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93
정승우 지음 / 책세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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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다이제스트가 가진 필연적인 한계를 논외로 치자면, 이 책은 신학생(성서학의 기본적인 언어들을 숙지한 2학년 이상에게)들에게 좋은 개론서이다. 덧붙여서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라는 제목보다는 다른 제목을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저자는 애초부터 예수가 역사적 인물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그것을 현재화시키기 위해서 어떠한 접근을 해야하는지를 상술해놓고 있기 때문에 '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라기보다는 '역사적 예수를 찾아서'와 같은 제목(이 제목은 너무 상투적이지만)을 붙이는 것이 더 적합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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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지대 고라즈데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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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안전지대 고라즈데'는 여러모로 (김규항이 했던 의미에서의) 불편한 책이다. 사코는 '팔레스타인'에서 보여주었던 그만의 시각으로 보스니아 내전 중에서도 사람들의 뇌리에서 쉽게 사라졌던 고라즈데라는 도시에서 벌어진 일을 다룬다. '쉽게 기억속에 사라진 도시'의 이야기를 다시 꺼냄으로써, 아주 간편하게 보스니아 내전을 정의내리려 한 사람들의 의식을 환기하는 한편, 그것을 다양한 포커스로 전개시켜나감으로써 사람들에게 전쟁 속의 삶에 대해서 다시 한번 성찰하게 한다.





 
 
 
 
 
 
 

 
 
 
 
 

 

'고라즈데'의 컷 중 하나


2.사코는 (팔레스타인에서도 느낀바지만)매우 영리한 작가이며, 기본적으로 자세가 된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편파적일 수밖에 없는' 이 글의 당파성과 그 글을 쓰고 있는 작가 자신의 우월한 위치에 대해서 자각하고 있고, 그것을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에 집어넣는다.(p146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그는 그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통상 전쟁보도라 불리는 여타 방송들의 전쟁취재현실, 중립을 가장한 UN의 안이한 태도에도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대고 있다) 그가 '영리하다'라고 판단한 이유는 그가 취한 만화의 구성방식 때문이다. 만화는 전체적으로 시간순, 그러니까 그가 고라즈데를 취재하는 시간을 따르고 있지만, 종종 인터뷰어들의 에피소드를 다룰 때는 그 에피소드가 벌어진 상황을 그려내어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때문에 독자들은 그가 취재하는 상황 속에 있는 것을 추체험할 수 있다. 그 속에서 현실성은 극대화되며, 거기에 곁들어지는 사코의 담담한 어조의 문체와 종종 선보이는 시니컬한 유머는 더 효과적으로 발휘된다.

3.'안전지대...'는 또한 민족주의라는 보이지 않는 신기루에 의해,  얼마나 사악한 일들이 자행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리포트이기도 하다. 한 가지 궁금한 것. 이 책 속에서 종교지도자들은,그리고 세르비아계와 보스니아계 사람들의 종교 생활은 기이할 정도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은 민족주의가 낳은 참상이며, 거기서 '민족'이라는 것은 혈연이라기 보다는 종교공동체의 성격이 더 강한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너무나 예민한 문제여서 사코가 부러 제외시킨 것일까. 전쟁 속에서 종교가 가진 '힘'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소소하기 짝이 없어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UN이나 미국을 포함한 강대국들의 역겨운 '중립'이상의 '중립적인 태도'를 보여줘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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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06-02-28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리뷰 축하드려요.^^*

Viator 2006-02-28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편지와 순교록 교부문헌총서 12
폴리카르푸스 지음, 하성수 옮김 / 분도출판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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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폴리카르푸스 :편지와 순교록 은 폴리카르푸스(개신교쪽에서는 '폴리캅'이라고 지칭한다.)가 직접 쓴(혹은 그렇다고 추정되는) '스미르나(개신교쪽에서는 '서머나'라고 지칭한다.)의 주교이며 거룩한 순교자인 성폴리카르푸스가 필립비(개신교쪽에서는 '빌립보'라고 지칭한다.)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그의 순교록을 담고 있다. 폴리카르푸스의 순교록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서인데, 판본이 여러개 있고,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첨부가 있었기 때문에 폴리카르푸스 당대 배경을 온전히 추론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고로 '가장 오래된 문서'라는 타이틀 이외에 남는 것이 없다고 평가받는다.)

2.그렇다고 두 개의 텍스트, 특히 '서신'과 같은 경우에는 신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띄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곤잘레스와 같은 경우에는 이 폴리카르푸스의 서신은 어디까지나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의 진정성을 밝혀 준다는 점에서만 서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 같다.

3.그리하여 '서신'과 '순교록'을 분리시켜서 연구하는 게 일반적인 경향인 듯 싶은데, 개인적으로 이것은 지나치게 문헌학적으로만 바라보거나, 교리사의 시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닌 가 싶다. 서미르나라는 공간아래, 폴리카르푸스라는 인명을 걸고 있지만 두 개의 서신은 분명한 거리감을 갖는데, 이 '거리감'의 원인을 찾는다면 다르게 보게 되지 않을까. 나와 같은 경우에 관심이 가는 것은 순교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전과 일어나고 있는 혹은 일어난 후의 기독교 공동체의 예수 인식의 차이점이다. 

일단 '서신'을 보면,

예부터 알려진 여러분 믿음의 견고한 뿌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열매를 맺는다는 솟긱을 듣고 나는 기뻐하였습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음까지 참아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데스의 진통을 풀어주시고 그분을 일으키셨습니다.(p51)

이 부분에서 눈에 띄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데스의 진통을 풀어주셨다'라고 하는 것이다. 하데스는 익히 알려진데로,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옥의 신인데 여기서 나는 그레코로만 문명 아래 있는 기독교인의 구원인식, 좀 더 나아가서는 유대교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기독교의 모습을 읽는다. 폴리카르푸스는 유대인이 아니며, 따라서 이들에게 메시아 사상이라는 것은 이들의 사유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에게 존재하는 것은 죄의 현실인데, 이들은 이것을 '하데스'로 대표되는 악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예수는 바로 그 악에 기원한 죄의 사슬을 풀어낸 자이고, 그러한 면에서 유대계-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던(과도기라 할 수 있는 바울의 서신까지 유지되었던) 예언-성취의 도식은 서서히 희미해진다. 5~7장까지 이어지는 교회의 구성원들에 대한 권면은 언뜻 신명기사가의 글을 연상시킬 정도로 '순결' (흠없음)을 강조하지만, 그러한 윤리를 끌어내는 동기는 결코 구약에서 처럼 집단의 역사적 경험에 있지 않다.(젊은이와 처녀를 구분하고 있다는 것은 특이할만한 사항인데, 이부분을 다루는 것은 이 텍스트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적 경험의 부재. 이것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예수의 역사적 실존조차 회의하게 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주된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마저 부정된다면, 기독교의 의의는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폴리카르푸스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7장에서 그는 강하게 경고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오신 것을 고백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정녕 반그리스도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있은지 불과 100년도 채 안되었지만, 그 후 수없이 논란이 되는 예수의 역사적 현존 문제는 이 때부터 존재했고, 시간이 흐를 수록 점차 확대된다.

4.'순교'의 경험은 그러한면에서 이런 논란을 불식시키는, 혹은 '가현설'적인 흐름을 잠식시킬 수 있는  일대 사건이었을 것이다. '순교록'을 보면, 폴리카르푸스의 순교과정을 예수의 수난과 비슷하게 전개시켜 나가고 있는데, 이는 예수의 역사적 현존을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각인시키려는 아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폴리카르푸스의 '서신'이 상대적으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는 요한복음의 영향권 아래 있다는 것으 상기하면 주목할만한 변화이다.)  이것은 그 후기에도 마찬가지의 용도로 사용되는데, 마르치온을 등장시킨 '러시아 판본의 맺음말'을 보면 그것이 확인 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순교가 '구원의 증표'로 부각됨에따라 자기구원을 이루기 위해 순교를 당하고야마는 일들이 생기는 것이다. 또한 순교를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고백을 부정하는 케이스 또한 발생했다. 이것은 순교라는 공동의 역사적 경험 이후의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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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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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에서 조지오웰까지'의 번역자이기도 한 박상익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의 번역현실에 대한 담담한(이것은 상대적이다.  인터넷상에서 일어난 다양한 견해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이 책은 '부드러운 편'에 속한다고 보는데(번역문제를 다룬 강대진의 '잔혹한 책읽기'와 비교해도 그렇다.)  이러한 사안을 접하지 못한 독자들이 봤을때는 어떨지 모르겠다.) 보고서를 써냈다. 번역의 역사, 번역자의 조건과 같은 내용을 포함시키기도 했지만(이런 '번역'을 테마로 한 다양한 글은 이 책의 장점과 동시에, 단점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목적이 학문적인 글쓰기가 아니라, 대중적인 글쓰기므로 장점으로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결국 크게 '번역의 가치에 대한 역설' 이며 그러한면 에서 책의 서문과 끝은 이 책의 핵심이다.

여건이 허락하지 않건, 때가 오건 오지 않건, 해야 할 일이라면 누군가는 해야 한다. 무지와 야만의 바다에 외로이 떠 있는 섬과도 같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목표를 추구하며, 사라질 위기에 처한 지식을 구했던 중세 유럽의 수도사들처럼 헌신해야 하는 것이다. (서문 중)

1.번역은 한국어 사용권에 존재하지 않는 텍스트를 존재하게 만드는 가치 있는 행위이다. 그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다. 좋은책 한권을 번역한다는 것은, 한국사회라고 하는 거대한 동굴에 등불 하나를 밝히는 일과도 같다. 좋은 번역서 한 권이 국회의원 한 명의 4년 임기 의정 활동보다 더욱 큰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이 일에 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2.번역가는 먼저 독립적 사고 능력을 지닌 지식인이 되어야한다. '이 땅에서' 공부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학연, 지연, 정실에 의지하여 인생을 도모하려는 정신 자세로는 번역 작업을 수행해 나갈 수 없다. 오직 글쓰기 능력과 출판된 결과물에 의해서만 엄정한 평가를 받겠다는 자세로 철저한 프로 정신을 견지해야 한다. 관심 분야에 대한 꾸준한 독서를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무식유죄, 유식무죄를 잊지 말자.

3.번역가는 편집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도움을 적극적으로 요청할 줄 알아야 한다. 독립적 사고를 하라는 것은 편집자의 적절한 도움마저 뿌리치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약점 없는 인간 없듯이 결점 없는 번역도 없다.(너 자신을 알라!) 편집자는 번역가의 한계를 극복하게 도와주는 최선의 동지이며, 번역 결과물의 수준을 끌어올려주는 고마운 동료이다. 번역가의 평가는 오직 '결과물'에 의해서만 이룽진다는 사시을 다시 한번 명심하자.

4.쓰고 또 쓰고, 고쳐 쓰고 또 고쳐 쓰는, 이마에 땀 맺히는 수고를 마다하면 안 된다. 번역에는 왕도가 없다. 궁극적으로 정성이며 성의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좋은 번역어를 찾기 위해 사전 찾기를 게을리 하지 말 일이다. 일단 번역한 문장은 읽고 또 읽으면서 문장의 흐름이 제대로 이어지는지, 접속사는 적절히 사용되었는지 부단히 검토하라. 문장의 리듬을 살리기 위해 소리를 내어 읽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5.번역가는 기본적으로 독서이어야 한다. 자신만의 개인도서관을 만들어 관심 분야에 대한 책을 꾸준히 사 모으고 책 읽기를 삶의 가장 소중한 부분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인문학이란 가장 근원적으로 보자면 결국 글읽기와 글쓰기이다. 읽기없이는 쓰기가 나올수 없다. 공자는 호지자 불여락지자 라고 했다.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말이다. 좋아하는 것으로는 2퍼센트 부족하다. 책 읽기를 즐겨라.

6.낭중지추란 말이 있다. 능력과 재능 있는자는 언젠가는 인정받을 날이 오고야 만다. 번역가가 그 하는 일의 중요성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엄연한 현실이다. 아니, 번역 그 자체가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비관할 일만도 아니다. 한국 사회가 멸망하기로 작정을 하지 않은 이상 번역과 번역가에 대한 대우가 현 수준에서 머물 수는 없다. 한국은 망하지 않는다. 끝까지 정도를 걸어라. 합당한 대우를 받는 날이 올 것이다.

7.인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라면 논문 작성 과정에서 자신이 연구하는 텍스트를 읽는 데 그치지 말고 번역, 역주 작업을 동시에 진행해주기 바란다. 논문 쓰기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지만, 그렇게 해야 논문 차원을 뛰어넘어 본격적인 학술 단행본 출판으로 이어질 수 있다. 논문과 달리 출판된 책은 소수의 전문가 집단이 아닌, 국민 전체를 위한 기여가 될 수 있다. 번역, 주석 작업을 병행할 경우 필경 논문의 수준도 올라갈 것이다. 이렇게 청년 인문학도들의 개인적인 노력이 집적될 경우 그들이 중견 학자로 성장한 후에는 우리 대학원의 학풍에도 조금씩 변화가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밝혀둔다. 번역은 결코 반역이 아니다. (p226~9)
 
서문과 끝은 저자 그 자신의 번역가로서의 태도가 스며들어있음과 동시에 이러한 기본적인 덕목을 실천하지 못하는 현 출판계 관행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 그리고 미래의 번역가들에 대한 조언이 동시에 들어가 있다. 한국의 '번역 현실'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이들이 구태여 이 책을 정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이 책을 보면서 '번역이 반역이 되고 있는 현실'을 파악할 필요가 있고, 이미 알고 있는 이들은 서문과 끝 문장을 보면서 어떤 식으로 이 현실을 타개해야할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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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쁘리아누스 교부문헌총서 1
이형우 옮김 / 분도출판사 / 198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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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키프리안,치쁘리아누스(책에는 치쁘리아누스로 표기되어있다.)로 고도 표기되는 키프리아누스는 최초의 교회론의 체계를 구축한 이로 평가받고있고, 현재까지 실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부분은 그 부분과 관련해서이다. 이 책의 해제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관련 부분 헌장에서 그의 교회론이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2.분도출판사에서 간행된 '교부 문헌 총서'(이 시리즈는 국내에서 교부들의 저작을 일관성있게 내놓고 있는 유일한 기획물이며, 그 시도만으로도 높이 평가 받을만하다.) 의 첫번째 책인 이 책에서는 키프리아누스의 저작 중 3개가 실려있는데, 그의 교회론과 관련되서 관심있게 볼 저작은 '가톨릭 교회 일치'이다. 나머지 2권-'도나투스에게'와 '주의 기도문'-은 키프리안의 교회론 외의 그의 신학적 사상의 색채을 짐작케 하기 위해 배치된 듯 싶다. '도나투스에게'는 이방인 친구 도나투스에게 보내는 일종의 서신인데, 키프리아누스가 당대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고, '주의 기도문'은 그가 소위 '사도적 전승'을 어떤 식으로 파악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3.'도나투스에게'(책에는 도나뚜스라고 표기되어 있다.) 바울서신의 색체에서 크게 떨어져 있지 않다. 다만, 교회내의 구성원이 아닌 일종의 이방인에게 보내는 편지여서 그런지 기독교적인 개념을 사용하기 보다는 일반적인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고, 기독교 자체에 대해서 설명하기 보다는 기독교 밖의 현실의 추한 상을 드러내고, 그 추한 상에 순응하는 타종교들을 비판한 뒤 기독교의 진리로의 관심을 요청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는데, 하나는 키프리아누스의 실천적인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당대 기독교가 어떠한 방식으로 선교를 했는가이다.(타기독교인들의 사상을 건드리지 않고, 그들의 현실적인 모습을 비판한다는 면에서 키프리아누스는 실천적이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윤리적 청결함의 모델로서 기독교가 부각되는데, 이는 실제로 기독교가 당대 사람들에게 '종교적 대안'으로 인정받게 된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주의 기도문'은 전체적으로 평이한 주기도문 주석인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라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주해하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키프리아누스는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이 우리(기독교인)의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유대인들의 아버지가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물론 이것을 두고, 반유대주의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겠지만,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에, 마찬가지로 박해를 받고 있던 유대교에 대한 시선,혹은 유대인들에 대한 시선이 상당히 부정적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그런 면에서 공인 후에 유대인들에 대한 가혹한 박해에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이 적극 동참한 것은 '갑작스러운 태도의 변화'가 아닌 충분히 예측될 수 있는 행동이었다.)

4.뭐니뭐니 해도,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은 '가톨릭 교회 일치'일 것이다. 이 저작은 기본적으로 당시의 교회를 맡고 있던 감독이 기독교 현실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안들에 대해-영지주의자들과 같은 소종파 운동과, 배교자 문제- 어떠한 식으로 봐야할 것인지 견해를 내비치고 있다. 키프리아누스의 기본적인 신념은 각 교회는 또 다시 하나의 큰 교회로서의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신념이 바로 소종파 운동과 배교자 문제에 대한 키프리아누스의 판단의 주요 근거가 된다. 소종파 운동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운동이 교회로부터 신자들을 멀리하게 때문이고, 때문에 이들의 죄는 순교를 한다하더라도 씻을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하지만 배교자의 경우는 조금 틀린데(적어도 이들은 순교하면 천국을 약속받을 수 있다(p90), 이들이 배교를 한다고 해서 다른 이들까지 교회에,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기독교로부터 멀어지게 하지는 않는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일치, 통일이라고 해도 좋을 이 개념에 대한 그의 강한 신념은 감독권에 대한 그의 견해에도 반영되는데, 바로 여기서 학자들의 논란이 되는 '베드로의 수위권' 개념이 나온다.  곤잘레스는 '기독교 사상사1'에서 '베드로 수위권'혹은 '감독 수위권'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교회의 통일성은 감독권(episcopate)에 있다. ...감독권은 하나이다. 이것은 모든 감독들은 "감독들의 감독"이신 한 분에게 예속되어서 계층질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 아니고, 개개의 감독은 감독권을 총체적으로 대표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각 감독은 자신의 교구를 하나로 통일된 계급제도와는 별개로 다스린다. 따라서 키프리안은 각종 행습과 관습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유연성과 관용을 보였다.  감독권의 통일을 위해서 감독들은 중요한 문제를 놓고 서로 상의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어느 감독도 다른 감독을 제어할 권한을 가지지 않는다. 감독직에 대한 키프리안의 이와 같은 연방제적 견해는 로마 교황권에 대한 그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p291~2)

이런 식으로 본다면 설령 키프리아누스가 '베드로 수위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수위권'은 기독교 역사속에서 가톨릭이 끌어낸 '교황무오설'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증거물로 봐서는 안되고, 교회의 일치를 위한 나름대로의 고민에서 나온 견해(그것도 로마교회와 카르타고 교회의 긴밀한 관계를 배경으로 하는)로 봐야한다. 그러한 면에서 '베드로의 수위권'에 대한 그간의 논란은 기실 텍스트에 대한 엄밀한 이해에 대한 논란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교회현실에 적용시키느냐에 대한 당파적 견해의 차이에서 나온 논란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5. 제2 바티칸 공의회에서 키프리아누스의 이 문헌은 베드로의 수위권에 뒷받침한 교황의 수위권 강조에 쓰이는 것이 아닌, 텍스트의 원래 목적이었던 '교회 일치'를 위해 사용되는 듯하다. 하지만 문제,오용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키프리아누스로부터 시작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는 그 뒤로 그 맥락에 대한 고려없이 번져나가 오늘날에 기독교의 '구원 독점권'을 옹호하는 대표하는 문구가 되었다. 이 점에 대해 개신교,특히 한국 개신교계의 지도자들은 아무런 반성도 하고 있지 않는 듯 싶은데,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혹은, 그들의 말에 대해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고 싶은 이들, 그리고 '교회 밖에 구원은 없다'의 기원에 대해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그 뜻이 무엇인지 곰곰이 따져보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꼭 한번 읽어 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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