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가를 좋아하기로, 혹은 싫어하기로 마음먹는 건 1권의 책이면 된다. 그게 잘 분간이 안가는 작가가 몇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무라카미 류다. 분명 '별로다.' 라고 각인되어 있음에도 왠지 모를 호기심에 계속해서 손을 대고 계속해서 실망을 번복하게 되는데 또. 읽고 말았다. 타지에서 구하기 힘든 한국책이라는 핑계를 대봤지만 어쩌면 지금의 내겐 무라카미 류만의 가벼운 말들의 향연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끔 심장이 쫄깃해진다고 표현하는 공포를 무라카미 류는 심지어 '눈부시게 찬란한, 내 안의 블랙홀'이라고 표현해 두었다. 멋부리는 말은 싫지만 이 제목은 나쁘지 않다. 역시 인기있는 작가답다. 불안, 공포라기엔 뭔가 부족하고 좀 더 근원적이며 심오한, 거부할 수 없는 그 느낌을 탁월하게 뽑아내 두었다.  

안정된 회사에 착실히 다니고, 착하고 사랑스러운 애인이 언제까지나 내 옆을 지켜줄 거라 믿을 때는 블랙홀이 사라진줄만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사라져서는 안되는, 가끔씩 그 모습을 드러내어 나를 괴롭혀주어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사라진 블랙홀을 찾아 이곳에 왔고 카리야 토시미치는 혼마 모에코를 만난다. 그녀는 블랙홀 그 자체인 여자였고 그렇게 사라지길 원했던 그녀가 진정 사라지자 그의 인생도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져버린다. 

우리는 모두 블랙홀을 갖고 있다. 아무 이유도 없고 어디서 왔는지 알 수도 없는 근원적인 섬찟한 이 불안감을 카리야 토시미치처럼 베트남전의 경험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대체할 수 있고, 혼마 모에코의 집착에서 오는 불안감으로 대체할 수 있고, 우리 모두가 그러하는 것처럼 일이나 관계에서 비롯되는 일상생활의 스트레스로 대체할 수도 있다. 소용이 있을까? 그렇다. 만약 이것을 대체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간신히 유지하던 수평을 잃고 블랙홀에 잠식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여기서 다시 질문을 해보자면, 나는 이 블랙홀 없이 살 수 있을까?  

그는 공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그 정체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애초에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이 블랙홀은 짊어져야 하는 숙명인 것이다. 블랙홀을 마주할 수 없어지면 나는 찾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대체할 수 있는 스트레스의 종류가 많아지고 근원적인 곳에 도달하는 빈도가 낮아진다. 내 안의 블랙홀이 감당할 수 없을만큼 커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대면하기가 차마 두려워 오는 좌절감. 

카리야 토모미치가 그랬었던 것처럼 나 역시 이렇게 점점 잠식되어 가는 것일까.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비 2010-07-18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갑자기 인생이 너무 평탄하게 잘 나가고 하는 일이 다 잘되면서 특별한 장애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외려 불안감을 심하게 느끼는데요, 이게 뭔가 더 큰일이 터질까봐 그러는건가?하면서 혼자 걱정을 만들고 이래요. 그냥 최적의 상태가 왔을때 그걸 즐기면 되는데 왜 그런건지..

무라카미 류는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데(물론 예전에 쓴 것들만요 ㅠㅠ) 이 책 한 번 읽어봐야겠군요.

Forgettable. 2010-07-18 16:17   좋아요 0 | URL
그렇죠. 너무 잘풀리면 그게 이상한거죠. ㅋㅋㅋ 저도 마찬가지에요. 아무일 없으면 그게 외려 이상해요. 이 블랙홀이라는 건 제게도 있는데 (말이 블랙홀이지) 그럴 땐 지인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막 엄청나게 불안해질 때 있어?' 라고 즐겨 묻습니다. ㅎㅎ 나한테만 그런가 싶어서요..

무라카미 류는 데뷔작이 가장 좋았고 점점 별로가 되는 작가 중의 하나라죠. 이 책은 그냥 무난해요. 워낙 오랜만에 읽은 한국책이라 평가가 좀 후한가 싶기도 하지만 ^^;

L.SHIN 2010-07-1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글이 좋습니다.
심장이 쫄깃해질 정도의 블랙홀이 필요하다, 때로는 살기 위해서-

거기 날씨는 어떤가요,요즘?
여기는 블랙홀 때문이 아니라 습한 더위 때문에 심장이고 혈관이고 뇌고 모두 쫄깃해지기 일보직전입니다.(웃음)

Forgettable. 2010-07-20 17:28   좋아요 0 | URL
엘신님. 고맙습니다. ㅠㅠ
요새 하도 페이퍼도 안써버릇하고 책도 안읽으니 무척 슬럼프인데 글이 좋다니. 심장이 쫄깃해지는데요? ㅋㅋㅋㅋ

여기 날씨는 천국이에요.
한국의 가을 날씨 같아요. 한 두달째.. ㅎㅎㅎㅎㅎㅎ 요 며칠은 비도 많이 오고 그렇긴 하지만 사람 살기 적정한 온도에서 잘 살고 있어요.

더운게 뭐죠? 호호

머큐리 2010-07-20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가 들면 사는 일이 비루해보이고...자기를 찾기가 더 힘들어지는건 맞는 이야기 같은데요...ㅎㅎ
그러니 젊을 때 용기를 더 키우세요 뽀님은 아직 젊잖아요...^^

Forgettable. 2010-07-20 17:28   좋아요 0 | URL
자꾸 용기가 없어져셔 요즘 걱정입니다. ㅎㅎㅎ
머큐리님 편지는 대체 언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마감도 없는데 독촉 ㅋㅋ)

lazydevil 2010-07-21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다...
바탕화면의 달인으로 인정합니다~~~

Forgettable. 2010-07-22 04:11   좋아요 0 | URL
후 이번에 힘들었어요.
대체 몇번의 시행착오를 거쳤는지!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