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평론 19호 / 발행일:2007-01-05

[논쟁: 문화사회론과 자율주의] 문화에서 다시 삶-노동으로

-조정환 



글머리에


1990년대는 노동에서의 이탈, 탈노동이 사회적 삶과 앎의 전 부면에서 나타났던 역사적 시기였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은 노동 담론에 대한 비판을 공통적 근거로 삼는다. 거대서사에 대한 거부, 공통성에 대한 반박, 생산주의 비판, 혹은 생산에서 소비로의 관심이동, 탈중심주의 등의 특징들은 일관되게 노동 담론에 대한 비판과 연결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러한 방향정립은 역설적으로 근대성이 노동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었음을 사후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한국의 문화운동에서 나타난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라는 슬로건은 넓은 의미에서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의 일부이다. 그것은 노동에 대한 거부와 그것의 문화로의 대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역설함으로써 근대성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작업에 동참해 왔다.


노동에 대한 비판과 탈노동의 경향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우리는 이것이 1968년을 전후한 혁명적 운동들의 욕망이었음을 알고 있다. 이탈리아 오뻬라이스모(operaismo)1)운동의 노동거부는 대표적 사례이다. 그것은 전 인구의 노동자화를 추구한 서구 복지국가에 대한 대항운동으로 나타났다. 1968혁명에서 이와 동일한 성격의 운동들이 전 지구적 수준에서 표현되었다. 여기에 이어진 노동조합의 쇠퇴는 노동에서의 이탈로 특징지어지는 이 운동의 효과였다. 전 인구의 노동자화 속에서 유효한 저항형태들이었던 노동조합, 노동자당 등은 더 이상 전망을 제시할 수 없게 되며 정치적으로는 '좋았던 옛 시절'을 조금이라도 더 지키려는 보수적 성격을 띠어 가게 된다. 이렇게 노동에 대한 거부가 아래로부터의 광범위한 욕구로 대두되었고 그것이 전 지구적 수준에서의 집단적 운동으로 표출되었던 만큼 탈노동의 경향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이 경향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든 또 하나의 흐름이 있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탈노동의 고착화, 노동거부 운동의 자본주의적 역이용이 그것이다. 세계 어디서나 확인되는 신자유주의적 정리해고, 대량실업, 불안정노동화는 탈노동의 운동에 대한 반-혁명으로서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지배의 논리로 역전시키는 방식이다. 생존에서 삶으로의 상승을 달성하려던 운동은 자본의 역공에 직면하여 생존 그 자체마저도 보장받을 수 없는 위기 속으로 내몰린다. 산업으로부터 자본의 대량이탈과 금융자본화가 기존의 공공성, 복지 체제의 와해와 결합되면서 사람들은 빚더미에 짓눌리고 거리로 내몰리며 하루하루 공포와 불안의 시간에 대면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운동의 일부는 다시 복지 체제의 수호, 공공성의 복원, 노동의 재정립을 주장하지만 아래로부터 욕망될 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강제되는 탈노동의 경향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상황적 진실은, ‘일하지 말자’ '게으르자' 식으로 협소하게 정의된 노동거부 주장이나 탈노동의 운동이 현재의 상황 속에서 더 이상 운동적 의미를 갖지 못하며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유효성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그것은 자본의 요구로 쉽게 흡수되며 신자유주의적 반노동의 공격을 정당화해주는 뜻하지 않은 효과를 가져온다.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라는 슬로건이 직면하는 위험도 바로 여기에서 주어진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적 반노동의 정치가 현실에서는 노동사회로부터의 이탈을 추구하면서 그 대안을 문화사회화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산업재구조화 노력과 1990년대에 적극적으로 추진된 정보사회화는 그 근본적 지향에서 보면 문화사회화라고 이름 부를 수 있다. 사회 전체의 컴퓨터화와 정보적 소통망의 발전, 그리고 오래 지속된 이른바 ‘한류’는 아마도 자본의 이러한 문화사회적 재정향의 분명한 결실들 중의 일부일 것이다. 이 때문에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라는 슬로건은 ‘문화사회’ 대신 ‘생태적 문화사회’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부분적 개념보완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근본적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이 나의 글 「생태적 문화사회론의 탈노동의 문화관 및 도식적 사회론의 문제점 비판」(이하 「비판」)이 근거하고 있는 이론적이자 동시에 실천적인 문제의식이다. 여기에서 나는 문화사회론의 탈노동의 문화관이 노동의 세계창조적 가능성을 이론화할 수 없게 되면서 유토피아적 대안으로 함몰했고 그것이 도식주의적 사고를 유발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시간2)의 망각이라는 근대 철학의 일반적 경향을 구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심광현 교수는 「<자본을 넘어 생태적 문화사회로>에 대한 조정환 선생의 논평에 대한 반론」3)에서 현실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꿈꾸기로서의 유토피아의 적극성을 다시 한 번 옹호했다. 그것은 문화사회론이 노동자평의회, 노동자연합,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에 기초한 생산양식의 변형을 사회구성체론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는 정치학적 선언으로 이어지며 공장노동자가 사회적 노동자로, 대중은 다중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사실의 승인에 의해 보충된다. 과연 이러한 정치철학, 정치사회학이 문화사회론의 골간과 결합 가능할까? 혹은 문화사회론이 일관성 있게 이러한 정치학으로 전개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평의회, 노동자연합 등의 생각이 우리 시대의 주체형성을 위한 실재적 가능성을 충분하게 표현할 수 있는가? 그것이 추상적 가능성에 기초하여 대안을 도식적으로 그리고 절충적으로 상상하는 수준을 넘어설 수 있는가? 심 교수의 반론의 뒷부분에 등장하는 국가와 공공성, 기술, 양극화, FTA에 대한 논의는 이 문제와 연관되어 있고 또 그로부터 도출되는 세분되고 실제적인 논점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의 재비판에서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와 문화사회론 사이의 쟁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좀 더 확실하게 밝히기 위해 실재적 가능성과 유토피아적 가능성의 차이라는 근본적 문제에서 출발하기로 하겠다.


두 가지의 가능성: 유토피아적 가능성과 실재적 가능성


심 교수에 따르면 문화사회론은 다음과 같은 기획이다.


"문화사회론은 자본주의적인 지배적 삶의 논리와 방식과는 다르게 작동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기에 분명히 유토피아적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 유토피아란 문자 그대로 아직까지 현실에 없는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그런데 꿈꾸기란 한편으로는 현실을 외면하고 공상에 매달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을 비판하고 거부한다고 하는 적극적 성격을 지닐 수 있다. 문화사회론은 전자적 의미의 유토피아는 거부하지만 후자적 의미의 유토피아를 적극적으로 추구한다."4)


문화사회론이 '유토피아적' 대안이라고 비판하면서 내가 염두에 둔 것도 '현실을 외면하고 공상에 매달린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역설적이지만 나는 문화사회론의 유토피아주의가 기존의 현실을 외면하기는커녕 지나치게 존중하고 그것에 순응하는 경향을 보인다고까지 말했다.5)


"‘새로운 사회구성체론을 위한 사회적 매트릭스’라는 이름을 단 심 교수의 도식은 부르주아 사회의 사회분할 형식들(경제, 정치, 문화; 사적, 협동적, 공적) 모두를 인위적으로, 그리고 실증주의적으로 긍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의 효과는 무엇인가? 삶의 역사적으로 특수한 형식들이 이 매트릭스 속에서는 보편성의 형식으로 승격된다."6)


유토피아주의라는 비판과 실증주의라는 비판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 그렇다. 모순된다. 그러나 이 모순은 문화사회론의 이론 내적 모순, 즉 그 내부에 공존하면서 화해하고 있는 두 경향이다. 이것들이 어떻게 공존하는가? 우리는 문화사회론이 말하는 유토피아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즉 '현실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적극적 꿈꾸기'(심광현)로서, 혹은 '현실의 외면이 아니라 차라리 현실의 거부요, 오늘의 삶의 전체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더 이상 용남하고 싶지 않은 태도에서 나오는,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미래를 위한 몸짓'(강내희)으로서. 문제는 이러한 유토피아적 기획이 현실의 모순을 극복해 나가는 실재적 운동으로 유효하게 기능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당연히 나의 생각은 그것이 현실 극복의 실재적 운동으로 나아가기에는 너무나 유토피아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실재하는 가능성, 실재적 경향을 발견할 수 없고 새로운 삶을 꿈꾸려는 몸짓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낡은 삶의 현실적 형태들(국가, 시장, 화폐 등등)에 붙들린다는 것이다. 경향을 발견한다 함은 '경향'이라는 말을 쓰느냐 쓰지 않느냐하는 것에서는 독립적인 문제이다. 경향은 실재(reality)로서의 잠재력(virtuality)의 현실화(actualization)로서, 다시 말해 잠재력의 강도적 표현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7) 이런 의미에서 경향은 현실화로 나아가는 가능성이면서 그 자체 실재하는 가능성이다. 그것은 '전개된 현실을 규제하는 법칙'과는 동일시될 수 없으며 따라서 전개된 현실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서 도출될 수도 없다. 반대로 그것은 실재의 분화/미분화 운동에서 벗어난 유토피아적 꿈꾸기에서 도출될 수도 없다. 물론 과학과 유토피아를 '절합'해서 '과학적-유토피아적 대안'을 생각해 본다고 해서 그 실재적 경향이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8)


가능성은 많은 경우에 현실성의 투사(投射)이다. 해답을 미리 생각하고 그 답이 나올 수 있는 가능한 문제를 상상할 때의 가능성이 그것이다. 이때의 가능성은 어떠한 표현적 힘도 갖지 못하며 이미 상정된 해답에 예속된다. 그것은 실재적이지 않으며 재현된 것, 상상된 것이다. 그것은 자유롭지 않다. 반면 실재적 가능성은 현실성의 투사가 아니라 잠재력의 표현이다. 그것은 해답에 예속되지 않는 물음이자 문제제기이다. 그것이 어떤 현실적 해(解)로 귀착될지는 알 수 없으며 열려 있다. 즉 실재적 가능성은 자유롭다. 그것은 '대안'이라기보다 우선 '기획'이며 대안에 구속된 기획이 아니라 대안을 산출하는 기획이다. 어떤 미래도 불확정적이며,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지금-여기에서의 삶과 싸움을 통해서만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유토피아(Utopia)가 아니라 디스토피아(Dystopia)이다.


그렇다면 문화사회론의 가능성 개념은 어떠한가? 그것의 메커니즘과 위치는 다음과 같다. (1)현실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한다, (2)현실에 없는 다른 세계를 꿈꾼다(즉 다른 해답을 상상한다), (3)이 양자를 결합시킨다. 가능성 범주의 위상은 (2)에 있다. 그것은 (1)에서 도출되는 현실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대체할 노동자평의회적, 노동자 연합적, 노동자-다중 연합적 생산양식을 창출하는 것이다. 문화사회론은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론의 이행을 전망하는데, 이것은 노동의 일반화, 보편화를 해방의 조건으로 추구하던 시대의 조직적 전망인 노동자 평의회, 노동자 연합과는 논리적으로 결합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 교수는 (2)를 달성할 구체적 경로, 즉 '어떻게'를 고안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사회구성체론을 위한 사회적 매트릭스’이다. 그 매트릭스를 구성하는 9개의 항이 잠재적인 것의 표현으로서 설정되지 않고 현실에 존재하는 범주들의 새로운 시스템적 조합으로 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비판」에서 말한 바 있다.


심 교수의 가능성 개념이 칸트의 도덕론 및 도식론과 아무런 마찰 없이 결합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잠재적인 것에 대한 탐구와 연결되지 않는다. 심 교수의 도덕=실천이나 도식은 잠재적인 것에 대한 어떤 고려도 포함하지 않고 있다.9) 그것은 실제로는 현실적인 것들에서 직접, 그리고 유토피아적 방식으로 도출되는 현실적인 것의 투사로서의 가능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조 선생이 맑스를 비판적으로 조탁하여 찾아내려는 대안은 문화사회론과 정작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다음과 같은 지점이 아닐까 싶다. 조 선생이 어두운 노동에서 세계창조적 노동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어떻게’를 제시하지 않는 것에 반해 우리는 생산-유통은 물론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는 정보기술혁명으로 심화되는 자동기술화를 골간으로 하는 최근의 생산의 사회화 경향 속에서 그 이행의 그 가능성을 찾아내려 한다는 것이다."10)


생산의 사회화의 핵심을 노동의 사회화, 사회적 노동에서 읽지 않고 자동기술화에서 읽는 것은 부주의의 소산이 아니라 문화사회론의 일관된 이론적 경향성이다. 정보기술혁명, 자동기술화는 바로 현대 자본주의의 현실적 경향이며 문화사회론의 대안적 가능성은 바로 그것으로부터 도출되고 있다. 다음으로 이 인용 속에는 하나의 이론이, 실재하는 운동들의 실재적 가능성의 표현 과정과는 별도로(사실은 그것을 무시하면서) '어떻게'를 안출하고 제안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모자람이라도 된다는 듯한 서술이 그것이다. 맑스가 '어떻게'에 대해 극히 조심스러워하고 또 미래에 대한 구상을 삼가한 것은 결코 그의 무지나 유토피아성의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적 경향, 실재적 가능성에 충실하려는 그의 유물론적 태도의 표현이다. 가능성을 추상적으로(또는 현실에서 추상될 수 있는 것들의 투사로서) 이해하고 유토피아적 대안으로 사고하면 할수록 미래에 대한 제안, 새로운 보편적 체계의 고안 등에서 주저함이 없어지면서 전위주의적이고 대리주의적=재현주의적인 욕망에 쉽게 굴복하게 된다.


그렇다면 문화사회론이 망각하고 있다고 내가 말하는 것, 혹은 실재적 가능성이 근거하고 있다고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인 저 잠재적인 것, 잠재력, 잠재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사고되어 왔다. 예컨대 스피노자의 실체, 라이프니츠의 단자, 칸트가 자신의 비판철학에서 배제했던 것인 물자체, 니체의 힘에의 의지, 베르그송의 시간, 기억, 생의 약동, 네그리의 역능, 들뢰즈의 다양체 등을 나는 그것을 사유하려는 노력들로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철학적 개념에서 출발하여 지금여기에서의 우리의 논점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문제를 외면적으로 다루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노동과 문화의 분리, 노동에서 문화로의 이행이라는 문화사회론의 주장에서 출발하여 잠재성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가 속했던 지난 현실에서 노동과 문화는 구분되었다. 알튀세의 층위적 구분(실천의 경제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형태)이나 아렌트의 범주적 구분(노동-작업-행위)이 그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졌던 것은 우리가 속해 온 현실에서의 추상에 입각한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 의 현실을 재현하는 힘을 갖는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문화사회론이 노동으로부터 문화를 구분할 때 그 나름의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노동에서 문화로의 이행이라는 주장은 어떠한가? 그것은 현실의 노동에서 현실의 문화로의 층위이동, 즉 강조점의 이동인가? 문화사회론에는 분명히 이러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자동기술화로 인한 노동시간의 단축경향을 문화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단초로 파악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행 개념은 이미 자본주의 내부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단순한 이론적 긍정과 재현 이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 경제적인 것은 문화적인 것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중첩되었고 심지어는 문화가 생산의 중심으로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사회론이 계급정치를 포기한 개량주의적 관점으로 비판되곤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요소 때문이다.11) 문화사회론이 '문화' 개념을 단순한 현실 범주 즉 설명 범주를 넘어 유토피아적 이념 범주로 전화시키려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판을 넘어서려는 노력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결과 문화사회론에서 '문화'는 주체성, 윤리, 이행, 코뮤니즘 등의 의미까지 함축하는 과잉 해석된 개념으로 비대해지게 된다. 하지만 그 노력은 결국 현실 범주들의 재합성으로 귀착되고 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그리고 「비판」에서 이미 말했다. 다시 말해 문화사회론은 현실 범주들을 질적으로 바꿀 어떤 적극적 힘도 구축하지 못한다. 오히려 현실의 제 역사적 범주들(국가, 시장, 화폐 그리고 노동, 정치, 문화의 범역적 구별들 등)은 문화사회론에서 방어되고 보존되기에 이른다.


노동자문화론은 문화사회론의 이러한 현실주의적 문화주의에 대항하여 다시 노동 범주에 강조점을 두는 것으로 나아가는데, 이 사이에서의 쟁점은 현실 범주로서의 노동과 역시 현실 범주로서의 문화 사이에서의 경합 이상이 아니다. 그런데 노동과 문화의 구분은 현실성의 수준에서의 구분이며 그것도 지난 날의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 양자가 구분되지 않는 수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삶의 평면이다. 그 삶은 특정한 삶, 정관사적 삶이 아니라 특이한 삶, 즉 부정관사적 삶이다. 자본주의적 노동과 문화는 모두 이 부정관사적 삶이 분화되고 외화된 현실태들이며 자본주의에서 그것은 소외로 경험된다. 즉 자본주의적 노동과 자본주의적 문화는 소외된 노동이며 소외된 문화이다. 전자가 맑스에 의해 분석된 임금노동이며 후자는 기 드보르에 의해 분석된 스펙터클 문화이다. 오뻬라이스모가 노동거부를 통해 소외된 노동형식을 거부하고 삶을 만회하고자 했음에 반해 문화사회론은 임금노동에 대한 거부를 통해 역시 소외된 삶형식일 뿐인 문화로 나아가고자 한다.12) 물론 문화사회론은 문화를 과잉 해석함으로써 소외된 자본주의적 문화형식을 넘어서고자 하지만 그것이 잠재적 삶의 자기표현이 아니라 유토피아적 추상적 가능성의 안출인 한에서 그 시도는 그 의지에 부응하는 동력을 구하는 것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요컨대 평의회, 노동자연합, 노동자-다중연합 등이 역사에서 주어지는 그 개념들 자체의 명목적 권위를 제하면 어떤 실재성도 갖지 않는 추상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현실화될 가능조건은 문화사회론 내부에서 탐색되고 있지 않으며 가능성에 관한 유토피아적 접근이 긍정되는 한에서 그것은 원칙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실재의 운동 속에서 코뮤니즘의 가능조건을 탐구하려 했던 맑스의 고유성은 상대화되어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맑스와의 차이는 과거에 오해했던 것처럼 절대적이기보다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13)고 주장되게 되며 맑스의 코뮤니즘은 칸트적 '지상명령'과 동일시된다.14) 이것이 실재에서 유토피아로의 이론적 후퇴를 마치 쇄신인 것처럼 정당화하는 문화사회론과 심 교수의 방법이다.


임금노동은 특이한 삶에 대한 자본주의적 절단에서 성립했다. 그것은 삶의 조건인 생산수단을 삶으로부터 박탈한 후 공장에서 재결합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노동과정은 시계에 의해 측정되었고 노동시간은 가치의 척도로 자리 잡았다. 이 메커니즘을 통해 점점 더 많은 삶의 부분들이 임금노동에 포섭되었지만 모든 삶이 임금노동으로 포섭되었던 것은 아니다. 임금노동이 확대되는 만큼 비임금노동도 확대되어 임금노동과 긴밀한 연결관계 속에 배치되었다. 그 결과 임금노동은 노동의 특수한 형식으로 되었지만 삶의 거의 모든 부면은 임금을 받건 받지 않건 상관없이 자본주의적 강제노동의 틀 속에 포섭되었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총체적 포섭의 상황이다.


총체적 포섭에서 노동과 문화의 구별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화야말로 노동의 핵심적 형식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노동은 문화적 노동이다.15) 그렇기 때문에 노동에서 문화로! 라는 구호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삶과 노동의 중첩의 상황이다. 자본주의는 이제 삶으로부터 절단한 특수한 활동들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 총체적 삶을 착취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의) 노동의 내적 구획 및 노동시간과 비노동의 자유시간 사이의 구획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문화사회론은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을 통한 자유시간의 확대를 전략으로 제안한다. 물론 필요노동시간과 자유시간의 대비는 고전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잘못이다. 필요노동시간은 잉여노동시간과 대비되지 자유시간과 대비되는 것이 아니다.16) 이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 첫째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의 구획, 그리고 노동시간과 자유시간의 구획은 자본의 전략이다. 이 때문에 이 구획에 근거한 노동의 전략은, 그것이 자유시간의 확대를 위해 필요노동시간을 단축시키려는 것일지라도 자본에게 쉽게 흡수된다. 특히, 그리고 둘째로 현대 자본주의에서 노동시간과 자유시간(비노동시간)의 구획은 실제적이지 않다. 자본이 자유시간을 착취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이미 구축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유시간 속에서 착취되고 수탈당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비노동시간은 없다. 그러므로 전략은 자본의 시간구획 속에서 찾아져서는 안 되고 노동과 삶의 중첩이라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삶을 만회하고 확장시킬 것인가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것이 삶정치론, 삶문화론의 문제의식이다.17)


그런데 삶을 위한 전략은 현대적 노동배치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얽혀 있기 때문에 노동에 대한 탐구를 피해 갈 수 없다. 물질노동에 대한 탐구 외에, 그것의 헤게모니를 대체해 가고 있는 지적, 정보적, 소통적, 정동적 노동의 부상에 대한 탐구의 필요성은 여기에서 제기된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문화연구는 노동연구와 분리될 수 없고 또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 노동과 문화의 구획은 이처럼 현실성의 수준에서조차 더 이상 분리될 수 없게 되고 있기 때문에 노동에서 문화로! 라는 슬로건은 현대 자본주의의 현실에서조차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이 슬로건은 노동과 문화의 융합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감춘다. 이런 의미에서, 즉 노동과 문화가 구분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문화에서 노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부정관사적이고 특이한 삶이 문화적이고 비물질적인 노동으로 나타나는 현대 자본주의의 역사적 위치와 의미를 파악하고 그로부터 변혁의 문제를 사유해야 한다.


노동은 국가를 필요로 하는가?


이상에서 나는 문화사회론의 기본전제와 근본 문제를 비교적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이제 이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좀 더 세부적인 쟁점들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이 쟁점들 중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국가에 대한 관점과 태도의 문제이다. 심 교수는 국가를 활용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이를 뒷받침 하기위해 그는 맑스의 1865년 논문인 「가치, 가격과 이윤」의 일절을 빌려 온다. "노동자 계급은 정부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들은 그 권력을 자본에 맞서 활용함으로써 노동자들 자신의 기관으로 전환시킨다"(강조: 조정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할 맑스의 인용이라면 1848년의 「공산주의자 선언」에서도 좀 더 명시적인 구절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자본론』 1권에서 빌려 온 인용, 즉 10시간 노동일의 법률통과를 주장하는 맑스의 말은 국가권력 장악과 이용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용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1870년 파리 코뮨의 체험 이후에 맑스가 기존의 국가권력을 노동계급이 장악하여 그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역사적으로 폐기처분했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18)


심 교수의 국가론은 맑스로부터 주어지기보다 루카치, 헬러를 잇는 필요노동 학파의 리보위츠로부터 주어진다. 심 교수에게 어떤 놀라운 생각들이 전승되고 있는가? 심 교수는 '자본주의 하에서 국가를 필요로 하는 것은 자본보다는 노동자들이다'19)라고 단언한다. 자본은 경제적 관계들에 의존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지만 노동은 자신의 보호와 단결을 위해 반드시 국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국가를 노동자들의 기관으로 만들려는 투쟁 속에서 노동은 단일한 계급으로 결집될 수 있기 때문에 자본과의 경쟁 속에서 국가를 장악하려는 투쟁은 자본을 넘어서기 위한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이며 이런 투쟁 없이는 자본을 넘어설 수 없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이렇게 발전시킨다.


"맑스가 강조했듯이 부르주아 사회의 집중 형태인 자본주의 국가를 그대로 활용해서는 자본을 넘어설 수 없고, 오직 기존의 국가장치를 혁명적 실천의 영속적 과정을 보장하는 정치적 형식으로 전환시키는 투쟁을 통해서만 자본을 넘어서는 일이 가능하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해서 공공부문을 방어하려는 투쟁, 나아가 공공부문의 민주적 운영을 통해 성과를 사회화하려는 투쟁은 자본의 공세를 넘어서기 위해 필수적인 투쟁이다. 이 점을 놓치고 신자유주의에 의해 국가가 쇠퇴하는 것을 환영하면서 경쟁을 통해 자신의 힘을 강화하는 자본의 무장한 공세에 다중의 네트워크로 직접 맞서자는 주장은 중무장한 탱크를 맨손으로 맞서 싸워 이기자는 식의 무모한 주장에 다름 아니다."20)


레닌은 코뮨에서부터 맑스가 얻은 교훈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기존의 부르주아적 국가기관의 파괴를 필요로 한다'는 것으로 독해했다.21) 코뮨은 국가 아닌 국가, 즉 반(半)국가여야 했다. 심 교수는 이것을 '기존의 국가장치를 혁명적 실천의 영속적 과정을 보장하는 정치적 형식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독해한다. 공공부문의 방어, 그것의 민주적 운영, 그 성과의 사회화를 위해서는 국가권력의 장악이 필요하다. 이것이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과제이고 그것의 강령 그 자체라고 여기서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기존 국가장치의 파괴가 아니라 전환을 통해서 이런 과제들을 실천하는 국가를 '코뮨 유형의 국가'라고 심 교수가 말할 때, 그것은 코뮨이 세기를 두 번 넘어 희극적으로 반복되는 현재적 사례 이상이 아니다.


국가가 단결의 매개체라는 생각은 허구일 뿐만 아니라 아주 오래 지속되어온 속임수이다. 국가는 단결시키지만 항상 분열과 배제와 억압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 국가의 단결은 권력적 단결이며 그것은 지배받는 사람들을 창출하기 위한 수단이다. 모든 국가 형식은 권력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창출하는 결사체로서 존립한다. 국가는 분열시키기 위해서 단결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분열의 무기이지 단결의 무기가 아니다.


또 자본/주의가 국가 없이 존립 가능하다는 생각은 역사적 경험과 양립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국가에 의존해 온 사회체제이다. 또 20세기의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 국가 혹은 제3세계의 권위주의 국가는 시장지원적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자본으로서 소유하고 생산했다. 요컨대 역사적 국가자본주의들은 '국가=자본'인 한 시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는 국가와 대립하거나 그것 없이 존립 가능한 정치형태인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신자유주의는 국가가 시장관계 창출의 행위자로 적극적으로 기능하는 사회형태이다.22) 국가를 장악해서 노동의 단결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국가 그 자체가 자본관계의 한 양태임을 망각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생각이다. 노동자들 혹은 사회주의자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국가를 장악하여 사용하려 하는 순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본의 관리자, 즉 자본가계급으로 전화된다.


그런데 정작 국가를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의 깊은 무의식은 다음 대목, 즉 '자본의 무장한 공세에 다중의 네트워크로 직접 맞서자는 주장은 중무장한 탱크를 맨손으로 맞서 싸워 이기자는 식의 무모한 주장'이라는 대목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생각은 이 글의 맨 끝에서 '경찰적 국가에 의해 강력히 지원받고 있는 자본에 대해 다중이 어떻게 대결할 수 있다는 것인지'라는 회의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이것은, '다중은 맨손이기 때문에 국가장악 없이는 무장한 자본과 맞서 이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사는 다중이 맨손으로, 중무장한 탱크와 맞섰던 많은 사례들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에는 팽팽한 대치 혹은 일시적 승리로 귀착되었던 사례들도 적지 않다. 대체 맨손으로 일어서는 다중이란 무엇인가? 거꾸로, 다중의 네트워크는 과연 맨손인가? 맨손으로 보이는 다중의 네트워크는 무장한 자본, 경찰국가 등과 맞서 이길 수 없는가?


심 교수의 생각은 얼핏 보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식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상식의 수용과 반복 속에 문화사회론의 정치학의 최대의 취약점이 놓여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경찰국가, 무장력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이며, 다음으로는 바로 그것의 반사물인, 국가권력과 그것의 무장력에 대한 선망(羨望)이다. 국가권력으로 조직된 다중23)만이 무장한 자본과 맞설 수 있다는 생각은 국가 형태 그 자체의 집중적, 위계적, 배제적, 폭력적 성격으로 인하여 사회 내에 균열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로의 균열은 자본관계 탄생의 모태이다. 요컨대 국가권력에 대한 선망은, 의식상에서의 그 의지가 어떠하든, 자본관계에 대한 선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이 지난 세기 국가권력 장악을 이행의 필수적 계기로 삼았던 사회주의 및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체험이 우리에게 뼈저리게 가르쳐주고 있는 교훈이다.


기존 국가권력에 대한 공포와 그 의식상의 반사물인 '민중의 국가권력'에 대한 선망은 좀 더 근원적인 문제에서 기원한다. 그 근원적인 문제란 바로 앞서 우리가 분석한 바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다. 민중권력에 대한 선망은 기존 국가권력으로부터 추상되는 가능성, 즉 현실로부터의 추상을 통해 주어져 있는 답을 이끌어 내기 위한 문제설정이다. 그것은 재현적 문제설정이며 실재적이지 않은 문제설정이다. 그것은 국가의 실존, 그것의 권력, 그것의 폭력을 재현하며 민중 속에 내면화한다. 이리하여 노동에서 국가로 정치적 입장의 전환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맑스의 생각은 그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는, 자본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산 노동이 취하는 형태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현실적 자본은 잠재적 노동이 현실화된 것이다. 여기에서 현실적 자본이 실재적이라는 것은 보통의 눈에도 쉽게 인지되지만 그것이 잠재적인 것인 산 노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잠재적 산 노동 역시 실재적이라는 사실은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본관계 속에서 현상하는 모든 노동생산물은 노동이라는 사회적 실재의 체화에 다름 아니다.


"노동생산물에 남아 있는 것은 ... 형태가 없는 동일한 실체, 동질적인 인간 노동의 응고물일 뿐이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그들의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지출되었다는 것, 인간 노동이 그들 속에 체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에 공통적인 이러한 사회적 실체가 결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모든 물건들은 가치, 상품가치인 것이다."24)


사회적 노동의 실재성을 승인하는가 않는가, 나아가 자본관계에 비해 사회적 노동이 그 근원적인 실체임을 승인하는가 않는가는 본질적인 문제이다.


국가형태 역시 사회적 노동에 선행하거나 그것보다 우월한 힘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노동에 의존하며 그것에서 파생되는 역사적 형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가 취하는 그 어떠한 현상적 힘들(무장력, 조직력, 강제력 등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노동의 힘은, 다시 말해 네트워크화된 다중의 힘은 그보다 더 근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본의 역사적 변태들이나 역사적 국가형태는 사회적 노동의 힘에 대한 반응적 관리양식이기 때문에 다중의 네트워크는 이미, 또 언제나 국가형태와 맞서면서 그것을 변형시키고 그것의 현존양식을 타개해온 잠재적이지만(그래서 상식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명백하게 실재적인 힘이다. 그러므로 심 교수가 다중의 네트워크를 '맨손⇒아무 것도 없음⇒무력함⇒부재함'이라고 보게 되는 것은, 그리하여 다중이 국가로 조직되고서야(즉 다중이 민중으로 전화되고서야) 그 무력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우선 역능의 다양한 역사적 형태들(활력, 권력, 폭력 등)에서 권력과 폭력을 특권화하는 태도이다. 둘째로 그것은 앞서 분석한 바처럼, 역사적 가능성을 잠재적인 것의 표현으로서의 실재적 가능성에서 찾지 않고, 현실적인 것에서 추상한 비실재적 가능성에서 찾으려 하는 것의 이론적 결과로서의 다중의 활력에 대한 경시이다. 실재적 가능성의 표현주의적 운동25)에서 분리된 추상적이고 비실재적인 가능성은 흔히 도식주의적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심 교수에게서 나타나는 도식주의는 그러한 경향의 한 사례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종합되어, 자본관계를 넘어서려는 주관적 의지에도 불구하고, 권력으로 조직된 민중형태에 입각하여 자본관계를 뒷받침하고 재생산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기술, 양극화, 공공성, 그리고 한미FTA


이상이 이번 재비판에서 내가 역점을 두어 다루고자한 두 가지 핵심 쟁점이다. 이제 좀 더 미시적인 문제들이 남았다. 기술, 양극화, 공공성, FTA 등이 그것이다. 이 문제들에서는 논리적 반론의 방법를 취하기보다 나의 입장을 좀 더 분명하게 밝히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주제들에서는 심 교수나 나 모두가 아직 각론적인 생각을 충분히 구체화하지 못했고, 또 이미 구체화된 것들조차 그것들을 규정하는 근본 쟁점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들이 마치 쟁점인 것처럼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말이 말을 낳게 하는 길보다는 상호이해와 자기이해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좀더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좀더 생산적인 논점을 발견할 수 있는 토대를 쌓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자본에 의한 기술도입은 기계와 노동자를 경쟁시킴으로써 노동력 가치를 인하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필요노동시간의 감축을 통해 잉여노동시간을 늘림으로써 상대적 잉여가치를 증대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특별잉여가치의 취득을 위한 방편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개별 기업, 혹은 '해당 직종'26) 차원에서 노동력 절감, 심지어 해당 노동자의 사멸이 나타날 수는 있다. 하지만 자본이 노동에 의존하는 역사적 지배형태인 한에서 노동력 절감은 기술도입의 목적일수도 궁극적 효과일 수도 없다. 오히려 역사는 자본에 의한 계속적인 기술도입이 사회적 삶 전체를 (임금/비임금 형태의) 노동으로 전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나의 비판의 핵심은 자본에 의한 기술도입이 겉보기와는 달리 노동력 절감, 노동시간 단축을 가져오지 않으며 오히려 그 역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노동과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문화사회를 위한 조건을 조성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앞에서 우리는 문화가 노동과 중첩되어 더 이상 서로 구분 불가능한 상황으로 된 현대 자본주의의 상황에 대해 언급하였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문화를 노동을 대체하는 사회적 패러다임으로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기계와 노동과 문화가 서로 뒤섞이는 이 혼종적 사이보그적 상황의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의미와 위치를 밝히는 일일 것이다.27)


심 교수는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조 선생이 양극화 심화는 자본주의의 조종을 울리는 지표이므로 위험사회라고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환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취지를 논지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28)을 제기한다. 현실에서 출현하는 어떤 현상에 대한 반대(거부)인가 찬성(환영)인가만을 문제삼는 데 익숙해진 오늘날의 조건반사적 반응양식과 단세포적 정치학 안에서라면 이런 의문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양극화 현상에 대한 접근방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자리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양극화가 착취적 사회관계의 현상형태이고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양극화 문제는 그 자체로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오직 착취관계의 종식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완화의 방안을 찾는 것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현재 유행하고 있는 심화론은 양극화를 통해 충격을 받을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논리라는 것. 내가 말한 것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공공성은 공통성의 소외형식이다. 그것은 환상적 공통성이다. 공공성은 시민(민중)과 국가의 관계의 장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공성은 국가가 시민(민중)을 지배하는 형식이면서 동시에 민중의 투쟁의 성과라는 이중성을 갖는다. 심 교수의 공공성 옹호는 국가 옹호의 필연적 귀결이다. 오늘날 공공부문은 국유부문이든 준국유부문이든 국가 없이는 사고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현재적 공공부문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장악하고 강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공부문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확대되고 있는 비시민들(예컨대 불법 이주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전혀 접근할 수 없고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으며 민간부문보다도 더 높은 장벽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공재는 아직 공통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를 통해 움직인다. 공공부문에서 국가는 직접적으로 착취의 행위자로 나타난다. 필요한 것은 공공재를 공통재로 전환시킬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강화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다. 그것은 국가권력이 환상적 방식으로 대의하고 있는 공통성을 다중의 네트워크의 내재적 기능으로 전유함으로써, 즉 착취관계의 가능조건을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29) 이러한 노력이 신자유주의 하에서 공공부문, 공공재를 수호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공공재의 사유화가 공공재가 갖고 있는 공통성의 요소를 더욱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유화에 대한 저항을 통해 공공재를 수호하려는 노력 속에서도 그것을 공통재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이 멈춰질 수는 없다. 이것은 국가 없이 다중들의 직접적 연합을 통해 우리 삶을 관리하기 위한 노력의 중요한 일부이다.


한미 FTA는 이미 초국화되었거나 초국화되고 있는 한국과 미국의 지배적 자본분파의 활동자유를 확대하기 위한 협정이다. 그 정점에 초국적 금융자본의 이해관계가 놓여 있음은 물론이다. 이것은 지난 이십 여 년 사이에 빠르게 진행된 자유화를 좀 더 빠르게 그리고 급진적으로 진행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어떤 효과가 있을까? 다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여기서 한미 FTA가 가져올 각국, 각 산업부문의 경제적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것과 같은 부르주아적 관심사는 접어두도록 하자. 한미 FTA는 분명히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 냉혹한 현금관계, 수익원리를 확산시킬 것이다. 그것은 의료, 보건, 주택, 토지, 연구, 교육, 수도, 전기 등등의 부문에 아직 남아 있는 공공성의 마지막 찌꺼기까지 해체시킬 것이다. 자본활동의 자유의 확대는 착취관계를 극단적으로 확대시켜 이미 심화될 대로 심화된 양극화를 더욱 밀어붙일 것이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을 생존선 밖으로 밀어낼 것이다. 게다가 한미FTA는 자본의 단순한 경제적 자유를 넘어 자본의 정치적 군사적 자유를 보장하는 포괄협정이기 때문에, 한반도에 전쟁의 분위기는 더욱 깊어질 것이고 주민들은 더 깊은 위험 앞에 노출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한미 FTA가 가져올 나쁜 결과들을 계속해서 나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미 FTA를 거부하고 저지해야 한다.


한미FTA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한미FTA 저지투쟁 속의 많은 사람들은 잔존하는 국가적 보호장치들(관세, 수입규제, 스크린쿼터, 조세규정 등)의 유지를 주장한다. 이 보호장치들은 때로는 일국 틀 내에서 활동하는 국내적 자본의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이며 때로는 농민의 생존을 유지해줄 것이고 또 때로는 노동력의 판매조건을 더 악화되지 않도록 유지해 줄 것이다. 그러나 국가적 보호장치들은 사람들의 단결이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하며 국가의 테두리 속에서 단결하는 국민-민중을 생산할 것이다. 이것은 타국의 국민-민중과 경쟁하는 애국적 주체로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체제에서 국민-민중의 투쟁은 자본주의와 싸워 이길 수 없다. 국민적 투쟁은 반드시 자본주의를 강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오직 지구적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전 인류의 단결만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길을 가능케 한다. 필요한 것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제주의이며, 국제주의보다는 인류인주의(Homaranismo)이다. 이것은 전 인류적 수준에서 공통재, 공유지, 공통적인 것을 창출하고 확장하는 것에 의해 가능해진다. 국가적 보호장치를 유지하자는 주장에 머무는 한미FTA 저지 투쟁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강화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의 패배를 고착시키는 데 기여한다. 우리의 선택이 자유무역인가 보호무역인가 사이에 한정된다면 우리는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 보호주의보다는 자유주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직접적 결과는 가혹하겠지만 자유무역은 장기적으로 국민성, 민족성의 장벽을 깨뜨림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단결과 혁명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우리는 FTA를 선택해야 한다.30) 이것이 맑스가 1847년 자유무역에 관한 연설에서 보호무역보다 자유무역을 옹호한 논리이다.31)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자유무역을 통해 착취관계가 전 지구적으로 확대될 것을, 그리하여 일종의 자연성으로서의 국민성이 그 과정에서 철폐될 것을 기다려야 할 만큼 덜 발전된 자본주의 시대가 아니다. 국민, 민족은 전 자본주의에서 물려받은 자연적 범주에서 점차 자본주의 속에서 인위적으로 양성된 정치적 범주로 성격이 바뀌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시뮬레이션을 통해 나날이 재생산되고 있다. 우리는 국민성, 국경, 민족성 등을 넘어서기 위해 자유무역, 즉 FTA라는 시련을 거쳐야 할 필요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미FTA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전체적으로는 더 악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국가적 보호장치들의 수호, 방어가 이 악화를 막는다는 이유에서, 즉 다소 덜 나쁜 관계들을 보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우리가 국민, 민족, 국가의 시뮬레이션에 함몰된다면 우리 자신이 국민적 국가적 자본관계에 동화되어 혁명의 기회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고통의 양적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고통을 낳는 자본관계 자체를 해체하고 다른 사회관계를 창출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특이한 다중들의 공통적 연합을 확대해 가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이 표현될 수 있는 길을 열어가는 것이다. 한미FTA 저지는 목표일 수 없고 오직 다중의 공통성을 확대하고 그것을 새로운 사회의 맹아로 발전시켜 나가는 투쟁의 계기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초국적 자본의 자유주의도 일국적 민중의 보호주의도 아닌 다중의 자율주의를 주장한다.

■ 주석


1) 이에 대해서는 조정환, 『아우또노미아』, 갈무리, 2003 참조.

2)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삶시간.

3) 심광현, 「<자본을 넘어 생태적 문화사회로>에 대한 조정환 선생의 논평에 대한 반론」(『자율평론』(jayul.net) 18호, 2006 가을,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998&p_no=1).

4) 같은 글.

5) 나는 이 글에서 현실적인 것(the actual), 현실성(actuality)을 실재적인 것(the real), 실재성(reality)와 구분한다. actuality는 잠재성(virtuality)과 더불어 reality의 구성부분이다. 반면 가능한 것(the possible), 가능성(possibility)는 이해하기에 따라 reality의 구성부분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실재적 가능성은 실재성의 구성부분이지만 유토피아적 가능성은 그렇지 않다.

6) 조정환, 「생태적 문화사회론의 탈노동의 문화관 및 도식적 사회론의 문제점 비판」, 맑스코뮤날레 2006년 제1회 워크샵 자료집.

7) 여기서 나는 표현이라는 말을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사용한다. 이에 대해서는 질 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이진경•권순모 옮김, 인간사랑, 2003 참조..

8) 심 교수는 「반론」에서 계속해서 근대적 사유의 대쌍, 즉 과학과 유토피아 사이에서 사고한다. 이것은 추상적 가능성과 현실성의 틀에서 사고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고전적 방식이다. 실재적 가능성은 이 틀에서는 주어지지 않으며, '상상-이성-직관'의 스피노자적 운동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바, 이것은 '구체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구체에로'라는 맑스의 이중운동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9) 좀 더 엄밀하게 생각하면, 칸트의 도식론이나 도덕론은 적어도 물자체(잠재적인 것)에 의한 촉발 가능성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심 교수의 생각보다는 잠재성과 결합될 여지가 더 크다.

10) 심광현, 앞의 글.

11) 이에 대해서는 조정환, 「노동의 탈근대적 변형과 삶문화의 전망」, 인천문화재단 컬쳐브릿지, 2006 발표문.

12) 이것은 임금노동에 대한 거부를 '노동 일반'에 대한 거부와 동일시하는 문화사회론의 방식이다.

13) 심광현, 앞의 글.

14) 같은 글.

15) 비물질적 노동은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이다. 이에 대해서는 자율평론 기획, 『비물질노동과 다중』, 갈무리, 2005 참조.

16) 이 점은 이미 「비판」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심 교수에 의해 이해된 것 같지는 않다.

17) 이에 대해서는 조정환, 『제국기계 비판』, 갈무리, 2005 참조.

18)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1』, 박종철 출판사, 1990에 실린 「공산주의자 선언」1872년 독일어판 서문.

19) 심광현, 앞의 글.

20) 심광현, 앞의 글.

21) V. I. 레닌, 『국가와 혁명』, 문성원•안규남 옮김, 돌베개, 1993 참조.

22) 이것은 "신자유주의에서 국가가 전면적으로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공공성 유지기능이 약화되고 자본 지원적 기능(즉 RSA 기능)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자율평론 18호)라고 말하는 곳에서 심 교수 자신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23) 실제로 이것은 다중이 아니라 민중이라고 해야 한다. 다중은 민중과는 달리 국가권력에서 배제된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으로 조직화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4) 칼 맑스, 『자본론』1권, 비봉출판사, 47쪽.

25) 이에 대해서는 질 들뢰즈, 앞의 책, 2003 참조.

26) 심광현, 앞의 글.

27) 이에 대해서는 조정환, 『지구제국』, 갈무리, 2002 제2부 참조.

28) 심광현, 앞의 글.

29)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는 단순한 이론적 작업이 아니며 개인의 작업일 수도 없다. 구체적 방법의 문제는 보다 실천적이고 집단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30) 미리 말해 둘 것은, 이 문장이 다음 단락에서 분리되어 인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1) 칼 맑스, 「자유무역 문제에 관한 연설」(『저작선집•1』, 박종철출판사, 344~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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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1,2월의 사회적 독서

지난달초에 한 신문의 '책읽기 365'에 착안하여 '사회적 독서를 시작해보자'며 나대로의 목록을 제안한 바 있다. 내가 1월의 목록으로 꼽은 책은 네 권이었는데, 지승호의 대담집 <금지를 금지하라>(시대의창, 2006),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알마, 2006), 테리 이글턴의 <우리시대의 비극론>(경성대출판부, 2006), 그리고 김경주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코리아, 2006)가 그것들이었다.

 

 

 

 

네 권의 책은 각각 네 가지 범주를 고려한 것인데, (1)한국사회에 대한 책, (2)미국과 세계에 관한 책, (3)철학/이론서, (4)문학서, 가 그 범주들이다. 한달이 지나서 돌이켜보니 네 권의 책 모두 구입은 했지만 한권도 완독은 하지 못했다. 나대로 변명이 없는 건 아니나 취지에 스스로가 적극 부응하지 못한 점은 반성할 여지가 있다. 그래도 <금지를 금지하라>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한 꼭지씩을 읽었고,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서 몇 편의 시를 읽었으며 나대로 이 책들을 '광고'했으니 의미가 없는 건 아니겠다. <우리시대의 비극론> 같은 경우는 좀 '무거운' 책에 들기에 일단은 사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싶고(사실 복사해둔 원서를 아직 못 찾고 있다).

 

 

 

 

참고로, 어떤 평자는 이글턴의 이 책을 <미학사상>(한신문화사, 1995)과 함께 그의 가장 좋은 책으로 꼽았다(<미학사상>의 원제는 '미적인 것의 이데올로기' 혹은 '미학의 이데올로기' 정도이다. 왜 샤프한 제목을 놔두고 둔감한 제목으로 옮겼는지 모르겠다). 이글턴 버전의 '미학사'인데, 먼로 비어슬리의 <미학사>(이론과실천, 1989), 베르너 융의 '미학사 입문' <미메시스에서 시뮬라시옹까지>(경성대출판부, 2006), 아직 한권이 덜 나온 타타르키비츠의 <미학사1,2>(미술문화, 2006) 등과 같이 읽어볼 수 있겠다.

아무려나 다시 달이 바뀌고 보니 해야 할일들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의무감'에 2월의 목록도 제안하도록 한다. 서재를 즐겨찾으시는 분들 가운데 1% 정도, 즉 10분 정도는 취지에 공감하여 '사회적 독서'에 동참하실지 모르고(적어도 책은 사서 꽂아두실 수 있겠다. 사실은 그게 중요하다) 그 정도라면 나의 '발의'가 무색하진 않겠다. 2월은 날수도 적은지라 좀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을 골랐다.

 

 

 

 

먼저, '한국사회를 읽자'는 취지로 고른 책은 남재일의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강, 2006). 고종석의 <신성동맹과 함께살기>(개마고원, 2006)에도 눈길이 갔지만,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의 경우 비교가 안될 만큼 세일즈포인트가 턱없다. 나부터도 한권 사줘야겠다. 가격 대비 분량 빵빵하고, 읽은 분들의 평도 좋다. 소개를 옮기자면, "기자 시절부터 다방면의 글을 써온 남재일의 사회/문화 비평집. 영화를 중심으로 대중문화 작품들을 읽어내려간 글들과 최근의 한국 사회 이슈들에 대한 발언들, 그리고 한대수·최민식·임상수·김훈 등 한국 대중문화를 이끌어가는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수록했다."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것은 인터뷰들이다. 지승호 대담집의 경우도 그렇지만, 나는 동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육성을 듣고 싶다.

그리고 두번째 '미국을 알자'란 취지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엠마뉘엘 토드의 <제국의 몰락>(까치글방, 2003)인데, 어느새 품절이다(책은 그나마 사둔 게 다행이군). 그래서 다시 고른 책은 '악동 감독 케빈 스미스의 미국 문화 뒤집기'란 부제를 가진 <순결한 할리우드>(media2.0, 2006). 이미 읽으신 분들도 많을 책인데, 원제는 'Silent Bob Speaks'(2005)이고,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와 제작자를 끌어들이는 시나리오를 쓰는 영화감독, 미국 인디영화계의 총아 '케빈 스미스'의 에세이. 재기발랄하고 유쾌한 문체로 미국 대중문화계의 이면을 파헤친다. 지은이가 할리우드에서 보고, 듣고, 소화시킨 미국 문화의 모든 것을 밀도있게 담아낸 책이다." 물론 나의 취지는 미국문화의 한복판에서 그가 던지는 '육성'을 들어보자는 것이다. 목차에서 나의 관심을 끄는 꼭지는 데이빗 린치의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와 관련된 이야기.

그리고 지젝의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의 출간이 다소 지연되는 바람에 무주공산이 된 철학/이론 파트에서는 로버트 니스벳의 <보수주의>(이후, 2007)를 골랐다. 하도 여기저기서 보수주의를 떠들어대고 있으므로 보수주의가 정말 뭔지 좀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신보수주의의 창시자'로도 불린다는 니스벳의 이 책은 (얇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를 가장 잘 정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보수주의 개론서"라고 평가되는 모양이다. "과연 보수주의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서 그것을 실체를 찾을 수 있는가? 저명한 보수주의 사회학자인 로버트 니스벳이 정치적 집단주의와 근본적 개인주의를 공격하는 보수주의의 본질을 명쾌하게 분석한다"니까 일독해봄 직하다. 원서의 표지를 보니 부제는 '꿈과 현실'.

그리고 끝으로 문학서로는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열린책들, 2007)을 고른다. 모더니즘에 대해서 공부도 해둬야 하고, 막간을 이용해 안 읽어둔 고전도 읽어둘 겸. 이미 여러 종의 번역서가 나와 있으므로 판본은 임의로 고르실 수 있겠다(기억에 학부시절엔 삼중당문고 정도가 유일했었다.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 실실거리며 감상을 전해주던 친구가 생각난다. 버지니아 울프처럼 세상을 떠났다).

잔소리 같은 소개를 보태자면, "20세기 문학사에서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실험적인 서술 기법을 발전시킨 모더니즘 소설의 대표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 섬세하고 아름다운 필치와 비범한 지성과 창조력이 결합된 장편소설이다." 그래도 300쪽이 안되는 분량이니 분량으로만 치자면 '만만한' 작품이다.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주연의 영화 <댈러웨이 부인>(1997)이 작년 가을에 개봉되기도 했었다. 겸사겸사 봐두면 좋겠다...

07. 0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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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

이달의 '사회적 독서' 목록에 올려놓은 책들을 한번씩 점검하고 있는데,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알마, 2006)도 그 중 한권이다. 이전에 한번 소개한 바 있지만 이번에 옮겨놓은 건 오마이뉴스의 리뷰이고 필자는 우연찮게도 정민호 기자이다. 며칠전 <금지를 금지하라>에 이어서 연이어 정기자의 글을 옮겨놓는 셈이 된다(그가 밤잠을 줄여가며 책을 읽는다는 게 허언은 아니겠다). 책상맡에 책이 놓여 있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이런저런 일들에 치이다 보니 나는 아직 펼쳐보지도 못했다. 내주쯤에나 관심있는 장들을 좀 훑어볼 참이다. 마음가짐을 다잡는 차원에서 리뷰도 다시 읽어본다.  

오마이뉴스(07. 01. 02) 미국을 향한 미국 역사학자의 냉철한 비판!

미국이 내세우는 가치가 있다. 바로 자유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은 자유의 나라임을 강조한다.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미국은 철저하게 자유의 나라라고 말이다. 동시에 부정하고 있다. 미국이 말하는 자유는, 미국이 지키고자 하는 자유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자유가 아니다. 그 의미는 언제나 변했을 뿐더러, 또 미국을 좋아한다고 해서, 미국에 산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중심에 있는 자들만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이 아무리 자유의 나라임을 강조한다 할지라도 누구나 그것을 누릴 수는 없다는 말이다.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로 소개되는 에릭 포너는 우리에게 낯선 학자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 이름을 자주 듣게 될 것 같다.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인정받은 실력파 역사학자로 입지를 굳히고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환경이란 매카시즘이 풍미하던 그때, 소위 '빨갱이' 집안의 자식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색안경 낀 사람들은 그를 미국을 망치는 인물이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주요 역사학 단체의 회장을 지내며 영향력을 키워왔다. 편견을 뛰어넘는 실력이 있다는 말일 게다.

그 실력이란, 사각지대를 볼 줄 아는 다양성에서 비롯된다. 에릭 포너는 자신을 이야기하는 글에서 공산당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흑인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 시절 흑인의 인권에 관심을 갖던 이가 누가 있었겠는가. 이것은 성장한 후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는 남들과 달리,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글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많이 다르다.

에릭 포너가 이야기 하는 진정한 '자유'
앞에서 언급된 '자유'로 생각해보자. 미국이 자유롭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미국인들이 스스로 자유롭다는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자유와 반대되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 즉 '자유의 땅, 미덕의 현장, 피압박자의 피난처'라는 주장을 펼치게 하려면 상대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어떻게 마련하는가? 바깥 세계를 과장해서 부정적으로 그려야 한다. 동시에 스스로 미국을 특별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에 따르면 미국의 독립운동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다. 독립 전쟁을 "인류 역사에서 새 시대를 열어젖힌 사건"으로 생각하게 함으로써, 그것이 "미국과 나머지 인류의 차이를 부각"되는 계기가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옳은 것인가? 옳든 그르든 간에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생각이 퍼질 수 있다는 지적인 것이다.

과연 자유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다양하게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에릭 포너의 답이다. 그는 미국이 세계를 상대로 자유가 무엇인지 강의하려고만 들지 말고 바깥 세계에도 뒤를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자유를 수호하고자 한다면, 자족적인 독백에 그치지 말고, 바깥세계와 주고받는 대화가 돼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요즘의 미국의 행동을 본다면, 특히 권력의 나팔수가 된 이들의 말이 무성할 때에, 이 말의 의미는 그렇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미국엔 왜 사회주의가 없을까?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그 외에도 진지하게 탐구할 것들을 던져주고 있다. 남북전쟁이 끝날 때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이뤄졌다고 알려진 '화해'는 사실 백인들끼리만 했다는 것, 또 흑인들을 차별하면서 모순적으로 자유를 주장하는 태도를 탐구하는 것 등이다. 물론 이제껏 흑인 문제를 지적하는 책들은 많았다. 그렇기에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뭐 그리 특별할까 싶지만, 다른 의미가 보이고 있다. 그것은 날카롭다는 것이다.

흑인이 차별받았으며, 또 지금도 다르지 않다는 말은 우리만 해도 자주 듣고 있다. 그럼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또한 그들을 이상하게 보기도 하는데 이러한 인식 속에는 암묵적으로 '우리'를 '미국인이라고 믿는 사람'과 동일시하고 있다. 하지만 에릭 포너는 오랜 역사부터 거슬러 오면서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역사는 현존하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이 착각이 어울릴 때, 이 의미가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그들이 자유에서 배제된 문제들은 지나간 역사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중요한 것은 흑인만 그런 차별을 받는 것이 아니라 미국인이 아닌 모두가 흑인처럼 대우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처럼 말이다. 흑인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인 셈인데 이 책은 그것을 명쾌하게 알려주고 있다.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눈길을 끄는 것으로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가 없는가?'하는 주제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가 없을까? 유럽만 하더라도 사회주의가 있다. 그들은 선거에 나서서 꽤나 큰 지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그랬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던가? 생각해보면 미국은 그 단어와 거리가 멀다. 결벽증에 걸린 것처럼 말이다. 에릭 포너는 그 이유를 다양한 측면에서 풀이하고 있는데 그 과정을 보는 것이 흥미롭다. 지금껏 떠올리던 미국과는 다른 모습이 보이는지라 몇 번 놀라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요즘 유행하는 역사책들과 달리 흥미진진한 주제를 다룬 것은 아니다. 흥미와는 거리가 먼, 오랫동안 생각해야 할 것들을 던져주는 문제들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매력적이다. 미국하면 떠올리던 이미지들, 특히 맹목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졌던 그것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은 접근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주목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정민호 기자) 

07. 01. 18.

P.S.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란 주제에 관련하여 떠오르는 책은 '미국에는 왜 사회주의 정당이 없는가'란 부제를 가진 세이무어 마틴 립셋의 <미국 예외주의>(후마니타스, 2006)이다. 립셋의 논의들은 포너 자신도 참조하고 있는데, '미국 사회주의의 역사'에 관해서라면 권위자가 아닌가 한다. 예전에 관련 페이퍼를 쓰기도 했지만, 작년에 나온 미국학 관련서들 가운데에서는 루이스 메넌드의 <메타피지컬 클럽>(민음사, 2006)과 함께 나대로는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아두고 있다(한데 전자는 아직 구입을 못했다. 목돈이 나올 구멍을 알아봐야겠다).

참고로,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없을까?'란 질문은 독일의 사회학자 베르너 좀바르트가 처음 던진 것이라고 한다. 우리에겐 <사치와 자본주의>로 소개된 사회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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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지승호의 인터뷰와 정기자의 서평

엊그제 우리 곁을 떠난 정군님의 리뷰를 하나 옮겨놓는다. 지승호의 인터뷰집 <금지를 금지하라>(시대의창, 2006)에 대한 것이고, 형식은 '오마이뉴스'의 서평기사를 퍼오는 식으로 하겠다(정군님의 알라딘 리뷰들은 현재로선 모두 그와 걸음을 같이 했으므로). 딴 뜻이 있어서는 아니고 아침에 '필름2.0'을 읽다 보니까 이번주 인터뷰이(!)가 지승호씨였다. 이달에 나대로 고른 '사회적 독서'의 대상 중 하나가 <금지를 금지하라>였기에 관심을 갖고 읽었고(이 인터뷰는 내주에 옮겨놓을 생각이다), 두 주 전쯤에 산 책을 아직 못펴들고 있지만 조만간 읽어볼 결심을 다시 하게 됐다.

그런 생각으로 '지승호'를 검색하니까 가장 먼저 뜨는 게 바로 오마이뉴스의 이 서평기사이다.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지. 서평도서에 대해서 그만한 애정과 부지런함을 갖춘 '서평꾼'이 이제 이 마을에는 거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쉽고 씁쓸하다(물론 나도 '양다리 걸치기'에 대해선 충고를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것이 도덕적인 책임의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래의 리뷰는 그걸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오마이뉴스(06. 12. 11)  세상을 발전시키는 대화가 여기에 있다!

국내 유일의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가 열 번째 인터뷰집을 내놓았다. 자본의 논리에 맞서는 이들, 박원순,조정래, 마광수, 이상호, 정태인, 문정현, 최승호, 지승호 등 8명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가 담긴 <禁止(금지)를 금지하라>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그 분야에서 자신이 믿는 것들을 위해, 그것이 권력을 지닌 자본의 논리에 비켜나는 것일지라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열혈인사들이기에 인터뷰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고 있다.

그런데 이들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맨 뒤에 있는 '지승호'와 한 인터뷰다. 저자가 다른 이를 만나서 인터뷰한 것을 담은 것일까? 아니다. 이것은 '셀프 인터뷰'다. 10번째 인터뷰집을 기념해서 담아본 것이라고 하는데, 그 시도가 생소하지만 어색하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묵묵히 인터뷰집을 내놓았던 지승호의 철학을 직접적으로 들을 기회이기 때문이다.

가장 마지막에 있는 지승호 인터뷰부터 보도록 하자. 눈길을 끄는 것은 솔직함이다. 그동안 인터뷰를 통해서 소를 연상케 하는 성실함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인터넷에 달린 댓글에 상처받았다는 이야기며, '열등감으로 가득 찬 나르시스트'라는 자평은 예의로 하는 말 같지는 않다(*지승호씨 또한 알라디너인데, 나는 본인도 고백하는, 그리고 노출하는 그의 '피해의식'이 오히려 책읽기를 방해하는 게 아닌가 싶다. 저자는 적당히 신비스러운 구석이 있어야 하지 않나. 이건 굳이 저자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일기장에 담을 법한 내용이라고 할까? 인터뷰집이라는, 아직은 생소한 분야를 개척하고 있는 저자의 어려움과 고뇌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그는 왜 인터뷰를 계속하는 걸까? 지승호는 도올의 말, 즉 "대화는 편견의 확인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인터뷰의 매력을 소개하고 있다. 대화는 힘이 세다! 그것을 믿고 인터뷰를 하며, 더 좋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일 게다. 자본은 뒤로하고, 오로지 그 믿음 하나만 갖고 사는 열혈남자의 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지승호가, 대화의 힘을 믿는다는 그가 책 속에서 만난 이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시작은 참여연대를 나와 희망제작소를 만든 시민운동가, 얼마 전에 삼성에서 지원금을 받아 논란을 일으켰던 주인공 박원순이다. 인터뷰에서 박원순은 본의 아니게 유명인이 된 시민운동가의 고뇌를 털어놓는다.

그 고뇌란 무엇인가? "글을 쓰고 싶다"는 그는 주변에서 운동하는 사람들로부터 도와달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심지어 이름만이라도 빌려달라는 것도 있다. 박원순은 마지못해 그렇게 하지만, 그렇게 하면 문제가 생긴다. 다른 곳에서 '너무 설친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인 셈이다.

박원순은 이것을 농담처럼 말하지만 단순히 유명세로 얻은 병치레라고 치부하기에는 커다란 고민이 있어 보인다. 그런 고민을 듣는 것 외에 참여연대에서 희망제작소로 옮긴 과정, 그리고 희망제작소에서 삼성의 기부금을 받은 것에 대한 생각 등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것도 반갑다.

지승호의 질문이 날카롭기 때문일까? 박원순은 두루뭉술하게 말하지 않았다. 참여연대에서 나오게 된 과정, 기업으로부터 돈 많은 것에 대한 생각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특히 박원순을 비판했던 이들에 대한 생각까지 들을 수 있다. 박원순, 나아가 오늘날의 시민운동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체크해 볼 가치가 있다.

두 번째 인터뷰이는 <한강>과 <태백산맥>, 그리고 <아리랑>이라는 말 많은 작품의 주인공 조정래다. 이 작품들이 말이 많다는 건 왜일까? 고발된 문학 작품! 마광수, 장정일과 달리 조정래의 작품은 '레드 콤플렉스'로 인해 무성한 말이 오고 갔다.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다른 인터뷰들은 기이할 정도로 이것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작품의 의미만을 파고드는 반쪽짜리 인터뷰로 진행된 경우가 많았다. 조정래에 관해서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암묵적으로 존재했던 셈이다.

하지만 지승호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그것을 파고들었다. 또 조정래에게 정치에 관해서도 물어보고 있다. 덕분에 조정래는 <금지를 금지하라>에서 작품으로 말할 기회에 이어 '대놓고 말할 기회'를 얻었는데, 그것은 예의 치레에 박힌 말들이 아니라 인간 조정래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말들이기에 반쪽이 아닌 정상 인터뷰가 만들어졌다. 조정래에 관한 인터뷰 중에서 가장 성실하다는 평가가 나올 만한 인터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세 번째 인터뷰이는 '자유정신 선동가' 마광수다. 마광수는 속칭 '야한' 소설로 말이 많은 작가다. 지승호나 마광수 또한 이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 때문에 이들은 이것부터 파고든다. 마광수는 인터뷰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무엇이 억울한가? 마광수는 외국 작가들의 작품, 예컨대 무라카미 류의 작품처럼 야한 정도로 따지면 더 노골적이 있는데도 국내 작가들의 작품만 차별한다는 것이다.

대중에 대한 서운함도 빼놓지 않고 있다. 사람들이 작품을 읽어본 뒤에 '비판'을 한다면 감수할 수 있겠지만, '너무 야하다!'는 말만 듣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광수의 말은 듣기에 거북한 것이지만, 근거가 있는지라 간과할 수 없다. 외국의 것은 작품성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하면서, 우리의 것은 작품성과 별도로 '위험하다'는 이상한 이중성의 잣대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광수의 인터뷰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리로만 전락한 것은 아니다. 다시 연애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며 자유로우면서도 '올바른' 성문화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지적하는 것들은 농담 같지만 진지하고 장난 같지만 경청할 필요가 있는 뼈있는 말들이다.

이외 대추리에서 만난 문정현과의 인터뷰에서는 '낮은 곳'에서 나이를 잊고 고군분투하는 종교인의 속마음을, 정태인과 한 인터뷰에서는 한미FTA의 위험성을 이상호와 최승호가 만난 인터뷰는 한국 언론에 대한 문제점을 들을 기회가 된다.

인터뷰 하나에 질문을 140개 만들 정도로 성실하게 준비했기 때문일까? 이들과 나눈 대화는 살아 있다. '수박 겉핥기' 식이 아니라 인터뷰만 봐도 그들을 직접 만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힘 있고 굳세다. '대화의 힘'은 묻히지 않았고 활자 위에서 생동하고 있다. 덕분에 세상을 발전시킨다는 대화의 힘이 무엇인지를 엿보게 해준다.

박원순, 조정래, 마광수 등 그들의 말만 갖고도 책 한 권은 족히 나올 법한데, 그들 8명을 한 권에 담아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금지를 금지하라>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자본의 논리에 맞서 싸우는, 진실을 찾는 이 사회의 일꾼들의 목소리가 담긴 <금지를 금지하라>, 세상을 발전시키는 대화가 담겨있다.(정민호 기자)

07. 01. 16.

P.S. 참고로 저자가 가장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는 인터뷰는 이상호 기자와의 인터뷰라고 한다. '사회적 독서'는 취향이나 형편에 따라 읽으면 좋고, 가 아니다. 의무적인 독서이고 강제적인 독서이다. 물론 그래도 각자의 사정을 무시할 수는 없겠다. 그래서 많이 봐드리자면, 한권씩 그냥 사서 꽂아두시길. 그래야 책이 계속 더 나온다. 지승호 인터뷰집의 근간은 <감독, 열정을 말하다> 속편이라고. 그의 계획대로 홍상수, 김기덕 감독 편까지 포함한 인터뷰집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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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시는 직업이 아니라 시를 쓰는 상태"

지승호의 인터뷰집 <금지를 금지하라> 등과 함께 이달의 '사회적 독서' 목록에 내가 또 올려놓은 책은 김경주 시인의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중앙, 2006)이다. 시집을 읽고 소감을 적는 게 '사회적 소임'이겠으나 이런저런 글독촉과 글쓰기 장애에 시달리는 즈음이라 그럴 만한 여유는 없고, 대신에 참고할 만한 자료를 '사회적 의무감'에 올려놓는다. 몇 달 전에 스크랩해놓은 기사이다.  

첫 시집 펴낸 김경주 시인 

컬쳐뉴스(06. 10. 09) "시는 직업이 아니라 시를 쓰는 상태"

권혁웅 시인으로부터 “한국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라는 찬사를 받은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중앙)의 작가 김경주를 서울 인사동에서 만났다. 시집 속 미모(?)의 시인을 보고 잠깐 ‘여성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정작 만나본 시인은 체구는 작지만 수염을 깍지 않은 까칠한 모습에 제대로 된 전라도 말을 쓰는 말 그대로 전라도 남자였다.  

그의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는 시인이 ‘시인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기형(畸形)’에 대한 이야기다. 시인은 인터뷰 중에도 ‘기형’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시를 쓰는 사람은 많은데 시를 읽는 사람이 없고, 시를 읽는 사람은 없는데 서점에 시집은 넘쳐나고 이 모든 것이 ‘기형’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시의 기형’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실은 이 세상의 모든 ‘기형’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 /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 그림이 되지 않으면 /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 「외계(外界)」 중에서

시인은 이번 시집이 첫 시집이지만 지난 2003년 등단 후 2년 동안 발표한 시들은 일부러 싣지 않았다. 시인에게 ‘현재 진행 중’인 고민들을 담아내고 싶었던 까닭이다. “어느 정도 제 깜냥 안에서 고민이 끝난 것들은 저한테 설렘을 주지 못하더라고요. 첫 시집이니까 지금 고민이 와 있는 자리, 지금 고민을 담은 시들을 묶고 싶었어요. 그래야 앞으로의 시간도 견뎌줄 것 같더라고요.” 

시인은 등단 후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지방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시인에게 서울은 낯선 곳이었다. “서울은 정말 딴 세상 같았어요. 사투리가 굉장히 심해서 실어증을 1년 쯤 앓을 정도로 말을 하지 못했죠.” 그는 말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사람을 사귀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고 고백했다. 시인의 서울에 대한 이질감은 그의 시에 ‘외로움’과 ‘상실’이라는 감수성으로 드러난다.
 
“(…) 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音)을 듣는 일이다 제 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이란 한 생을 이해하는데 걸리는 사랑이다 아버지는 병든 어머니를 평생 등 뒤에서만 안고 잤다 제 정신으로 듣는 음악이란 없다(…) 밤이면 방을 밀고 우주로 간다” - 「우주로 날아가는 방 1」 중에서

“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 // 내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녀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나는 붓다의 수행 중 방랑을 가장 사랑했다 방랑이란 그런 것이다 쭈그려 앉아서 한 생을 떠는 것 사랑으로 가슴으로 무너지는 날에도 나는 깨어서 골방 속에 떨곤 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두 눈은 강물 냄새가 난다(…) ” - 「내 워크맨 속 갠지스」

그리고 시인은 이러한 낯섦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고향에서는 ‘한강’이라는 것이 매우 낯선 것이어서 소재로 들어오기 힘들거든요. 하지만 서울에 오면 ‘한강’은 아주 단순하게 존재하죠. 이 두 개의 낯섦 사이에는 새로 생겨난 것과 사라지는 것이 있는데, 연민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볼 때 생기는 감정입니다. 저에게는 이러한 ‘연민’의 정서가 시적 화두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시인이 서른 한 살을 먹는 동안 시인의 서른 한 살까지의 삶이 지나가버렸다. 시인은 그렇게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며, 그 안에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 경계에 머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벌써 학부만 네 번째 전전하고 있는 만학도(滿學徒)다. 법학과, 독문학과, 국문학과를 거쳐 지금은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다니고 있는 그가 문학에 입문하게 된 배경이 궁금했다.

“세 번째 학교에서 국문학과를 다닐 때 군대를 가게 됐는데요. 해군이다 보니 무인도에서 군 생활을 했어요. 딸랑 6명이서 무인도에 있다보니 어찌나 무료하고 심심한지, 휴가 나왔을 때 제대할 때까지 읽을 심산으로 선배들이 제일 어렵고 알레고리화 되어있다고 한 시집 다섯 권을 들고 갔어요. 처음에는 정말 어려웠는데 계속 읽다보니까 어렴풋하게 시에 대한 느낌이 오더라구요.”

그렇게 시에 좋은 느낌을 갖고 제대한 뒤 무작정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3~4년 쓰다 보니 등단에 이르게 됐고, 지난해에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시적 재능”이라는 말을 들으며 대산창작기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시인이 ‘직업이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쓰는 지속의 순간 바로 그 상태만이 그 이름의 정체성으로 불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작가라는 호명은 그 지속의 상태에서만 불릴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김경주 시인은 글 쓰는 것 외에도 하는 일이 많다. 등단 후 삼성생명에서 카피라이터를 2년간 했었고, EBS에서 사회과학 탐구 부문 구성작가를 했었다. 또 대학 친구들과 독립영화사 ‘청춘’을 설립해 단편영화 작업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계간지 『풋』의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시를 쓰는 순간에만 진실하면 되는 것 같아요. 다른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특별히 시 쓰는 일이 힘들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다양한 장르에서 일을 하면서 시의 다양한 형식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해준 것 같아요. 지금 철학을 공부하고 있듯이 앞으로도 저를 설레게 하는 것들을 쫓아서 할 겁니다.”

그는 자유를 찾아 끝없이 헤매는 방랑자 같았다. 방랑자는 자유롭지만 늘 불안하다. 하지만 불안이라는 감정은 어쩌면 주위의 것인지 모른다. 뭔가 새로운 것을 찾는 시인은 오히려 여유로워 보였다. 그가 자유의 하늘에서 펼쳐 보일 퍼덕거림을 오래도록 만나볼 수 있길 기대한다.(위지혜 기자)  

07. 01. 17.

P.S. 내친 김에 국민일보의 신춘기사도 같이 옮겨놓는다.

국민일보(07. 01. 04) 시인 ‘김경주’… 시·희곡 넘나드는 문단 괴물

시인 김경주(31). 그는 지금 폭발하고 있다. 지난해 7월 그가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중앙)를 냈을 때 문단 안팎에서 ‘헉’ 소리가 들렸다. 그 중에서도 ‘미래파’라는 용어로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풍을 일별한 문학평론가 권혁웅씨가 붙인 시집 발문은 많은 이야기를 남겼다. “이 무시무시한 신인의 등장은 한국문학의 축복이자 저주다. 시인으로서의 믿음과 비평가로서의 안목 둘 다를 걸고 말하건대,시집은 한국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 될 것이다.”

시인 김경주에게도 그런 격찬은 적지 않은 부담이 되었을 터다. “엄밀히 말하자면 저는 미래파는 아니에요. 미래파라는 용어는 규정되고 단정된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이론 자체가 낡은 것이죠. 모든 시인이 미래지향적이기는 하겠습니다만 새로운 패러다임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전남 광주 태생. 전남대 법대,조선대 독문과,원광대 국문과를 거듭 중퇴한 이력의 소유자. (요즘 젊은 시인들의 구심체라할 황병승을 비롯해 최승철 송승환 이현승 윤석정 시인이 모두 원광대 국문과 문턱을 거쳐간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등단 4년차에 지금은 서강대 철학과 4학년.



졸업 시험을 치르고 있던 지난 연말에 홍익대 앞에서 그를 만났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속초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40여일에 걸쳐 시베리아를 횡단할 계획입니다. (지금쯤 그는 이르쿠츠크에 도착해 얼어붙은 바이칼 위를 미끄러지고 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시베리아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기회가 주어진다면 러시아의 옛 유배지들을 둘러보고 싶어요. 페테르부르크까지 갔다가 다시 이르쿠츠크를 경유해 고비 사막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고교 중퇴 이후 그의 생활은 자발적 유배의 연속이었다. 가출이 아니라 출가였다. 낮에는 학원 앞 분식집 서빙,새벽엔 신문배달,의대에 간 친구 소개로 시체 닦는 일도 해보았다. 부산 한 공원의 벤치에서 몇달간 노숙도 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남총련에 가입,화염병 만드는 법을 배우다가 입대한다.

“엄마 나 슈퍼 좀 다녀올라요”하고 입대한 해군에서 그는 바닷속 폭탄을 설치하는 심해잠수사였다. “처음 1년은 우리나라의 모든 섬을 군함타고 돌았고 나머지 1년은 무인도에서 경비를 섰지요. 모두 6명이었는데 그 중 한 놈은 자살,한 놈은 감전사했지요.” 죽을 사(死)자를 발음할 때 죽음에 저항이라도 하듯,그렇지 않아도 번뜩이는 그의 눈매가 더욱 매섭게 빛났다. 외로움의 극단에서 그의 시는 쏟아져 나왔다.

“인간의 수많은 움막을 싣고 지구는 우주속에 둥둥 날고 있다 그런 방에서 세상에서 가장 작은 편지를 쓰는 일은 자신의 분홍을 밀랍하는 일이다 불씨가 제 정신을 떠돌며 떨고 있듯 북극의 냄새를 풍기며 입술을 떠나는 휘파람,가슴에 몇천 평을 더 가꿀 수도 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들이,이 세상을 희롱하는 방법은,외로워해 주는 것이다//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音)을 듣는 일이다.”(‘우주로 날아가는 방1’ 일부)

그가 살고 있는 움막을 보고 싶었다. 방이 어질러져 공개할 수 없다던 그가 천천히 앞장을 섰다. 아현동 산동네 초입에 그가 타고 다니는 ‘올드 바이크’가 서 있었다. 한참을 더 올라가 파란 쪽문을 열자 냉기 도는 옥탑방이 나왔다. 겨울엔 기름값 때문에 보일러 버튼에 가동금지 표시로 녹색 테이프를 붙여놓는다고 했다.

좁다란 2층 구조의 아래칸은 화장실과 간단한 조리시설,위칸은 침대와 책상이 놓인 침실이었고,그 옆으로 동서양 고금서책으로 꽉 들어찬 작은 서재가 있었다. 월세 20만원. 상경한 지 5년동안 흑석동 염리동을 전전하다 들어온 시인의 집은 부서진 난파선 같았다. 그 방에서 친구와 함께 ‘청춘’이라는 단편 영화도 찍었다. 그가 시집에 쓴 ‘시인의 말’에 “초대받은 적도 없고 초대할 생각도 없는 나의 창(窓). 사람들아,이것은 기형에 관한 이야기다”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시인은 차고 넘치는데 시집 읽는 이가 없으니 그게 기형이지요. 기형은 퇴화도 진화도 아니고 일그러진 그 자체가 아닙니까. 봉준호 감독이 영화 ‘괴물’에서 보여준 바로 그 괴물. 기형에 시적 언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언어가 극단적인 것은 다양성의 폭력성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인데,상대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형식 파괴가 나오지요. 시가 형식 파괴에 앞장서야 하고요.”

시놉시스,희곡 등에서 시적인 느낌을 주는 텍스트를 생산해야될 의무가 시인에게 있다는 그는 올해엔 자신의 희곡을 대학로 연극무대에 올릴 계획이라고. 시보다 먼저 희곡을 써왔다는 그는 “시인으로서 희곡판,연극판을 부활시키는 것이 꿈”이라고 밝혔다.심해잠수사 출신답게 그는 인생의 결락 부분을 채우기 위한 발화의 욕망에 뇌관을 설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불도 들이지 않은 눅눅하고 차가운 방에서 이 젊은 몽상가는 그 폭발력으로 날아갈 우주의 바깥을 꿈꾸고 있었다. 시와 함께 그 자신도 폭발하고 있었다.

“예컨대 비평가 김현(1942∼1990)이 지금도 살아있는 건 이성복 시인을 찾아낸 것에 있지요. 비평가들도 10년안에 작가를 못찾으면 문을 닫아야 합니다. 요즘 비평가들에게는 미학이 없어요. 작가나 시인을 출판사에 연결시키는 중개 역할에 머물고 있지요. 결국 비평가는 보이고 작가는 안보이게 되는 것이죠. 문학은 좋은데 문학 풍토는 싫더군요. 그래서 문학 밖에서 찾게 되지요.”

일찌감치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속에서 순교할 것이다”(‘드라이아이스’)라고 선언해버린 시인. 그의 시베리아행은 문학 밖에서 문학의 과녁을 찾는 순교 여행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문학보다는 삶이 먼저인 것이니 그가 허무에 함몰되지 않는 심리적 버팀목을 이번 여행길에서 찾게되길….(정철훈 전문기자)

경향신문(06. 09. 13) 김경주씨 첫 시집 출간…세상을 희롱하는 ‘외로운 울음’

외로움은 꽤 귀족적인 감정이다. 외로움은 세상과 삶이 수준미달로 여겨질 때 찾아오기 때문이다. ‘진짜 시인’은 오만불손하게 외로운 자들이다. 도무지 세상과 사이좋게 지내기가 힘들다. 세상과 관계를 맺을수록 상처받는다. 결국 자기만의 성(城)을 쌓는다. 세속의 관점에서 보자면 시인이 예정된 패배를 자초하는 것이지만, 시인의 눈으로 보자면 세상을 비웃거나 반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지난해 대산창작기금을 받으며 “걱정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시적 재능”이란 말을 들었던 김경주씨(30)가 첫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중앙)를 냈다. 제목부터 외로움을 표낸다. 세상이 그를 열외(列外)시킨 것과 그가 세상을 열외시킨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지구에서는 시인의 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의 별에서는 지구가 보인다”(‘비정성시’ 중). 세상과 ‘맞장’을 뜨는 패기야말로 시적 재능의 대표적 증거일 테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드라이아이스’ 중).

젊은 문인 권혁웅씨는 시집 뒤표지 ‘주례사’에서 “이 무시무시한 신인의 등장은 한국문학의 축복이자 저주다. 시인으로서의 믿음과 비평가로서의 안목 둘 다를 걸고 말하건대, 이 시집은 한국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 될 것”이라고 썼다.

‘기자의 감각을 걸고 말하건대’ 이 시집은 ‘걱정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시적 재능’ 때문에 ‘한국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중요한 시집’은 재능의 폭발이 아니라 한 시대의 영혼과 정신의 형식을 내장(內藏)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두번째 시집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가 이것이다.

수록작 ‘우주로 날아가는 방 1’에 따르면 ‘시인=세상 아닌 것’이다. 그것들이 “세상을 희롱하는 방법”은 “외로워해주는 것”이다. 이때 외로움이란 “제 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자 “한 생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사랑”이다. 몸의 음악과 생을 이해하는 데 시간과 사랑을 쏟는 일이 세상에서는 ‘불편한 삶’에 불과하다. 따라서 시인은 외롭다.

시인의 외로움은 방랑과 눈물로 육화된다. 둘의 공통점은 ‘떠는 일’이다. “방랑이란 (중략) 쭈그려 앉아서 한 생을 떠는 것”이고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상 ‘내 워크맨 속 갠지스’ 중)이다. 쭈그려 울고 떨면서 한 점 열(熱)을 내보내는 게 그의 시(詩)인 셈이다.

그때 외로운 울음이란 자기를 넘어서는 행위이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중). 사람을 짐승 상태로 냅두려는 미친 세상의 복수가 두렵지 않을까. “기껏해야 생은 자기 피를 어슬렁거리다 가는 것”(‘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중)이다. 그러므로 미친 세상은 시인을 얕보지 말아야 한다. “바람에게 함부로 반말하지 말라”(‘바람의 연대기는 누가 다 기록하나’ 중).

시인은 자신에게 반말하는 세상의 ‘외계(外界)’에 산다. 세상은 시인을 포용하지 못하지만, 시인은 세상 밖에서 그 세상을 슬퍼해주면서 운다. 세상의 ‘자궁’에 대한 도저한 연민 탓이다.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중략)/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외계’ 부분).(김중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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