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삼백이의 칠일장 (합본 양장 특별판) - 제14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천효정 지음, 최미란 그림 / 문학동네 / 2022년 4월
평점 :
품절


어머! 합본으로 나오는군요. 초판 독자로서 반가운 마음에 씁니다. 아이 어릴 때 열심히 책 읽어준 거 말곤 해준건 없어선지 초저 때 정말 재밌게 수십번 본 책이라 6학년 아이가 지금도 아낍니다. 건방이 시리즈도 재밌었고. 천효정 작가님 사랑해요^^ 물론 그림도 압권이구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안사회를 위해서는 대안교육이라는 밑거름이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난 시절, 80년대를 마감하면서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한국 현대정치사에 문제제기하며 전교조라는 씨를 함께 뿌렸다. 그리고는 20년이 더 지났다. 그런데 전교조는 어떤 상황인가? 여전히 위기이고, 여전히 일방적으로 돌팔매질을 당하고 있다. 전교조의 일선 교사들과 지도부 모두가 학교 현장의 문제들이 산적한 상황에서 교육의 문제를 현장의 상황에서 절박하게 풀어가지 못한 안일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 듣기로는 평교사들은 이해집단으로 전교조를 택하는 이들이 부지기수고, 지도부는 정치적으로 편향되고 돌출된 행보를 보였다.  

그러다가 정권이 바뀌고 교육 현장의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는 상황에서 전교조의 이름은 별 울림이 없거나 이 정권의 각색에 의해 정치색만 남고 온갖 부정적인 회칠을 당하고 있다. 다시 처음부터라는 심정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전교조 지도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나대로의 답답함과 관심으로 이런 리스트를 만들어 본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나라 공교육의 대안으로 뜬 핀란드 교육은 물론 공부법에 대해서 이미 많은 책들이 있지만 대표적인 핀란드 교육에 대한 두 권의 책이다. 하지만 얼마 전 MBC 스페셜을 통해서 본 남한산초등학교 사례는 우리 땅에 교육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뚜렷하게 알려줬다는 점에서 첫번째 책으로 꼽고 싶었다. 

그리고 대안 교육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조한혜정 선생과 <하자 센터>를 빼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 같다. 그 공간은 학교와 정책이 만나 이룰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사례를 낳은 것 같다. 수많은 교육 활동가들, 자기 길을 창조하는 청년들을 배출했다. 조한혜정 선생의 하자센터의 결과물과 그 영향관계 속에 있는 책들을 몇 권 꼽았다.  

  

 

 

 

 

 

 

대안교육의 또 다른 사례가 있다. 부산의 소위 부자 동네 작은 서점에서 시작된 책읽기와 글쓰기가 생각과 삶의 문제로 옮겨가 보기 드문 실천의 장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들은 매우 소수이면서 매우 거창해서 대안교육의 사례로 볼 것인가가 약간 고민스러웠다. 유명하다고 주류는 아니지만 인디고서원의 드러난 행보는 이름난 이들과의 교류로 채워져왔다(최근 출간된 인디고잉의 국제판 표지를 보라). 나는 일선 학교에서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유명학자들과의 인터뷰와 만남을 갖는 것을 대안적인 사례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본다. 우리는 그들과 꼭 만나지 못하더라도 책을 통해 얼마든지 그들과 교류할 수 있고, 그러한 교류만으로 어떤 대안을 만들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안교육의 사례를 넓은 범주에서 학교 안팎의 모든 새로운 교육적 시도와 실천이라고 한다면 인디고 서원의 이야기도 분명 대안교육의 범주 안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인디고 서원의 아이들(이라고 하기에는 이제 모두 나이가 많지만)은 공교육(중고등은 물론 대학교육)에서 만들지 못하는 어떤 삶의 길을 만들고 있고 우리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분명해 보이니까. 하지만 그들이 어디로 가는 지는 좀 더 지켜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리 하르투리언.  <역사의 요동 - 근대성, 문화 그리고 일상생활>

윤영실, 서정은 옮김, 휴머니티(2006)

 

한국어판 서문에 붙은 부제, "시간, 경험, 파시즘의 유령"이야말로 지금 내 관심과 일치해 눈이 반짝 뜨였다. 하르투니언은 1918년부터 1940년까지 산업화가 진행되던 소위 전간기(戰間期)에 가장 긴급하면서도 어려운 개념으로 등장한 것이 <시간>이라 본다. 자본주의 근대화 및 도시 산업화와 더불어 헤겔적 의미에서의 역사로서의 시간이 개념화된 것이다. 이 역사적 시간의 자율성은 동시에 <내적 시간> 개념을 낳았는데, 베르그손(Henri Bergson)으로부터 시작된 과학과 양적 시간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질적 시간의 등장인 것이다. 여기서 시간에 대한 비판은 과학적으로 계량화되는 외적 세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잉여가치와 노동시간이라는 계량 가능한 추상적 시간 위에 설립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겸하고 있다.

한편, 하르투리언은 베르그손으로부터 시작된 <내적 시간> 문제는 짐멜(Georg Simmel)이 새로운 대도시와 시간의 내면화 경향을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다른 한편에서 루카치는 과학으로서의 철학을 철학의 정치화라는 방식으로 풀어나갔다면, 후설은 순수한 심리적 경험 상태로, 하이데거는 실존을 시간화하는 존재론적 역사성으로 향해갔다.

이들을 질적 시간의 회복이란 공통의 노력으로 계열화시킬 때, 그 근저에는 부르주아의 생산양식이 확립되면서 사회가 합리적 효율성으로 규정되는 거대한 메커니즘이 될 때, 일상적 삶(과 행위) 역시 그러한 산업관리체제에 종속된다는 세계 인식이 깔려있다.

마르크스가 이미 거기에 주목해 19세기에 사회적 관계의 대상화와 노동자의 자본에 소외된 노동을 지적하는 선구안을 지녔다면, 짐멜은 대도시에서 주관세계와 객관세계 사이의 간극에 최초로 주목한 사상가 중 하나로 역사철학적 저작에서 예술(형식)이 삶과 역사의 부조화를 보여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짐멜의 제자인 루카치 역시 초기에는 스승을 따라 형식과 예술에 특권적 지위를 되찾아주려 했지만, 맑시즘에 경도 후 문화적 형식과 일상 생활의 분리 현상을 '사물화'로 재해석하기에 이른다. 즉, 사물화 이론을 통해 루카치는 노동자의 의식이 자본주의적 생산이 요구하는 주관과 객관 세계의 분리를 극명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점은, 프롤레타리아가 (사물화된 의식의 분리를 극복하고) 주객 동일성을 실현하는 과정을 보여주려고 했던 루카치의 노력이 예술(형식)과 삶을 재통합시키려는 낭만주의적 열정의 반복이라고 지적하는 부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렇게 많은 발표들을 보니, 그 자체로 흐드러진 향연이 아닐 수 없다. 실컷 듣고 즐기고 오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론과 실천의 간격 혹은 차이에 대한 지적은 구태를 못 벗어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공부의 행간에 자기 삶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나도 요즘 이런 고민이 새삼스레  드는 차에 박노자의 글이 있어 가져온다. 나역시 최근 작은 발표회에서 철학자들의 계보와 문제의식을 이리 저리 재구성해보려는 작업을 보면서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다. 그 자체의 유의미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가 누구를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 1920년대의 철학적 질문과 대답이 1960년대에 반향을 일으키고 영향을 행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는가? 근거가 빠지니, 철학자 놈들의 의도와 지향은 빠지고 애매모호한 개념들만이 남는다. 우리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골머리를 앓게 된다. 이해에 급급하고 그의 이야기를 따라 읽기 바쁘다.  이 철학의 공허를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라는 걱정이 있다. 소위 한국의 철학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또 그 안에서 내 공부의 의미는 무엇인가?

 

학술의 의미: 미국의 아시아 학회에서 돌아와서 | 만감: 일기장 2007/03/28 00:00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5102  

한 일주일을 미국, 보스톤, 아시아학회 (AAS)의 정기 발표회에서 보내고 어제 귀국을 하여 거의 하루 종일 피곤해 자고 있었습니다. 시차가 11시간이나 되어 낮과 밤이 맞바꾸어서 몸이 괴로워도 아주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몸보다 마음이 더 괴로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럽보다 아시아학이 더 발전됐다고 볼 수 있는 미국에서는 저는 많은 훌륭한 동료들을 만나고, 몇 차례의 꽤나 재미있는 발표를 듣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학회의 여러 분과 사이에 정신 없이 배회하면서 여러 발표를 듣는 그 동안에는 가슴은 왠지 좀 허전했습니다. 도대체 사회가 주는 큰 돈을 써가면서 이 일을 우리가 왜 하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어떤 답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한 학자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선생에 대한 연구 저서를 낸다고 칩시다. 아쿠타가와라는 사람이 선해야 할 인간이 왜 이렇게 악하게 사는가, 왜 악을 이렇게 탐하는가 라는 물음에 답을 찾는 중에 결국 극히 비관적인 세계관을 갖게 돼 자살이라는 "마지막 도피"를 선택한 위대한 작가이셨는데, 이 작가에 대한 "연구 저서"를 낸다고 해서 이 작가가 평생 고심했던 "악"의 화두 풀기에 약간이라도 도움을 주는 것입니까? 글쎄, 특히 미국에서 나오는 연구서적이라면 십중팔구는 일본 학자들의 연구 성과들을 대충 미국적인 이론에 맞추어 "짜깁기"하는 것이고, 거기에서 아쿠타가와의 그 영원한 화두를 거의 발견하기도 어렵습니다. 물론 "짜깁기"라 해도 아주 전문적으로, 정확하게 한 것이고, 그 만큼의 가치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어를 못하는 사람이 그걸 보고 공부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과연 일생일업으로서의 학술이 과거의 위대한 창조적 개인이 이루어낸 업적을 "소개", "분석"하는 데에 그치고, 그 개인의 위대성을 이루는 중핵적인 "질문"에 어떤 형식의 답은 물론 그 존재 자체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게 인생을 바쳐가면서 할 만한 일인가요? 아쿠타가와는, 제가 워낙 좋아하는 작가다 보니 예로 든 것인데, 그 대신에 <날개>를 지은 이상 (제가 보기에는 아쿠타가와와 참 흡사한 면이 많은 듯한 사람이에요)을 이야기해도 똑같습니다. 이상의 구도를 계승하고 그것보다 더 멀리 갈 자신이 없다면 이미 좋은 세상에 가고 없는 이상의 연구를 왜 합니까? 물론 연구를 한다고 해서 민폐를 끼치는 일도 (사회적 자원의 낭비 이외) 없지만 그래도 중생들을 위해 뭔가를 해놓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상구보리도 하화중생도 못하고 의미 없는 말을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다가 그저 그냥 돌아가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 좀 허무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다고는 니체의 연구자마다 다 초인이 되라는 이야기는 아닌데, 일단 초인의 면모 일부라도 보여주지 못하고 죽은 니체의 "말"만을 백번 천 번 더 옮겨쓴다면 그게 중생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재판관에게 가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설파한 목사가 예배 끝나고 곧바로 고액 부동산 관련 소송을 하는 관계로 변호사 사무실로 간다면 이건 "종교"라기보다는 "연극"인 것처럼 말씀입니다. 물론, "연극"의 질이 좋으면 볼만도 하지만...

 

요즘 세상에 "마르크스주의"라 하면 곧바로 바웃고 조소할 무리들이 많지만, 그래도 마르크스의 학술은 구체적인 인간에게 구체적인 도움이 되는 측면이 크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강남의 한 회사에서 회사원 ㄱ 아무개가 회사일을 월급 받으려고 그냥 시키는 대로만 억지로 적당히 하고 오로지 생각하는 것이 옆 골목의 대딸방이라면  우리는 이것이 생산자로부터의 생산 수단의 소외로 인한 "노동의 소외"라는 판단을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따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병명을 안다고 해서 병을 당장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병을 고치려면 이 회사가 사회의 재산이 되어 ㄱ 아무개와 그 동료들의 민주적인 참여 형식으로, 이득이 아닌 "대타 서비스"를 위해서만 계획적으로 운영돼야 되는데, 그렇게 하자면 이 사회가 아주 크게 바뀌어야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마르크스 덕분에 병명도 알고, 대략적인 "처방"까지 알게 됐다면 마르크스는 위대한 학자이자 보살도의 실천가이었던 것이지요. 저를 비롯한 우리 동료들이 마르크스 만큼 실천하지 못하고, 결국 요익중생할 것 없이 "빈 말"의 속에서 살다가 돌아가는 것이 한이라면 정말 한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푸하 2007-04-02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고민해야 할 문제군요. 소개 감사합니다.^^:

린(隣) 2007-04-02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낙 게으르다 보니 처음 받는 댓글이네요. 제 글은 아니지만 댓글 주셔서 고맙네요.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