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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화이트홀 버스 정류장을 향해 그녀와 함께 걸었다. 이 소중한 마지막 몇 분 동안 그는 딱딱한 약자와 숫자가 나열된 새 주소를 그녀에게 써주었다. 그리고 기본 훈련이 끝날 때까지는 휴가가 없지만, 훈련만 끝나면 이 주간의 휴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면서 화가난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고, 그제야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말로 하지 못한 모든 것을 담은 행동이었다. 그녀도 손에 힘을 줌으로써 그의 마음에 화답했다. 버스가 왔지만 그녀는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서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지만 점차 서로 몸을 끌어당기면서 열정적인 키스로 변해갔다. 혀가 맞닿았을 때 그의 영혼은 절망적일 정도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 순간의 기억을 고이 간직하여 앞으로 몇 달간을 그 기억에 의존하여 살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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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의 [속죄]를 읽었다. 난 영미권 소설을 좋아하지 않지만, 왜인지 요즘 들어 계속해서 영미권 소설을 읽고 있다. [어느 미친 사내의 고백], [핑거스미스], [모든것이 밝혀졌다], [속죄]까지. 읽으면 읽을수록 의무감에 책을 읽는다는 생각, 미칠듯한 권태로움, 정신산만함 때문에 나의 취미가 독서였던가를 회의하게 된다.
현대의 영미권 소설들은 너무나도 수다스럽다. 거추장스러운 텍스트들이 무차별적으로 달겨들어서 내 시신경을 괴롭힌다. 눈으로 책을 읽는데 귓 속에서 와글와글거리는 기분을 지울 수 없고, 지친다. 끝이 나지 않길 바라며 책을 부여잡고 한 문장, 한 문장을 머금고 쓰다듬던 기억이 내게 있었던가? 얼른 끝을 보고싶단 급한 마음만 가득해서 책장을 후르륵 넘기곤 찝찝해한다.
마르케스였다면, 헤세였다면, 박완서였다면, 황석영이었다면 이 놀라운 이야기를 이렇게 수다스럽고 과하게 풀었을까. 이언 매큐언의 [속죄]는 사실주의를 가장한 담백한 문체이지만 어느 문학 작품보다도 과장되고 과열되어있다. 그래서 읽기에 힘겨웠다. 문장 안에 담긴 그 뜨거움이 견딜 수 없었고, 아무렇지도 않아보이는 차가운 문장들의 가식이 짜증났다.
멍청하고 비극적인 결말도, 병신같은 브리오니도, 지루하고 반복적인 설명문체도, 생동감 없는 전쟁 이야기도(이 문체에 전쟁이야기가 가당키나 한가? 난 삼국지에 길들여져 있는데.) 너무나도 다 견딜 수 없어서 내생에 가장 후회스러운 책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위에 적어둔 저 인용구 덕분에 살았다. 후르륵 읽다가 놓쳤다면 많이 후회했을 것이다. 아름다운 연인이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게 됐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사랑하고, 좌절하지 않고 힘겹게나마 남은 인생을 걸어갈 수 있어서.
여기까지만 읽은 걸로 하고, 자의식으로 가득찬 이기적인 결말은 기억에서 지우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