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속삭임 - 합본개정판
기시 유스케 지음, 권남희 옮김 / 창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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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이 말했다. 

   
 

똑똑한 사람들은 어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야 하는가,
그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얻는다.

 
  - 보통이 설명해주는 몽테뉴의 이론 中 -

기시 유스케는 분명 '그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은 아닐지언정, 똑똑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이 사람의 작품을 2번째로 읽었는데, 이 작가의 노력에 매번 경탄을 금하지 못한다. 작가의 천재성에 감탄을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작품에 담긴 노력에 감탄을 하는데 어느정도로 감탄을 하느냐면 중고샵에 이 작가의 책을 파는 것은 작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소장할 정도로 탄성해 마지않는다. 

첫번째로, 그의 정보 수집능력.
기생충에 전혀 문외한인 내가 들어도 어려움 없이 들을 정도로 초등학생에게 설명해주듯 쉽게 설명해주지만, 그와 관련된 방대한 정보를 쉽게 다루지도 않는다. 불가능해보이는 일을 정보를 바탕으로 실재로 만들고 독자들은 reality와 fiction을 혼동하기 시작한다. 그곳에서부터 그만의 독자적인 공포가 탄생한다.  

다양하고 깊은 지식이 모여 있기 때문인지, 그의 작품은 놀라울만큼 간결하고 깔끔하다. 공포/호러/미스터리라고 하기엔 과장도 없고 그저 fact의 나열인 것마냥 작가 특유의 분위기도 없는 것 같다. 사실 이때문에 [천사의 속삭임]이 더 무섭다. 평범한 도로를 걷고 있는데 절벽으로 가는 것만 같은 두려움이 은근슬쩍 든달까, 안에 담긴 작가의 무심함이 두렵다. 

두번째로, 그의 스토리텔링.
그의 공포는 철저한 인간탐구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부적응자, 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사람들, 바로 우리 옆집 사람들을 이해하고, 이해한 바를 철저하게 이용하여 독자의 공포심을 건드린다. 독자는 대중이기도 하면서 개인이라, 쉽게 반응하지 않을 것 같지만 의외로 사소한 것에 의표를 찔려 소스라친다, 예를 들어 거미나 황산, 오염된 물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을 그가 어떻게 이용해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지를 확인하려면 마음을 열고 책을 봐야 할 것이다. 흔한 소재라고 다 같은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것은 아니니까 흔한 헐리우드 소재라는 혹평에 귀를 기울이지 말것. 

세번째로, 그의 철학.
철학이 무엇인고 하니,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한다.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앞으로 누군가 철학 어쩌고 운운하며 잘난체 한다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철학이라 생각하고, 자기만의 생각에 빠지면 될 것이다. 기시 유스케의 [신세계에서]를 읽으며 놀란 것은 그 어느 스승보다도 내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줬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기시 유스케의 작품 외에 프란츠 파농의 저작을 읽을 때와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읽을 때가 가장 최근의 경험이었는데 한 문장, 혹은 한 문단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날개를 달고 지구 한바퀴를 돌고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혹 이런 대가들에 감히 어떻게 기시 유스케를 갖다대냐고 한다면 난 왜안되냐고 싸울 자신도 있다.  

이 사람이 던지는 화두는 여느 윤리학 서적의 이론적인 질문들보다 더 날카롭고 실제적이다. 뒷 내용이 너무너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인데도 순간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단상들은 뇌를 자극하고, 내가 생각해보지 않았던 방식으로 생각해보는 재미에 책을 잠시 떨구고 '딴생각'을 하게 만든다. 텍스트에 질질 끌려가는 보통의 경험과는 아주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천사의 속삭임]이 매우 무섭고 공포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고, 그의 새작품을 기다린다. 그의 작품은 일단 손에 들면 무서워서 놓고 싶어도 감성보단 이성을 자극하는 묘미가 즐겁고, 그때문에 읽고 싶어도 손이 잘 안가는 호러물과는 달리 다시 한 번 더 읽어볼 생각이 든다.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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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09-09-16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별다섯개짜리다..ㅎㅎ '천사'들어가는 책에 살짝 질려있는 내게 '천사'가 들어가는 별 다섯개짜리 책을 소개하다니 넘해요...ㅠㅠ

Forgettable. 2009-09-16 21:51   좋아요 0 | URL
음- 그 천사랑은 좀 달라요. ㅋㅋ 비슷할려나? 다시 생각의 나래를 펼치고.. +_+
이거 괜찮아요. 난 천사의 게임보다 나았던 것 같아요. 천사의 게임은 다 끝내셨어요?ㅋ

뷰리풀말미잘 2009-09-16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과 뽀님의 뽐뿌페이퍼를 보고 최근에 질렀는데 아직 몇장 넘기지는 못했습니다. ㅎㅎ 기대되는 리뷰네요.

Forgettable. 2009-09-16 21:53   좋아요 0 | URL
미잘님.
저 겁도 많고요, 벌레공포증도 있어서 더 무서워했는데; 너무 기대하며 읽진 말아주세요.
어떤 책이라도 기대감에 부풀어 읽기 시작하면 실망해요^^

하이드 2009-09-16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쓰셨네요. 추천!

사실 기시 유스케의 작품중 가장 재미있는 <신세계에서>와 <천사의 속삭임>을 읽으셨으니, 다음 작품을 읽으라고 권해야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전체적인 작품성과 호러는 떨어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검은집>이나 <유리망치> <푸른불꽃>(이 작품은 의외로 매니아가 있더군요), 그리고 최근에 나온 데뷔작 <13번째 인격>까지 나쁘지 않았어요, 아니, 좋았어요. 어떻게 보면 흔해진 소재들을 가지고도 말대로 생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들어요.

Forgettable. 2009-09-16 21:57   좋아요 0 | URL
네, 꾸준히 보려고요. 사실 이 리뷰는 우리 대화 덕분에 계속 맴돌던 생각들이 자리를 잡아서 쓰게 된거지, 아니었음 그냥 맴돌다 말았을 거에요. ㅎㅎ
검은집은 잘 모르겠고, 일단 [푸른 불꽃]을 다음 타겟으로 정했어요 :) 교고쿠 나쓰히코의 전작들도 읽어야 하는데 ㅋㅋ

암튼 언제나 좋은작품 소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