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누구누구 민족이 정립해두었다는 12개월 365일 주기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닌데, 하물며 새해 첫날이 뭐가 중요하겠냐마는 그래도 나도 고정관념으로 가득찬 인간종족인지라, 새해 첫 날 읽을 책은 무엇이 좋을까, 하며 한참을 책장 앞에서 서성였다. 서성였다지만 책 몇권을 두고 무엇을 고를지 고심했다는 편이 더 맞겠다. 



[독서일기] 알베르토 망구엘 , 진행중 
 

 



[반지의 비밀] 앨리스 피터스 , 진행중
 

 




[세상을 보는 방법] 쇼펜하우어 , 진행중 

 



[전망 좋은방] E.M.포스터 , 읽지 않음 

 

  




[면도날] 서머싯 몸 , 읽지 않음 

 

 

읽던 책은 괜히 망설여지고 해서 자꾸 눈에 밟혔지만 또 손은 가지 않던 [면도날]을 과감히 꺼내어 들었는데 왜 이 책을 지금껏 읽지 않고 방치해두었던가 싶다. 나는 서머싯 몸을 좋아한다. 그의 작품은 작가 자신이 바로 정확하게 이야기 해주듯이 특별히 대단한 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히 매력적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난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나 자신에게는 당당하게 권할 수 있다. 독서권태기이신가요? 서머싯 몸의 책을 집어 드세요.  

나는 그들([면도날]의 등장인물들)이 완벽한 미국인이라고는 감히 말하지 못하겠다. 그들은 영국인의 눈을 통해서 본 미국인이다. 나는 미국인들이 말하는 독특한 특성을 그대로 나타내려고 애쓰지 않았다. 영국 작가들이 그런 시도를 하면 미국작가들이 영국에서 사용하는 영어를 그대로 재현할 때 범하는 것과 똑같은 실수를 하게 된다. 특히 속어가 가장 위험한 함정이다. 헨리 제임스*는 영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빈번하게 속어를 사용했지만 영국인이 쓰는 것과 똑같이 표현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가 원했던 구어적 효과는 내지 못하고 영국 독자들에게 불편한 느낌만 안겨주었다.(p13)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서실을 나올 때도 래리는 여전히 윌리엄 제임스의 책에 몰두해 있었다. 나는 클럽 안에서 혼자 점심을 먹었다. 도서실이 조용했기 때문에 나는 식사 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면서 한두 시간쯤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놀랍게도 래리는 그때도 여전히 독서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옆자리를 떠난 이후로 꼼짝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오후 4시쯤 내가 그곳을 나올 때도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집중력이었다. 그는 내가 도서실에 드나드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그날 오후에는 여러가지 볼일이 있어서, 블랙스톤 호텔로 돌아갔을 무렵에는 벌써 어느 초대 자리에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어야 할 시간이었다. 저녁 초대에 가는 도중에 나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어서 다시 클럽에 들러 독서실에 가보았다.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신문 따위를 읽고 있었다. 래리는 아직도 같은 자리에서 독서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말 특이한 젊은이었다. (p60)


이 책은 아직 60페이지밖에 읽히지 않은 주제에 마구 컴퓨터로 달려와서 재미있는 구절을 기록해두고 싶게 만든다. 깊은 성찰으로부터 거둘 수 있는 가장 값진 수확물은 바로 유머가 아닐까. 기록하면서 또 알베르토 망구엘의 한마디가 떠오른다. 

우리는 작가가 쓴 게 아니라 우리가 읽고 싶은 것을 읽는다. [독서일기] 中


*덧- 
참고로 헨리 제임스는 서머싯 몸에게 비웃음(??)을 샀을지언정 두 아들에게 이런 멋진 편지를 쓴 작가란다. 

지적인 십대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삶이라는게 소극(笑劇)이 아니라는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심지어 점잖은 코미디조차 아니고, 그러기는 커녕 존재의 뿌리가 뻗어나간 본질적인 기근의 더없이 심오한 비극적 깊이에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 말이다. 정신적인 삶을 구가할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물려받게 되는 유산은 늑대가 울부짖고 음탕한 밤새들이 지저귀는, 정복되지 않은 숲이란다. [독서일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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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1-01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망 좋은 방]은 재작년인가 암튼 읽었더랬어요. 포게터블님 다 읽고 나면 어땠는지 얘기해주세요. 면도날 강추 넣어야겠네. 뽀게터블님 저한테 땡스투 받는거 즐기시는구나. 그쵸? ㅎㅎ

Forgettable. 2010-01-02 11:16   좋아요 0 | URL
역시 벌써 읽으셨군요. 저도 궁금해요. 괜찮으면 E.M포스터 전집을 노려보려구요. 추천받은지 1년이 넘었는데 이제야 읽으려 하다니;;;

[면도날] 제가 써놓은 글귀가 다락방님께도 괜찮았나봐요?? 순전히 호기심에 다시 도서관에 들러서 청년이 아직도 책을 읽고 있는지 확인해보는 화자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요 전 ㅠ ㅋㅋㅋ

다락방님의 땡스투덕분에 제 삶이 풍요로워졌잖아요. ^^

2010-01-02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2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5 0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