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과 실천의 간격 혹은 차이에 대한 지적은 구태를 못 벗어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공부의 행간에 자기 삶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나도 요즘 이런 고민이 새삼스레  드는 차에 박노자의 글이 있어 가져온다. 나역시 최근 작은 발표회에서 철학자들의 계보와 문제의식을 이리 저리 재구성해보려는 작업을 보면서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다. 그 자체의 유의미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가 누구를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 1920년대의 철학적 질문과 대답이 1960년대에 반향을 일으키고 영향을 행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는가? 근거가 빠지니, 철학자 놈들의 의도와 지향은 빠지고 애매모호한 개념들만이 남는다. 우리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골머리를 앓게 된다. 이해에 급급하고 그의 이야기를 따라 읽기 바쁘다.  이 철학의 공허를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라는 걱정이 있다. 소위 한국의 철학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또 그 안에서 내 공부의 의미는 무엇인가?

 

학술의 의미: 미국의 아시아 학회에서 돌아와서 | 만감: 일기장 2007/03/28 00:00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5102  

한 일주일을 미국, 보스톤, 아시아학회 (AAS)의 정기 발표회에서 보내고 어제 귀국을 하여 거의 하루 종일 피곤해 자고 있었습니다. 시차가 11시간이나 되어 낮과 밤이 맞바꾸어서 몸이 괴로워도 아주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몸보다 마음이 더 괴로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럽보다 아시아학이 더 발전됐다고 볼 수 있는 미국에서는 저는 많은 훌륭한 동료들을 만나고, 몇 차례의 꽤나 재미있는 발표를 듣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학회의 여러 분과 사이에 정신 없이 배회하면서 여러 발표를 듣는 그 동안에는 가슴은 왠지 좀 허전했습니다. 도대체 사회가 주는 큰 돈을 써가면서 이 일을 우리가 왜 하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어떤 답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한 학자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생에 대한 연구 저서를 낸다고 칩시다. 아쿠타가와라는 사람이 선해야 할 인간이 왜 이렇게 악하게 사는가, 왜 악을 이렇게 탐하는가 라는 물음에 답을 찾는 중에 결국 극히 비관적인 세계관을 갖게 돼 자살이라는 "마지막 도피"를 선택한 위대한 작가이셨는데, 이 작가에 대한 "연구 저서"를 낸다고 해서 이 작가가 평생 고심했던 "악"의 화두 풀기에 약간이라도 도움을 주는 것입니까? 글쎄, 특히 미국에서 나오는 연구서적이라면 십중팔구는 일본 학자들의 연구 성과들을 대충 미국적인 이론에 맞추어 "짜깁기"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아쿠타가와의 그 영원한 화두를 거의 발견하기도 어렵습니다. 물론 "짜깁기"라 해도 아주 전문적으로, 정확하게 한 것이고, 그 만큼의 가치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어를 못하는 사람이 그걸 보고 공부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과연 일생일업으로서의 학술이 과거의 위대한 창조적 개인이 이루어낸 업적을 "소개", "분석"하는 데에 그치고, 그 개인의 위대성을 이루는 중핵적인 "질문"에 어떤 형식의 답은 물론 그 존재 자체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게 인생을 바쳐가면서 할 만한 일인가요? 아쿠타가와는, 제가 워낙 좋아하는 작가다 보니 예로 든 것인데, 그 대신에 <날개>를 지은 이상 (제가 보기에는 아쿠타가와와 참 흡사한 면이 많은 듯한 사람이에요)을 이야기해도 똑같습니다. 이상의 구도를 계승하고 그것보다 더 멀리 갈 자신이 없다면 이미 좋은 세상에 가고 없는 이상의 연구를 왜 합니까? 물론 연구를 한다고 해서 민폐를 끼치는 일도 (사회적 자원의 낭비 이외) 없지만 그래도 중생들을 위해 뭔가를 해놓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상구보리도 하화중생도 못하고 의미 없는 말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다가 그저 그냥 돌아가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 좀 허무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다고는 니체의 연구자마다 다 초인이 되라는 이야기는 아닌데, 일단 초인의 면모 일부라도 보여주지 못하고 죽은 니체의 "말"만을 백번 천 번 더 옮겨쓴다면 그게 중생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재판관에게 가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설파한 목사가 예배 끝나고 곧바로 고액 부동산 관련 소송을 하는 관계로 변호사 사무실로 간다면 이건 "종교"라기보다는 "연극"인 것처럼 말씀입니다. 물론, "연극"의 질이 좋으면 볼만도 하지만...

 

요즘 세상에 "마르크스주의"라 하면 곧바로 바웃고 조소할 무리들이 많지만, 그래도 마르크스의 학술은 구체적인 인간에게 구체적인 도움이 되는 측면이 크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강남의 한 회사에서 회사원 ㄱ 아무개가 회사일을 월급 받으려고 그냥 시키는 대로만 억지로 적당히 하고 오로지 생각하는 것이 옆 골목의 대딸방이라면  우리는 이것이 생산자로부터의 생산 수단의 소외로 인한 "노동의 소외"라는 판단을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병명을 안다고 해서 병을 당장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병을 고치려면 이 회사가 사회의 재산이 되어 ㄱ 아무개와 그 동료들의 민주적인 참여 형식으로, 이득이 아닌 "대타 서비스"를 위해서만 계획적으로 운영돼야 되는데, 그렇게 하자면 이 사회가 아주 크게 바뀌어야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마르크스 덕분에 병명도 알고, 대략적인 "처방"까지 알게 됐다면 마르크스는 위대한 학자이자 보살도의 실천가이었던 것이지요. 저를 비롯한 우리 동료들이 마르크스 만큼 실천하지 못하고, 결국 요익중생할 것 없이 "빈 말"의 속에서 살다가 돌아가는 것이 한이라면 정말 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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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 2007-04-02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고민해야 할 문제군요. 소개 감사합니다.^^:

린(隣) 2007-04-02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낙 게으르다 보니 처음 받는 댓글이네요. 제 글은 아니지만 댓글 주셔서 고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