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무척이나 한가하다. 연초 인사조정이 있어 팀을 옮기기 때문에 인수인계서 작성 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다. 하지만 인도에서 모든 혼과 에너지를 소진하고 나선,  퇴근 후 술을 마시러 다니기엔 마음이 무척 게을러져 있어서 집에서 혼자 간단히 마시고 만다. 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면 얼굴이 금새 빨개지는데 집에 따뜻해서인지 술 조금에도 쉬이 취하고 쉬이 깨진 않아 좋다.

 

어제도 그런 날 중 하나였는데, [뿌리 깊은 나무]를 시청하며 얼굴을 잘라낸 새우를 잔뜩 넣은 올리브오일 스파게티와 함께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세종과 정기준의 대담이 약간 지루해져서 취중에 지인의 블로그에 댓글을 달며 노는데 그녀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오는 것이 아닌가?! 조만간 술을 먹자며 번호를 교환한지 어언 6개월은 지난듯 한데, 이러다가 결국 못보지 않겠냐며 지금 당장 보자는 제안에 난 흔쾌히 승낙을 하고 집을 나섰다.

 

원래 한 번 들어오면 잘 나가고 싶어하지 않는데, 나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이러다 결국 못보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도 있었고, 씻거나 옷을 갈아 입지 않고 퇴근 후 귀가한 상태 그대로여서 별 채비 없이 그냥 나가도 됐었고, 술이 약간 모자라기도 했었고, 약속 장소가 동네급(?)이어서이기도 했었고, 등등 많지만 무엇보다도 난 미소녀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언제 어느때, 전국 어디라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취한듯 했고, 그녀의 블로그를 통해 그녀의 술버릇은 익히 알고 있었기에 추운 길을 나서며 걱정이 앞섰다. 바람맞으면 어떡하지....? 술마시고 불러낸 사람 바람 맞추기는 그녀의 특기 중 하나였고 나는 그 희생양 중 하나가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잠시 흔들렸지만, 오히려 그녀는 내가 잘 오고 있는지 나의 위치를 10분마다 체크하며 나를 안심시켰다.

 

집에서 키를 잃어버리는 술버릇은 언제 고치실런지, 그녀는 이번에도 키를 찾느라고 조금 늦긴 하셨지만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미소녀를 만날 수 있었다. 우유냄새가 나는 듯한 피부에서 빛이 나는 듯 했다. 둏구나..  풀서비스로 제공한다고 하더니 정말 보자마자 내게 선물을 내밀었다. 급만남인데, 소소한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농담삼아 편지도 있냐 물었더니 정말로 있었다. 나의 닉네임이 의미심장하다는 쪽지.... 그 외의 글은 사랑 고백 한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문장 한줄.

 

우린 동동주집에 가서 백세주와 소주를 시켜 들이 부어 섞고는 한치를 시켰다. 그녀는 오십세주 한잔에 오십병을 들이킨 것 마냥 급속도로 취해갔고, 난 남이 취하면 못취하는 성미라 그나마 취했던 술도 점점 깨어갔다 -_-; 가끔 멀쩡한 정신으로 취한 사람을 볼 때 (이런 경험은 지금껏 딱 2번 있는데, 내가 매번 먼저 취해버리기 때문) 놀라는 건 취한 사람의 눈이 빛나기 때문이다. 눈에 별이 총총 이런 느낌이 아니라 눈알 전체가 빛을 발하는 느낌이랄까..

 

뭐 여튼, 그녀의 대표적인 술버릇 중 하나가 필름불태우기란 걸 알기 때문에 난 누구에게도 쉽게 할 수 없었던 내 얘길 거리낌 없이 했고, 영광스럽게도 그녀는 들어주기도 하고, 말인지 당나귄지 모를 말도 주절주절 하기도 했다. 재미가 없다고 내게 화를 내기도 했고, 먼길을 와줘서 고맙다고도 했고, 드디어 만나서 너무 좋다고도 했고, 어쩐지 약간 슬퍼하기도 했다.

 

흘러가는 말, 말, 말들.

단연코 나보다 어리다고 생각해서 늙은 언니를 오라고 했다고 막 그랬는데, 알고봤더니 나보다 언니래서 대단히 놀랐지만 여전히 난 그녀를 어린이 취급했다. 택시비 왜 안주냐고 했더니, 준다 했다고 진짜 달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사람 처음 봤다며 화를 냈다. 우리의 화제가 재미없다며 섹스 좋아하냐고 물어서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몸도 잘 가누지 못하면서 기어이 날 지하철 타는 데까지 데려다 주고 그녀는 사라졌다. 집으로 혼자 오는 길은 외롭지 않았다. 그녀가 편지와 함께 준 하루키의 [잡문집]이 가방도 없는 내 손에 들려 있었으니까. 는 아니고 오십세주가 뒤늦게 올라와 만취해버려서 집에오는 길 필름 폭발했기 때문에.

 

미소녀들은 마음 놓고 잘도 취한다. 왜냐면 미소녀가 취해서 꼬장을 부린다 해도 그 모습을 미워할 사람은 없으니까. 취해서 내게 꼬장을 부려도, 횡포를 부려도, 나는 그녀들과의 만남이 즐겁다. 다음엔 맨정신에 만나서 같이 취해요.

 

(이 글을 불태워진 그녀의 필름에게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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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 2011-12-27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제 필름은 님 얼굴외에 하나도 기억나는게 없는데
기분은 완전 업업업!되어있었어요:D
다시 한 번 감사~

Forgettable. 2011-12-27 23:3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즐겁게 남아있어 다행이군요 ㅋㅋㅋㅋㅋ 저도 롤러코스터 탄 기분이었어요!! >_<

타자치는 스누피 2011-12-28 0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ㅋㅋ 옆에 있었던 듯 생생한 묘사와 서술 재미나게 읽고 갑니다. 미소녀들은 비슷한 데가 많은 모양입니다.
겪어 본 사람만이 아는;;; 환상특급 같은 스릴과 서스팬스!!

Forgettable. 2011-12-28 09:1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정말 겪어 본 사람만 아는 ㅋㅋㅋㅋ
그나저나 스누피오빠님이시네요.. 바운티가 먹고싶어진다능 `-`)

세라비 2011-12-2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편의 에세이를 읽는 듯한...미소녀 좋지!

아. 나도 술친구가 많았으면 좋겠구나.

Forgettable. 2011-12-28 16:21   좋아요 0 | URL
ㅋㅋㅋ 술친구는 딱 몇명만 있으면 됨 ㅋㅋ
그마저도 없으면 나처럼 티비나 모니터랑 술 마심 되지요!

무해한모리군 2011-12-28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끼 잡문집은 그냥저냥이였는데 이 글은 좋네요 ^^
안녕.

Forgettable. 2011-12-29 11:43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전 하루키의 에세이가 좋다고 해서 약간 다를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ㅋㅋㅋㅋㅋ 수상소감 부분에서 딱 막히네요 ㅋㅋㅋㅋㅋㅋ

아이는 잘 크고 있나요?
안녕 이라고 하지 말아요.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