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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쁘리아누스 ㅣ 교부문헌총서 1
이형우 옮김 / 분도출판사 / 1987년 7월
평점 :
1.키프리안,치쁘리아누스(책에는 치쁘리아누스로 표기되어있다.)로 고도 표기되는 키프리아누스는 최초의 교회론의 체계를 구축한 이로 평가받고있고, 현재까지 실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부분은 그 부분과 관련해서이다. 이 책의 해제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관련 부분 헌장에서 그의 교회론이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언급하고 있다.
2.분도출판사에서 간행된 '교부 문헌 총서'(이 시리즈는 국내에서 교부들의 저작을 일관성있게 내놓고 있는 유일한 기획물이며, 그 시도만으로도 높이 평가 받을만하다.) 의 첫번째 책인 이 책에서는 키프리아누스의 저작 중 3개가 실려있는데, 그의 교회론과 관련되서 관심있게 볼 저작은 '가톨릭 교회 일치'이다. 나머지 2권-'도나투스에게'와 '주의 기도문'-은 키프리안의 교회론 외의 그의 신학적 사상의 색채을 짐작케 하기 위해 배치된 듯 싶다. '도나투스에게'는 이방인 친구 도나투스에게 보내는 일종의 서신인데, 키프리아누스가 당대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고, '주의 기도문'은 그가 소위 '사도적 전승'을 어떤 식으로 파악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3.'도나투스에게'(책에는 도나뚜스라고 표기되어 있다.) 바울서신의 색체에서 크게 떨어져 있지 않다. 다만, 교회내의 구성원이 아닌 일종의 이방인에게 보내는 편지여서 그런지 기독교적인 개념을 사용하기 보다는 일반적인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고, 기독교 자체에 대해서 설명하기 보다는 기독교 밖의 현실의 추한 상을 드러내고, 그 추한 상에 순응하는 타종교들을 비판한 뒤 기독교의 진리로의 관심을 요청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는데, 하나는 키프리아누스의 실천적인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당대 기독교가 어떠한 방식으로 선교를 했는가이다.(타기독교인들의 사상을 건드리지 않고, 그들의 현실적인 모습을 비판한다는 면에서 키프리아누스는 실천적이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윤리적 청결함의 모델로서 기독교가 부각되는데, 이는 실제로 기독교가 당대 사람들에게 '종교적 대안'으로 인정받게 된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주의 기도문'은 전체적으로 평이한 주기도문 주석인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라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주해하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키프리아누스는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이 우리(기독교인)의 아버지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유대인들의 아버지가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물론 이것을 두고, 반유대주의라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겠지만,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에, 마찬가지로 박해를 받고 있던 유대교에 대한 시선,혹은 유대인들에 대한 시선이 상당히 부정적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그런 면에서 공인 후에 유대인들에 대한 가혹한 박해에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이 적극 동참한 것은 '갑작스러운 태도의 변화'가 아닌 충분히 예측될 수 있는 행동이었다.)
4.뭐니뭐니 해도,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은 '가톨릭 교회 일치'일 것이다. 이 저작은 기본적으로 당시의 교회를 맡고 있던 감독이 기독교 현실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안들에 대해-영지주의자들과 같은 소종파 운동과, 배교자 문제- 어떠한 식으로 봐야할 것인지 견해를 내비치고 있다. 키프리아누스의 기본적인 신념은 각 교회는 또 다시 하나의 큰 교회로서의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신념이 바로 소종파 운동과 배교자 문제에 대한 키프리아누스의 판단의 주요 근거가 된다. 소종파 운동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운동이 교회로부터 신자들을 멀리하게 때문이고, 때문에 이들의 죄는 순교를 한다하더라도 씻을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하지만 배교자의 경우는 조금 틀린데(적어도 이들은 순교하면 천국을 약속받을 수 있다(p90), 이들이 배교를 한다고 해서 다른 이들까지 교회에,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기독교로부터 멀어지게 하지는 않는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일치, 통일이라고 해도 좋을 이 개념에 대한 그의 강한 신념은 감독권에 대한 그의 견해에도 반영되는데, 바로 여기서 학자들의 논란이 되는 '베드로의 수위권' 개념이 나온다. 곤잘레스는 '기독교 사상사1'에서 '베드로 수위권'혹은 '감독 수위권'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교회의 통일성은 감독권(episcopate)에 있다. ...감독권은 하나이다. 이것은 모든 감독들은 "감독들의 감독"이신 한 분에게 예속되어서 계층질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 아니고, 개개의 감독은 감독권을 총체적으로 대표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각 감독은 자신의 교구를 하나로 통일된 계급제도와는 별개로 다스린다. 따라서 키프리안은 각종 행습과 관습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유연성과 관용을 보였다. 감독권의 통일을 위해서 감독들은 중요한 문제를 놓고 서로 상의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어느 감독도 다른 감독을 제어할 권한을 가지지 않는다. 감독직에 대한 키프리안의 이와 같은 연방제적 견해는 로마 교황권에 대한 그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이다.(p291~2)
이런 식으로 본다면 설령 키프리아누스가 '베드로 수위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수위권'은 기독교 역사속에서 가톨릭이 끌어낸 '교황무오설'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증거물로 봐서는 안되고, 교회의 일치를 위한 나름대로의 고민에서 나온 견해(그것도 로마교회와 카르타고 교회의 긴밀한 관계를 배경으로 하는)로 봐야한다. 그러한 면에서 '베드로의 수위권'에 대한 그간의 논란은 기실 텍스트에 대한 엄밀한 이해에 대한 논란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교회현실에 적용시키느냐에 대한 당파적 견해의 차이에서 나온 논란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5. 제2 바티칸 공의회에서 키프리아누스의 이 문헌은 베드로의 수위권에 뒷받침한 교황의 수위권 강조에 쓰이는 것이 아닌, 텍스트의 원래 목적이었던 '교회 일치'를 위해 사용되는 듯하다. 하지만 문제,오용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키프리아누스로부터 시작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는 그 뒤로 그 맥락에 대한 고려없이 번져나가 오늘날에 기독교의 '구원 독점권'을 옹호하는 대표하는 문구가 되었다. 이 점에 대해 개신교,특히 한국 개신교계의 지도자들은 아무런 반성도 하고 있지 않는 듯 싶은데,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혹은, 그들의 말에 대해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고 싶은 이들, 그리고 '교회 밖에 구원은 없다'의 기원에 대해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그 뜻이 무엇인지 곰곰이 따져보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꼭 한번 읽어 볼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