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그인 2009-10-09  

오늘 훈블이가 한 생각을 읽고, 댓글을 달려고 보니까 닫혀있길래 방명록에다 적어요. 남얘기 같지 않아서. -_-
언제나 관계의 시작은 희망차고 밝기만 해요. 그리고 그 시작이 좋은 만큼 마음을 여는 속도는 빨라져요. 그런데 사람이 부처가 아니고서야; 무소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해서 그 사람에게 기대나 애정을 갖게 되는 이상 그 기대나 애정을 충족시키는 일은 어려워만 지고, 결국 실망하고 상처받는 일밖에 남지 않게 되더라고요.
절대공식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그랬어요. ㅠㅠ

대학때(21~22세) 뒤늦게 만나게 된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마음이 잘 맞아서 왜 이제야 만났느냐며 급친해졌거든요. 당시의 내 인간관계에서는 그렇게 마음이 잘 통하는, 마음 둘만한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더 이 친구를 좋아하게 되었죠. 그렇게 이 친구에게 사진도 전도시키고, 마음을 마구 쏟아부으며 훈훈하게 지냈었는데, 그렇게 좋아했던 이 친구가 어느날 함께 점심을 먹고 들어간 오후수업 강의실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불쾌하고도 이기적인 행동을 했어요. 수업이 곧 시작되는 바람에 수업 내내 이 친구의 행동에 대한 물음표가 머리를 가득 메운 상태로 두 시간을 보내고는 나와서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나는 울면서 집에 갔어요. 그 친구에게 마음을 의지하고 있었던 만큼 충격과 상처가 컸던;; 화창한 봄날의 오후였는데 눈물이 막;; 일기에도 그날사진이 있죠;
집에 와서 아는 언니한테 이 얘기를 해줬더니 그 언니가 그러대요.
"아무리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사람은 누구나 다 혼잔기야." -_-
그때 그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몰라요.

이 얘기를 왜 하는 거냐면; 내가 체념이란 걸 자기보호 수단으로 삼게 된 큰 계기였기 때문이에요.
그 이후로 관계에 있어서 의식적으로라도 기대를 버리려고 하고, 되도록이면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두려고 했어요.
처음엔 아무리 노력해도 누군가에게 일어나는 호기심과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기대는 상처를 몇 차례 되풀이시켰죠.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계속 애를 쓰다보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체념이라는 게 습관처럼 몸에 배이게 되더라고요.
집착해서 내 자신을 괴롭히며 좀먹는 일, 실망하고 상처받는 일, 소유욕 같은 게 점차 사라졌어요. (쓰고보니 약장수-_-)
자아와 자기애가 강했던 것이 그 체념을 담백하고 건강한 체념으로 만들어준 게 아닌가 생각 들어요.
훈블이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만큼이나 자기 자신을 좋아한다면 그렇게 상처받을 것 없어요.

기대보다 체념을 하게 되면 좋은 점이, 기대는 작은 것에도 쉽게 실망하게 되지만, 체념은 작은 것에도 크게 기뻐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강추할만한 거라고는 못하겠고-_-; 그냥 이런 효과도 있더라, 하는 거예요. 하지만 체념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진정한 무언가를 갈망한다능.

나는 코 블로그에서 훈블이한테 처음 댓글 달 때도 체념하면서 달았어요;
기대하지 않았던 훈블이의 호의에 기분이 째졌었고요.
겸손한 체념을 곁들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훈블이 자신을 사랑하라능.
믿슙니까?

 
 
2009-10-10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항상 체념하며 산다능... 어떤 결과를 기다릴 때,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고 있으면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미신을 가지게 된 후부터 늘 부정적인 생각만 하고 사는데, 과연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긴 하던데, 그것을 효험이라고 봐야할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럴 일이 없었다고 봐야할지 조심스러워요. 어쨌든 평소 컨디션이 바닥을 기게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다지 좋은 마음가짐이 아닌 것 같은데, 미신이 두려워서라도 그냥 이렇게 사네요; 그건 그렇고, 브리쥬님의 말은 날카로운 거 같아요. 마음 속 어딘가에 던져 두었던 근사값들이, 브리쥬님 글을 통해서 다들 제자리를 찾게 되는 기분이랄까; 살다보면, 어떤 현상에 대해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생각보다 몹시 드물다는 사실에 종종 놀라곤 하는데(그래서 요즘엔 티비에서도 분명히 사람이 한국말을 하는데도, 밑에 자막을 펼쳐놓더라구요), 그래서인지 브리쥬 님의 통찰력이 부럽네염;

2009-10-10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그런데 남의 방명록에 이렇게 댓글 달아도 되나요? 전 이제껏 방명록은 개인의 공간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보이니 저도 모르게 클릭했네요;;;

Forgettable. 2009-10-11 17:13   좋아요 0 | URL
그럼요, 언제나 열려있어요. 언제든지 사용해주세요 ㅎㅎㅎ

코님, 아직 어린데.. 참 경험해야 할 것도 많고, 받아야 할 상처도 많은데, 벌써부터 그렇게 무뎌지는 건 좀 마음이 안좋아요. 보면 감수성도 참 풍부하고 그런데,,
마음 속 근사값이 제자리를 찾는다는 표현 참 좋다. 브리쥬님은 능력자- 저도 그런 생각 했었거든요. 참 표현능력이 좋으신듯! 코님의 능력은 의도치 않은듯한 유머감각 정도? ㅎㅎ

2009-10-11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