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하르투리언.  <역사의 요동 - 근대성, 문화 그리고 일상생활>

윤영실, 서정은 옮김, 휴머니티(2006)

 

한국어판 서문에 붙은 부제, "시간, 경험, 파시즘의 유령"이야말로 지금 내 관심과 일치해 눈이 반짝 뜨였다. 하르투니언은 1918년부터 1940년까지 산업화가 진행되던 소위 전간기(戰間期)에 가장 긴급하면서도 어려운 개념으로 등장한 것이 <시간>이라 본다. 자본주의 근대화 및 도시 산업화와 더불어 헤겔적 의미에서의 역사로서의 시간이 개념화된 것이다. 이 역사적 시간의 자율성은 동시에 <내적 시간> 개념을 낳았는데, 베르그손(Henri Bergson)으로부터 시작된 과학과 양적 시간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질적 시간의 등장인 것이다. 여기서 시간에 대한 비판은 과학적으로 계량화되는 외적 세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잉여가치와 노동시간이라는 계량 가능한 추상적 시간 위에 설립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겸하고 있다.

한편, 하르투리언은 베르그손으로부터 시작된 <내적 시간> 문제는 짐멜(Georg Simmel)이 새로운 대도시와 시간의 내면화 경향을 연결시키는 방식으로, 다른 한편에서 루카치는 과학으로서의 철학을 철학의 정치화라는 방식으로 풀어나갔다면, 후설은 순수한 심리적 경험 상태로, 하이데거는 실존을 시간화하는 존재론적 역사성으로 향해갔다.

이들을 질적 시간의 회복이란 공통의 노력으로 계열화시킬 때, 그 근저에는 부르주아의 생산양식이 확립되면서 사회가 합리적 효율성으로 규정되는 거대한 메커니즘이 될 때, 일상적 삶(과 행위) 역시 그러한 산업관리체제에 종속된다는 세계 인식이 깔려있다.

마르크스가 이미 거기에 주목해 19세기에 사회적 관계의 대상화와 노동자의 자본에 소외된 노동을 지적하는 선구안을 지녔다면, 짐멜은 대도시에서 주관세계와 객관세계 사이의 간극에 최초로 주목한 사상가 중 하나로 역사철학적 저작에서 예술(형식)이 삶과 역사의 부조화를 보여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짐멜의 제자인 루카치 역시 초기에는 스승을 따라 형식과 예술에 특권적 지위를 되찾아주려 했지만, 맑시즘에 경도 후 문화적 형식과 일상 생활의 분리 현상을 '사물화'로 재해석하기에 이른다. 즉, 사물화 이론을 통해 루카치는 노동자의 의식이 자본주의적 생산이 요구하는 주관과 객관 세계의 분리를 극명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점은, 프롤레타리아가 (사물화된 의식의 분리를 극복하고) 주객 동일성을 실현하는 과정을 보여주려고 했던 루카치의 노력이 예술(형식)과 삶을 재통합시키려는 낭만주의적 열정의 반복이라고 지적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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