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고모 사이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고개를 돌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자기 마음이 동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도록 ...  
   

까지 읽었을 때 고속버스의 조명이 꺼졌다.  

정말로 누군가 책을 읽어줬던 적이 없냐며 그 사람은 조근조근, 약간은 무거운 목소리로 어느 책의 프롤로그를 읽기 시작했었다. 그게 왠지 참 고마워서 약간은 상기된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도 책을 꺼내어 속으로 몇번이나 되뇌이던 구절을 읽어 주던 중이었다.  

가로등 불빛에도 의지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져서 아쉬웠지만 다음을 기약했다. 침묵을 깨고 문득 [초속 5cm]를 봤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난 그 애니메이션에 대한 찬사를 내뱉으며 미리 본 작품이라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벚꽃이 내리는 속도가 초속 5센치 라잖아요. 이 감독의 다른 작품들도 본적 있어요? 나는 다른 작품들도 참 좋았어요. 신카이 마코토는 모든 작품을 혼자서 작업하는데, [초속 5cm]는 처음으로 스탭과 자본이 많이 투입된 작품이래요... 

그 사람의 설명을 듣고 있는데, 창문 밖으로 희끗희끗 눈이 내린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가로등의 빛에 반사되어 벚꽃처럼, 거짓말처럼 예쁘게 내리는 눈을 보며 우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 나는 눈이 '내린다'는 것은 조금 잘못된 단어 선택이 아닐까 생각했다. 눈은 앞에서 뒤로 흐르거나 분수처럼 뿜어져나와 흩어지는데 앞으로 눈이 내린다는 말을 쓰지 않고 눈이 흐른다, 눈이 솟아 나온다 라는 말을 사용하면 어떨까 잠시 고민했다.  

- 첫눈에 얽힌 즐거운 추억이 있나요? 라고 내가 묻자 그는
- 응. 오늘이에요, 라 답했다.  

나는 우리가 마치 오래된 연인이었던 것처럼 그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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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8 1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28 1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0-02-22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림처럼 그려지는 이 선명함이라니!

대화를 보니 뽀님이 그날 버스안에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누구의 어깨에 기댔는지 다 알겠어요. 므흣 :)

Forgettable. 2010-02-23 11:11   좋아요 0 | URL
어이쿠, 저 비밀댓글의 당사자가 얼마전 신카이마코토 포스팅만 하지 않았더라도 완전범죄였는데 말입니다. ㅋㅋㅋ
픽션입니다, 픽션.. 에헴;

2010-02-23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0-02-23 11:55   좋아요 0 | URL
이런 바보같은 사람들!!

2010-02-23 1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