노동자-다중 연합적 생산양식을 창출하는 것이다. 문화사회론은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론의 이행을 전망하는데, 이것은 노동의 일반화, 보편화를 해방의 조건으로 추구하던 시대의 조직적 전망인 노동자 평의회, 노동자 연합과는 논리적으로 결합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 교수는 (2)를 달성할 구체적 경로, 즉 '어떻게'를 고안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사회구성체론을 위한 사회적 매트릭스’이다. 그 매트릭스를 구성하는 9개의 항이 잠재적인 것의 표현으로서 설정되지 않고 현실에 존재하는 범주들의 새로운 시스템적 조합으로 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비판」에서 말한 바 있다.


심 교수의 가능성 개념이 칸트의 도덕론 및 도식론과 아무런 마찰 없이 결합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잠재적인 것에 대한 탐구와 연결되지 않는다. 심 교수의 도덕=실천이나 도식은 잠재적인 것에 대한 어떤 고려도 포함하지 않고 있다.9) 그것은 실제로는 현실적인 것들에서 직접, 그리고 유토피아적 방식으로 도출되는 현실적인 것의 투사로서의 가능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조 선생이 맑스를 비판적으로 조탁하여 찾아내려는 대안은 문화사회론과 정작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다음과 같은 지점이 아닐까 싶다. 조 선생이 어두운 노동에서 세계창조적 노동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어떻게’를 제시하지 않는 것에 반해 우리는 생산-유통은 물론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는 정보기술혁명으로 심화되는 자동기술화를 골간으로 하는 최근의 생산의 사회화 경향 속에서 그 이행의 그 가능성을 찾아내려 한다는 것이다."10)


생산의 사회화의 핵심을 노동의 사회화, 사회적 노동에서 읽지 않고 자동기술화에서 읽는 것은 부주의의 소산이 아니라 문화사회론의 일관된 이론적 경향성이다. 정보기술혁명, 자동기술화는 바로 현대 자본주의의 현실적 경향이며 문화사회론의 대안적 가능성은 바로 그것으로부터 도출되고 있다. 다음으로 이 인용 속에는 하나의 이론이, 실재하는 운동들의 실재적 가능성의 표현 과정과는 별도로(사실은 그것을 무시하면서) '어떻게'를 안출하고 제안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모자람이라도 된다는 듯한 서술이 그것이다. 맑스가 '어떻게'에 대해 극히 조심스러워하고 또 미래에 대한 구상을 삼가한 것은 결코 그의 무지나 유토피아성의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적 경향, 실재적 가능성에 충실하려는 그의 유물론적 태도의 표현이다. 가능성을 추상적으로(또는 현실에서 추상될 수 있는 것들의 투사로서) 이해하고 유토피아적 대안으로 사고하면 할수록 미래에 대한 제안, 새로운 보편적 체계의 고안 등에서 주저함이 없어지면서 전위주의적이고 대리주의적=재현주의적인 욕망에 쉽게 굴복하게 된다.


그렇다면 문화사회론이 망각하고 있다고 내가 말하는 것, 혹은 실재적 가능성이 근거하고 있다고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인 저 잠재적인 것, 잠재력, 잠재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사고되어 왔다. 예컨대 스피노자의 실체, 라이프니츠의 단자, 칸트가 자신의 비판철학에서 배제했던 것인 물자체, 니체의 힘에의 의지, 베르그송의 시간, 기억, 생의 약동, 네그리의 역능, 들뢰즈의 다양체 등을 나는 그것을 사유하려는 노력들로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철학적 개념에서 출발하여 지금여기에서의 우리의 논점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문제를 외면적으로 다루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노동과 문화의 분리, 노동에서 문화로의 이행이라는 문화사회론의 주장에서 출발하여 잠재성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가 속했던 지난 현실에서 노동과 문화는 구분되었다. 알튀세의 층위적 구분(실천의 경제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형태)이나 아렌트의 범주적 구분(노동-작업-행위)이 그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졌던 것은 우리가 속해 온 현실에서의 추상에 입각한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 의 현실을 재현하는 힘을 갖는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문화사회론이 노동으로부터 문화를 구분할 때 그 나름의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노동에서 문화로의 이행이라는 주장은 어떠한가? 그것은 현실의 노동에서 현실의 문화로의 층위이동, 즉 강조점의 이동인가? 문화사회론에는 분명히 이러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자동기술화로 인한 노동시간의 단축경향을 문화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단초로 파악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행 개념은 이미 자본주의 내부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단순한 이론적 긍정과 재현 이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 경제적인 것은 문화적인 것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중첩되었고 심지어는 문화가 생산의 중심으로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사회론이 계급정치를 포기한 개량주의적 관점으로 비판되곤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요소 때문이다.11) 문화사회론이 '문화' 개념을 단순한 현실 범주 즉 설명 범주를 넘어 유토피아적 이념 범주로 전화시키려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판을 넘어서려는 노력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결과 문화사회론에서 '문화'는 주체성, 윤리, 이행, 코뮤니즘 등의 의미까지 함축하는 과잉 해석된 개념으로 비대해지게 된다. 하지만 그 노력은 결국 현실 범주들의 재합성으로 귀착되고 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그리고 「비판」에서 이미 말했다. 다시 말해 문화사회론은 현실 범주들을 질적으로 바꿀 어떤 적극적 힘도 구축하지 못한다. 오히려 현실의 제 역사적 범주들(국가, 시장, 화폐 그리고 노동, 정치, 문화의 범역적 구별들 등)은 문화사회론에서 방어되고 보존되기에 이른다.


노동자문화론은 문화사회론의 이러한 현실주의적 문화주의에 대항하여 다시 노동 범주에 강조점을 두는 것으로 나아가는데, 이 사이에서의 쟁점은 현실 범주로서의 노동과 역시 현실 범주로서의 문화 사이에서의 경합 이상이 아니다. 그런데 노동과 문화의 구분은 현실성의 수준에서의 구분이며 그것도 지난 날의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 양자가 구분되지 않는 수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삶의 평면이다. 그 삶은 특정한 삶, 정관사적 삶이 아니라 특이한 삶, 즉 부정관사적 삶이다. 자본주의적 노동과 문화는 모두 이 부정관사적 삶이 분화되고 외화된 현실태들이며 자본주의에서 그것은 소외로 경험된다. 즉 자본주의적 노동과 자본주의적 문화는 소외된 노동이며 소외된 문화이다. 전자가 맑스에 의해 분석된 임금노동이며 후자는 기 드보르에 의해 분석된 스펙터클 문화이다. 오뻬라이스모가 노동거부를 통해 소외된 노동형식을 거부하고 삶을 만회하고자 했음에 반해 문화사회론은 임금노동에 대한 거부를 통해 역시 소외된 삶형식일 뿐인 문화로 나아가고자 한다.12) 물론 문화사회론은 문화를 과잉 해석함으로써 소외된 자본주의적 문화형식을 넘어서고자 하지만 그것이 잠재적 삶의 자기표현이 아니라 유토피아적 추상적 가능성의 안출인 한에서 그 시도는 그 의지에 부응하는 동력을 구하는 것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요컨대 평의회, 노동자연합, 노동자-다중연합 등이 역사에서 주어지는 그 개념들 자체의 명목적 권위를 제하면 어떤 실재성도 갖지 않는 추상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현실화될 가능조건은 문화사회론 내부에서 탐색되고 있지 않으며 가능성에 관한 유토피아적 접근이 긍정되는 한에서 그것은 원칙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실재의 운동 속에서 코뮤니즘의 가능조건을 탐구하려 했던 맑스의 고유성은 상대화되어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맑스와의 차이는 과거에 오해했던 것처럼 절대적이기보다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13)고 주장되게 되며 맑스의 코뮤니즘은 칸트적 '지상명령'과 동일시된다.14) 이것이 실재에서 유토피아로의 이론적 후퇴를 마치 쇄신인 것처럼 정당화하는 문화사회론과 심 교수의 방법이다.


임금노동은 특이한 삶에 대한 자본주의적 절단에서 성립했다. 그것은 삶의 조건인 생산수단을 삶으로부터 박탈한 후 공장에서 재결합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노동과정은 시계에 의해 측정되었고 노동시간은 가치의 척도로 자리 잡았다. 이 메커니즘을 통해 점점 더 많은 삶의 부분들이 임금노동에 포섭되었지만 모든 삶이 임금노동으로 포섭되었던 것은 아니다. 임금노동이 확대되는 만큼 비임금노동도 확대되어 임금노동과 긴밀한 연결관계 속에 배치되었다. 그 결과 임금노동은 노동의 특수한 형식으로 되었지만 삶의 거의 모든 부면은 임금을 받건 받지 않건 상관없이 자본주의적 강제노동의 틀 속에 포섭되었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총체적 포섭의 상황이다.


총체적 포섭에서 노동과 문화의 구별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화야말로 노동의 핵심적 형식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노동은 문화적 노동이다.15) 그렇기 때문에 노동에서 문화로! 라는 구호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삶과 노동의 중첩의 상황이다. 자본주의는 이제 삶으로부터 절단한 특수한 활동들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 총체적 삶을 착취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의) 노동의 내적 구획 및 노동시간과 비노동의 자유시간 사이의 구획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문화사회론은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을 통한 자유시간의 확대를 전략으로 제안한다. 물론 필요노동시간과 자유시간의 대비는 고전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잘못이다. 필요노동시간은 잉여노동시간과 대비되지 자유시간과 대비되는 것이 아니다.16) 이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 첫째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의 구획, 그리고 노동시간과 자유시간의 구획은 자본의 전략이다. 이 때문에 이 구획에 근거한 노동의 전략은, 그것이 자유시간의 확대를 위해 필요노동시간을 단축시키려는 것일지라도 자본에게 쉽게 흡수된다. 특히, 그리고 둘째로 현대 자본주의에서 노동시간과 자유시간(비노동시간)의 구획은 실제적이지 않다. 자본이 자유시간을 착취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이미 구축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유시간 속에서 착취되고 수탈당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비노동시간은 없다. 그러므로 전략은 자본의 시간구획 속에서 찾아져서는 안 되고 노동과 삶의 중첩이라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삶을 만회하고 확장시킬 것인가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것이 삶정치론, 삶문화론의 문제의식이다.17)


그런데 삶을 위한 전략은 현대적 노동배치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얽혀 있기 때문에 노동에 대한 탐구를 피해 갈 수 없다. 물질노동에 대한 탐구 외에, 그것의 헤게모니를 대체해 가고 있는 지적, 정보적, 소통적, 정동적 노동의 부상에 대한 탐구의 필요성은 여기에서 제기된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문화연구는 노동연구와 분리될 수 없고 또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 노동과 문화의 구획은 이처럼 현실성의 수준에서조차 더 이상 분리될 수 없게 되고 있기 때문에 노동에서 문화로! 라는 슬로건은 현대 자본주의의 현실에서조차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이 슬로건은 노동과 문화의 융합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감춘다. 이런 의미에서, 즉 노동과 문화가 구분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문화에서 노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부정관사적이고 특이한 삶이 문화적이고 비물질적인 노동으로 나타나는 현대 자본주의의 역사적 위치와 의미를 파악하고 그로부터 변혁의 문제를 사유해야 한다.


노동은 국가를 필요로 하는가?


이상에서 나는 문화사회론의 기본전제와 근본 문제를 비교적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이제 이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좀 더 세부적인 쟁점들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이 쟁점들 중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국가에 대한 관점과 태도의 문제이다. 심 교수는 국가를 활용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이를 뒷받침 하기위해 그는 맑스의 1865년 논문인 「가치, 가격과 이윤」의 일절을 빌려 온다. "노동자 계급은 정부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들은 그 권력을 자본에 맞서 활용함으로써 노동자들 자신의 기관으로 전환시킨다"(강조: 조정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할 맑스의 인용이라면 1848년의 「공산주의자 선언」에서도 좀 더 명시적인 구절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자본론』 1권에서 빌려 온 인용, 즉 10시간 노동일의 법률통과를 주장하는 맑스의 말은 국가권력 장악과 이용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용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1870년 파리 코뮨의 체험 이후에 맑스가 기존의 국가권력을 노동계급이 장악하여 그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역사적으로 폐기처분했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18)


심 교수의 국가론은 맑스로부터 주어지기보다 루카치, 헬러를 잇는 필요노동 학파의 리보위츠로부터 주어진다. 심 교수에게 어떤 놀라운 생각들이 전승되고 있는가? 심 교수는 '자본주의 하에서 국가를 필요로 하는 것은 자본보다는 노동자들이다'19)라고 단언한다. 자본은 경제적 관계들에 의존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지만 노동은 자신의 보호와 단결을 위해 반드시 국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국가를 노동자들의 기관으로 만들려는 투쟁 속에서 노동은 단일한 계급으로 결집될 수 있기 때문에 자본과의 경쟁 속에서 국가를 장악하려는 투쟁은 자본을 넘어서기 위한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이며 이런 투쟁 없이는 자본을 넘어설 수 없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이렇게 발전시킨다.


"맑스가 강조했듯이 부르주아 사회의 집중 형태인 자본주의 국가를 그대로 활용해서는 자본을 넘어설 수 없고, 오직 기존의 국가장치를 혁명적 실천의 영속적 과정을 보장하는 정치적 형식으로 전환시키는 투쟁을 통해서만 자본을 넘어서는 일이 가능하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해서 공공부문을 방어하려는 투쟁, 나아가 공공부문의 민주적 운영을 통해 성과를 사회화하려는 투쟁은 자본의 공세를 넘어서기 위해 필수적인 투쟁이다. 이 점을 놓치고 신자유주의에 의해 국가가 쇠퇴하는 것을 환영하면서 경쟁을 통해 자신의 힘을 강화하는 자본의 무장한 공세에 다중의 네트워크로 직접 맞서자는 주장은 중무장한 탱크를 맨손으로 맞서 싸워 이기자는 식의 무모한 주장에 다름 아니다."20)


레닌은 코뮨에서부터 맑스가 얻은 교훈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기존의 부르주아적 국가기관의 파괴를 필요로 한다'는 것으로 독해했다.21) 코뮨은 국가 아닌 국가, 즉 반(半)국가여야 했다. 심 교수는 이것을 '기존의 국가장치를 혁명적 실천의 영속적 과정을 보장하는 정치적 형식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독해한다. 공공부문의 방어, 그것의 민주적 운영, 그 성과의 사회화를 위해서는 국가권력의 장악이 필요하다. 이것이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과제이고 그것의 강령 그 자체라고 여기서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기존 국가장치의 파괴가 아니라 전환을 통해서 이런 과제들을 실천하는 국가를 '코뮨 유형의 국가'라고 심 교수가 말할 때, 그것은 코뮨이 세기를 두 번 넘어 희극적으로 반복되는 현재적 사례 이상이 아니다.


국가가 단결의 매개체라는 생각은 허구일 뿐만 아니라 아주 오래 지속되어온 속임수이다. 국가는 단결시키지만 항상 분열과 배제와 억압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 국가의 단결은 권력적 단결이며 그것은 지배받는 사람들을 창출하기 위한 수단이다. 모든 국가 형식은 권력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창출하는 결사체로서 존립한다. 국가는 분열시키기 위해서 단결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분열의 무기이지 단결의 무기가 아니다.


또 자본/주의가 국가 없이 존립 가능하다는 생각은 역사적 경험과 양립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국가에 의존해 온 사회체제이다. 또 20세기의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 국가 혹은 제3세계의 권위주의 국가는 시장지원적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자본으로서 소유하고 생산했다. 요컨대 역사적 국가자본주의들은 '국가=자본'인 한 시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는 국가와 대립하거나 그것 없이 존립 가능한 정치형태인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신자유주의는 국가가 시장관계 창출의 행위자로 적극적으로 기능하는 사회형태이다.22) 국가를 장악해서 노동의 단결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국가 그 자체가 자본관계의 한 양태임을 망각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생각이다. 노동자들 혹은 사회주의자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국가를 장악하여 사용하려 하는 순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본의 관리자, 즉 자본가계급으로 전화된다.


그런데 정작 국가를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의 깊은 무의식은 다음 대목, 즉 '자본의 무장한 공세에 다중의 네트워크로 직접 맞서자는 주장은 중무장한 탱크를 맨손으로 맞서 싸워 이기자는 식의 무모한 주장'이라는 대목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생각은 이 글의 맨 끝에서 '경찰적 국가에 의해 강력히 지원받고 있는 자본에 대해 다중이 어떻게 대결할 수 있다는 것인지'라는 회의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이것은, '다중은 맨손이기 때문에 국가장악 없이는 무장한 자본과 맞서 이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사는 다중이 맨손으로, 중무장한 탱크와 맞섰던 많은 사례들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에는 팽팽한 대치 혹은 일시적 승리로 귀착되었던 사례들도 적지 않다. 대체 맨손으로 일어서는 다중이란 무엇인가? 거꾸로, 다중의 네트워크는 과연 맨손인가? 맨손으로 보이는 다중의 네트워크는 무장한 자본, 경찰국가 등과 맞서 이길 수 없는가?


심 교수의 생각은 얼핏 보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식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상식의 수용과 반복 속에 문화사회론의 정치학의 최대의 취약점이 놓여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경찰국가, 무장력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이며, 다음으로는 바로 그것의 반사물인, 국가권력과 그것의 무장력에 대한 선망(羨望)이다. 국가권력으로 조직된 다중23)만이 무장한 자본과 맞설 수 있다는 생각은 국가 형태 그 자체의 집중적, 위계적, 배제적, 폭력적 성격으로 인하여 사회 내에 균열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로의 균열은 자본관계 탄생의 모태이다. 요컨대 국가권력에 대한 선망은, 의식상에서의 그 의지가 어떠하든, 자본관계에 대한 선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이 지난 세기 국가권력 장악을 이행의 필수적 계기로 삼았던 사회주의 및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체험이 우리에게 뼈저리게 가르쳐주고 있는 교훈이다.


기존 국가권력에 대한 공포와 그 의식상의 반사물인 '민중의 국가권력'에 대한 선망은 좀 더 근원적인 문제에서 기원한다. 그 근원적인 문제란 바로 앞서 우리가 분석한 바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다. 민중권력에 대한 선망은 기존 국가권력으로부터 추상되는 가능성, 즉 현실로부터의 추상을 통해 주어져 있는 답을 이끌어 내기 위한 문제설정이다. 그것은 재현적 문제설정이며 실재적이지 않은 문제설정이다. 그것은 국가의 실존, 그것의 권력, 그것의 폭력을 재현하며 민중 속에 내면화한다. 이리하여 노동에서 국가로 정치적 입장의 전환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맑스의 생각은 그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는, 자본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산 노동이 취하는 형태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현실적 자본은 잠재적 노동이 현실화된 것이다. 여기에서 현실적 자본이 실재적이라는 것은 보통의 눈에도 쉽게 인지되지만 그것이 잠재적인 것인 산 노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잠재적 산 노동 역시 실재적이라는 사실은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본관계 속에서 현상하는 모든 노동생산물은 노동이라는 사회적 실재의 체화에 다름 아니다.


"노동생산물에 남아 있는 것은 ... 형태가 없는 동일한 실체, 동질적인 인간 노동의 응고물일 뿐이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그들의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지출되었다는 것, 인간 노동이 그들 속에 체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에 공통적인 이러한 사회적 실체가 결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모든 물건들은 가치, 상품가치인 것이다."24)


사회적 노동의 실재성을 승인하는가 않는가, 나아가 자본관계에 비해 사회적 노동이 그 근원적인 실체임을 승인하는가 않는가는 본질적인 문제이다.


국가형태 역시 사회적 노동에 선행하거나 그것보다 우월한 힘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노동에 의존하며 그것에서 파생되는 역사적 형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가 취하는 그 어떠한 현상적 힘들(무장력, 조직력, 강제력 등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노동의 힘은, 다시 말해 네트워크화된 다중의 힘은 그보다 더 근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본의 역사적 변태들이나 역사적 국가형태는 사회적 노동의 힘에 대한 반응적 관리양식이기 때문에 다중의 네트워크는 이미, 또 언제나 국가형태와 맞서면서 그것을 변형시키고 그것의 현존양식을 타개해온 잠재적이지만(그래서 상식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명백하게 실재적인 힘이다. 그러므로 심 교수가 다중의 네트워크를 '맨손⇒아무 것도 없음⇒무력함⇒부재함'이라고 보게 되는 것은, 그리하여 다중이 국가로 조직되고서야(즉 다중이 민중으로 전화되고서야) 그 무력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우선 역능의 다양한 역사적 형태들(활력, 권력, 폭력 등)에서 권력과 폭력을 특권화하는 태도이다. 둘째로 그것은 앞서 분석한 바처럼, 역사적 가능성을 잠재적인 것의 표현으로서의 실재적 가능성에서 찾지 않고, 현실적인 것에서 추상한 비실재적 가능성에서 찾으려 하는 것의 이론적 결과로서의 다중의 활력에 대한 경시이다. 실재적 가능성의 표현주의적 운동25)에서 분리된 추상적이고 비실재적인 가능성은 흔히 도식주의적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심 교수에게서 나타나는 도식주의는 그러한 경향의 한 사례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종합되어, 자본관계를 넘어서려는 주관적 의지에도 불구하고, 권력으로 조직된 민중형태에 입각하여 자본관계를 뒷받침하고 재생산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기술, 양극화, 공공성, 그리고 한미FTA


이상이 이번 재비판에서 내가 역점을 두어 다루고자한 두 가지 핵심 쟁점이다. 이제 좀 더 미시적인 문제들이 남았다. 기술, 양극화, 공공성, FTA 등이 그것이다. 이 문제들에서는 논리적 반론의 방법를 취하기보다 나의 입장을 좀 더 분명하게 밝히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주제들에서는 심 교수나 나 모두가 아직 각론적인 생각을 충분히 구체화하지 못했고, 또 이미 구체화된 것들조차 그것들을 규정하는 근본 쟁점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들이 마치 쟁점인 것처럼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말이 말을 낳게 하는 길보다는 상호이해와 자기이해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좀더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좀더 생산적인 논점을 발견할 수 있는 토대를 쌓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자본에 의한 기술도입은 기계와 노동자를 경쟁시킴으로써 노동력 가치를 인하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필요노동시간의 감축을 통해 잉여노동시간을 늘림으로써 상대적 잉여가치를 증대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특별잉여가치의 취득을 위한 방편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개별 기업, 혹은 '해당 직종'26) 차원에서 노동력 절감, 심지어 해당 노동자의 사멸이 나타날 수는 있다. 하지만 자본이 노동에 의존하는 역사적 지배형태인 한에서 노동력 절감은 기술도입의 목적일수도 궁극적 효과일 수도 없다. 오히려 역사는 자본에 의한 계속적인 기술도입이 사회적 삶 전체를 (임금/비임금 형태의) 노동으로 전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나의 비판의 핵심은 자본에 의한 기술도입이 겉보기와는 달리 노동력 절감, 노동시간 단축을 가져오지 않으며 오히려 그 역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노동과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문화사회를 위한 조건을 조성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앞에서 우리는 문화가 노동과 중첩되어 더 이상 서로 구분 불가능한 상황으로 된 현대 자본주의의 상황에 대해 언급하였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문화를 노동을 대체하는 사회적 패러다임으로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기계와 노동과 문화가 서로 뒤섞이는 이 혼종적 사이보그적 상황의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의미와 위치를 밝히는 일일 것이다.27)


심 교수는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조 선생이 양극화 심화는 자본주의의 조종을 울리는 지표이므로 위험사회라고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환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취지를 논지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28)을 제기한다. 현실에서 출현하는 어떤 현상에 대한 반대(거부)인가 찬성(환영)인가만을 문제삼는 데 익숙해진 오늘날의 조건반사적 반응양식과 단세포적 정치학 안에서라면 이런 의문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양극화 현상에 대한 접근방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자리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양극화가 착취적 사회관계의 현상형태이고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양극화 문제는 그 자체로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오직 착취관계의 종식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완화의 방안을 찾는 것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현재 유행하고 있는 심화론은 양극화를 통해 충격을 받을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논리라는 것. 내가 말한 것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공공성은 공통성의 소외형식이다. 그것은 환상적 공통성이다. 공공성은 시민(민중)과 국가의 관계의 장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공성은 국가가 시민(민중)을 지배하는 형식이면서 동시에 민중의 투쟁의 성과라는 이중성을 갖는다. 심 교수의 공공성 옹호는 국가 옹호의 필연적 귀결이다. 오늘날 공공부문은 국유부문이든 준국유부문이든 국가 없이는 사고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현재적 공공부문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장악하고 강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공부문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확대되고 있는 비시민들(예컨대 불법 이주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전혀 접근할 수 없고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으며 민간부문보다도 더 높은 장벽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공재는 아직 공통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를 통해 움직인다. 공공부문에서 국가는 직접적으로 착취의 행위자로 나타난다. 필요한 것은 공공재를 공통재로 전환시킬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강화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다. 그것은 국가권력이 환상적 방식으로 대의하고 있는 공통성을 다중의 네트워크의 내재적 기능으로 전유함으로써, 즉 착취관계의 가능조건을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29) 이러한 노력이 신자유주의 하에서 공공부문, 공공재를 수호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공공재의 사유화가 공공재가 갖고 있는 공통성의 요소를 더욱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유화에 대한 저항을 통해 공공재를 수호하려는 노력 속에서도 그것을 공통재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이 멈춰질 수는 없다. 이것은 국가 없이 다중들의 직접적 연합을 통해 우리 삶을 관리하기 위한 노력의 중요한 일부이다.


한미 FTA는 이미 초국화되었거나 초국화되고 있는 한국과 미국의 지배적 자본분파의 활동자유를 확대하기 위한 협정이다. 그 정점에 초국적 금융자본의 이해관계가 놓여 있음은 물론이다. 이것은 지난 이십 여 년 사이에 빠르게 진행된 자유화를 좀 더 빠르게 그리고 급진적으로 진행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어떤 효과가 있을까? 다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여기서 한미 FTA가 가져올 각국, 각 산업부문의 경제적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것과 같은 부르주아적 관심사는 접어두도록 하자. 한미 FTA는 분명히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 냉혹한 현금관계, 수익원리를 확산시킬 것이다. 그것은 의료, 보건, 주택, 토지, 연구, 교육, 수도, 전기 등등의 부문에 아직 남아 있는 공공성의 마지막 찌꺼기까지 해체시킬 것이다. 자본활동의 자유의 확대는 착취관계를 극단적으로 확대시켜 이미 심화될 대로 심화된 양극화를 더욱 밀어붙일 것이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을 생존선 밖으로 밀어낼 것이다. 게다가 한미FTA는 자본의 단순한 경제적 자유를 넘어 자본의 정치적 군사적 자유를 보장하는 포괄협정이기 때문에, 한반도에 전쟁의 분위기는 더욱 깊어질 것이고 주민들은 더 깊은 위험 앞에 노출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한미 FTA가 가져올 나쁜 결과들을 계속해서 나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미 FTA를 거부하고 저지해야 한다.


한미FTA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한미FTA 저지투쟁 속의 많은 사람들은 잔존하는 국가적 보호장치들(관세, 수입규제, 스크린쿼터, 조세규정 등)의 유지를 주장한다. 이 보호장치들은 때로는 일국 틀 내에서 활동하는 국내적 자본의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이며 때로는 농민의 생존을 유지해줄 것이고 또 때로는 노동력의 판매조건을 더 악화되지 않도록 유지해 줄 것이다. 그러나 국가적 보호장치들은 사람들의 단결이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하며 국가의 테두리 속에서 단결하는 국민-민중을 생산할 것이다. 이것은 타국의 국민-민중과 경쟁하는 애국적 주체로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체제에서 국민-민중의 투쟁은 자본주의와 싸워 이길 수 없다. 국민적 투쟁은 반드시 자본주의를 강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오직 지구적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전 인류의 단결만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길을 가능케 한다. 필요한 것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제주의이며, 국제주의보다는 인류인주의(Homaranismo)이다. 이것은 전 인류적 수준에서 공통재, 공유지, 공통적인 것을 창출하고 확장하는 것에 의해 가능해진다. 국가적 보호장치를 유지하자는 주장에 머무는 한미FTA 저지 투쟁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강화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의 패배를 고착시키는 데 기여한다. 우리의 선택이 자유무역인가 보호무역인가 사이에 한정된다면 우리는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 보호주의보다는 자유주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직접적 결과는 가혹하겠지만 자유무역은 장기적으로 국민성, 민족성의 장벽을 깨뜨림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단결과 혁명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우리는 FTA를 선택해야 한다.30) 이것이 맑스가 1847년 자유무역에 관한 연설에서 보호무역보다 자유무역을 옹호한 논리이다.31)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자유무역을 통해 착취관계가 전 지구적으로 확대될 것을, 그리하여 일종의 자연성으로서의 국민성이 그 과정에서 철폐될 것을 기다려야 할 만큼 덜 발전된 자본주의 시대가 아니다. 국민, 민족은 전 자본주의에서 물려받은 자연적 범주에서 점차 자본주의 속에서 인위적으로 양성된 정치적 범주로 성격이 바뀌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시뮬레이션을 통해 나날이 재생산되고 있다. 우리는 국민성, 국경, 민족성 등을 넘어서기 위해 자유무역, 즉 FTA라는 시련을 거쳐야 할 필요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미FTA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전체적으로는 더 악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국가적 보호장치들의 수호, 방어가 이 악화를 막는다는 이유에서, 즉 다소 덜 나쁜 관계들을 보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우리가 국민, 민족, 국가의 시뮬레이션에 함몰된다면 우리 자신이 국민적 국가적 자본관계에 동화되어 혁명의 기회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고통의 양적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고통을 낳는 자본관계 자체를 해체하고 다른 사회관계를 창출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특이한 다중들의 공통적 연합을 확대해 가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이 표현될 수 있는 길을 열어가는 것이다. 한미FTA 저지는 목표일 수 없고 오직 다중의 공통성을 확대하고 그것을 새로운 사회의 맹아로 발전시켜 나가는 투쟁의 계기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초국적 자본의 자유주의도 일국적 민중의 보호주의도 아닌 다중의 자율주의를 주장한다.

■ 주석


1) 이에 대해서는 조정환, 『아우또노미아』, 갈무리, 2003 참조.

2)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삶시간.

3) 심광현, 「<자본을 넘어 생태적 문화사회로>에 대한 조정환 선생의 논평에 대한 반론」(『자율평론』(jayul.net) 18호, 2006 가을,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998&p_no=1).

4) 같은 글.

5) 나는 이 글에서 현실적인 것(the actual), 현실성(actuality)을 실재적인 것(the real), 실재성(reality)와 구분한다. actuality는 잠재성(virtuality)과 더불어 reality의 구성부분이다. 반면 가능한 것(the possible), 가능성(possibility)는 이해하기에 따라 reality의 구성부분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실재적 가능성은 실재성의 구성부분이지만 유토피아적 가능성은 그렇지 않다.

6) 조정환, 「생태적 문화사회론의 탈노동의 문화관 및 도식적 사회론의 문제점 비판」, 맑스코뮤날레 2006년 제1회 워크샵 자료집.

7) 여기서 나는 표현이라는 말을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사용한다. 이에 대해서는 질 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이진경•권순모 옮김, 인간사랑, 2003 참조..

8) 심 교수는 「반론」에서 계속해서 근대적 사유의 대쌍, 즉 과학과 유토피아 사이에서 사고한다. 이것은 추상적 가능성과 현실성의 틀에서 사고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고전적 방식이다. 실재적 가능성은 이 틀에서는 주어지지 않으며, '상상-이성-직관'의 스피노자적 운동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바, 이것은 '구체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구체에로'라는 맑스의 이중운동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9) 좀 더 엄밀하게 생각하면, 칸트의 도식론이나 도덕론은 적어도 물자체(잠재적인 것)에 의한 촉발 가능성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심 교수의 생각보다는 잠재성과 결합될 여지가 더 크다.

10) 심광현, 앞의 글.

11) 이에 대해서는 조정환, 「노동의 탈근대적 변형과 삶문화의 전망」, 인천문화재단 컬쳐브릿지, 2006 발표문.

12) 이것은 임금노동에 대한 거부를 '노동 일반'에 대한 거부와 동일시하는 문화사회론의 방식이다.

13) 심광현, 앞의 글.

14) 같은 글.

15) 비물질적 노동은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이다. 이에 대해서는 자율평론 기획, 『비물질노동과 다중』, 갈무리, 2005 참조.

16) 이 점은 이미 「비판」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심 교수에 의해 이해된 것 같지는 않다.

17) 이에 대해서는 조정환, 『제국기계 비판』, 갈무리, 2005 참조.

18)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1』, 박종철 출판사, 1990에 실린 「공산주의자 선언」1872년 독일어판 서문.

19) 심광현, 앞의 글.

20) 심광현, 앞의 글.

21) V. I. 레닌, 『국가와 혁명』, 문성원•안규남 옮김, 돌베개, 1993 참조.

22) 이것은 "신자유주의에서 국가가 전면적으로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공공성 유지기능이 약화되고 자본 지원적 기능(즉 RSA 기능)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자율평론 18호)라고 말하는 곳에서 심 교수 자신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23) 실제로 이것은 다중이 아니라 민중이라고 해야 한다. 다중은 민중과는 달리 국가권력에서 배제된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으로 조직화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4) 칼 맑스, 『자본론』1권, 비봉출판사, 47쪽.

25) 이에 대해서는 질 들뢰즈, 앞의 책, 2003 참조.

26) 심광현, 앞의 글.

27) 이에 대해서는 조정환, 『지구제국』, 갈무리, 2002 제2부 참조.

28) 심광현, 앞의 글.

29)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는 단순한 이론적 작업이 아니며 개인의 작업일 수도 없다. 구체적 방법의 문제는 보다 실천적이고 집단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30) 미리 말해 둘 것은, 이 문장이 다음 단락에서 분리되어 인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1) 칼 맑스, 「자유무역 문제에 관한 연설」(『저작선집•1』, 박종철출판사, 344~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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