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부재

아주 오래전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국문과 수업을 들을 때였는데, 타과생도 몇명 있었던 수업이었다. 타과생은 보통 점수나 잘 받으려고 발악하듯이 재미없고 진부하거나 혹은 관련 없는, 트집,말꼬리 잡는 질문을 하거나- 뻔하고 지루한 ctrl+v 발표를 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난 타과생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무시했다고 해야 맞겠다.

그런 타과생 중에는 키가 훌쩍 크고, 얼굴이 뽀송뽀송하게 잘 생겼으며, 이름이 막내동생과 똑같은 친구가 있었다. 조별로 발표를 하는 수업이었는데, 그렇게 무시하고 달갑지 않아 했었음에도 난 그 친구와 같은 조를 하겠다고 손을 번쩍 들어서 친구들의 조소를 받으며 그 친구와 같은 조가 되는데 성공했다. 나의 목적은 언제나 그랬듯 A+가 아니었고 딴데 있었는데, 여차저차 하다보니 어느덧 그친구와 술자리까지 같이 하게 됐다. 이것도 능력이지, 지금 돌아보면. 

별로 취하지 않은게 빤히 보이는데도, 어느새 이친구는 자기 이야기를 내게 털어놓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더이상 말하지 말라고, 다 말해버리면 우리 관계는 여기서 끝이라고 외쳤지만 어느새 이 친구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빈자리를 형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해버렸다. 학번은 같았지만 나보다 한살 많으면서, 우리는 아직 말도 놓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사적인 자리에서 만난건데, 도대체 왜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이야길 했던걸까.  

그 이후로 조별 발표를 마쳤고, 우리 사이도 소원해졌기 때문에 그 친구가 왜 그이야길 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어렸을 때도 그게 위로할 수 없는 종류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섣불리 위로하려고 들었다가 그게 상처가 될 지도 모른다고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에 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그 친구는 내 예상대로 후회했을까. 그래서 나를 멀리했던걸까. 만약 내가 더 따뜻하게 대해주었다면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관계가 끝났다고 단정지었던 것은 나였을까. 그 친구는 관조보다는 서툰 위로를 바랬던걸까.  

아치님의 글을 읽으니 나의 오래된 추억이 풀썩거린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Forgettable. 2010-01-20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 먼댓글로 달기에는 연관성이 너무 없는 건가.

비로그인 2010-01-20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고백은 마치..

홀로 험한 산을 넘는 어떤 이의 한숨과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 아물지 않는 베인 살의 아픔을 어쩔 수 없이 꺼내보는 것일지도요..

Forgettable. 2010-01-21 09:43   좋아요 0 | URL
오, 이 댓글을 읽으니 약간은 이해가 갈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런데 반대로 어쩌면 그 친구는 제가 상상하는 만큼 힘들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봤어요. 그게 무의식에 반대되더라도 말이죠.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다면 어떻게 대처하는게 좋을지 아직도 모르겠네요.

Mephistopheles 2010-01-20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실을 확인해 볼 방법이 없다면 생각하기 나름.....(오호라 이런 뜸금없이 던지는 댓글하고는..)

Forgettable. 2010-01-21 09:44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생각을 하면서 이 글을 쓴건데. ㅋㅋ 뜬금없다기보단 밑바닥에 있는 제 생각을 읽으신 것이라 사료됩니다 ㅎ

순오기 2010-01-25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 속엣말을 할 때는 그냥 들어주는 것이 최선이지요 가끔은 끄덕이면서 경청한다는 걸 보여주는 정도로.
아마 그 친구는 말 하면서 스스로 위로받고 쌓인 걸 토해냈으니 시원했을지도...

Forgettable. 2010-01-26 09:28   좋아요 0 | URL
역시 그랬겠죠? 좋은 관계로 발전했으면 좋았을텐데 토해내고 말아버려서 아쉬운 마음에 아직도 기억이 나나봅니다. ㅎㅎ

nimv 2010-02-13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람들이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을 누군가에게 꺼낼 때는 여러 이유가 있다.

이 사람이 나의 아픈 과거의 모습을 이해해주고 사랑해줄 사람인가? 무의식적으로 마음을 열고 비추게 되는 경우
(반/때론 습관적으로 아무에게나 비추어 동정심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음, 특히 오형의 여자들이 모성애가 강하여 많이 당함...)

그럴 경우 진심으로는 말없이 들어주는 경우가 정답이지만 때론 약간의 오버를 동반하여 감싸주기를 상대는 원하고 있었을지도...
(이유인즉... 애정결핍이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반응들에 대해선 실망을 느낄 수 있으므로...)

그런 말을 어렵게 그 친구가 꺼냈었을 경우... 그 다음의 만남에서 상대가 숙쑤럽지 않게 더 적극적으로 이끌었거나 리드를 해주길 바라고 있었는데 이전하고 별 다른 행동들에서 괜한 말을 했거나해서 먼저 멀어지게 되는 경우...

그 친구의 보이지 않는 열등감 속에 술이 취하면 누구에게나 쉽게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비쳐내 보여질 수도 있는...
(간혹 술에 의존했을 때에만 반복적인 언행이 일어나는 상황 빈번하게 있음)

어릴 때 아버지에 대한 애정결핍 성장과정 속에 형에게 많은 의지를 했을 경우 형은 바로 아버지이다.
그 친구의 인생를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가 되었던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꾸어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대립구도/이성적 관계보다 아버지처럼 포근한 동성애적인 사랑을 갈구 할 수도 있는 %가 농후 함, 기회가 주어지면 동성애자로 바로 이전 할 수 있음)

사랑은 받아 본 사람이 사랑을 줄수 있으며 사랑을 받기만 하고 받아보지 못 했을 경우 남에게 사랑을 전달하는
방법론에서 많은 혼돈이 생김. 사랑을 주는 것도 때론 교육이 필요하며 사랑도 아무나 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조건부적인... 그것도 상대적 비교평가에서 오는 조건들 속에서 내가 조금이나마 손해는 보고 있지 않나 하는...

그래서 사랑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없으나 나이가 어릴 수록 쉽게 다가갈 수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릴 적의 사랑이라는 모습들은 시간이 지나고보면 자기도취이자 자기만족의 상상의 나래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가야 할 목적지의 거리 감이 없다보니 서울에서 대구를 가야하는데 부산을 간다던지 평양으로도 갈수 있기 때문이다. 때론 현실감을 철저히 배제하며 순간에 올인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감에 사랑도 변하는데 모든 현실과 상황에 대처 해나가는 모습 속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다면... 그때가 바로 심도있고 넓은 바다와 같은 자비로운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나이에 따라 사랑의 모습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안다면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Forgettable. 2010-02-15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걸 모두 알고계신 nimv님은 사랑을 많이/혹은 깊이 해보신 분인가요?
전 관계는 반복될수록, 깊어질수록 알 수 없는 것 같아서 언제나 배우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려고 하는데 그게 쉽지만은 않더군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나의 대처방법도 달라져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잖아요.

어떨 때는 관계가 악화되는 방향으로만 내가 행동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다 경험하고 체득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긴 코멘트 감사합니다.
덕분에 앞으로 사람을 대할 때 좀 더, 뭐랄까.. 죄책감을 갖거나 아무것도 모르는척하는, 그렇다고 다 아는 척하는 등의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을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