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와 순교록 교부문헌총서 12
폴리카르푸스 지음, 하성수 옮김 / 분도출판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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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폴리카르푸스 :편지와 순교록 은 폴리카르푸스(개신교쪽에서는 '폴리캅'이라고 지칭한다.)가 직접 쓴(혹은 그렇다고 추정되는) '스미르나(개신교쪽에서는 '서머나'라고 지칭한다.)의 주교이며 거룩한 순교자인 성폴리카르푸스가 필립비(개신교쪽에서는 '빌립보'라고 지칭한다.)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그의 순교록을 담고 있다. 폴리카르푸스의 순교록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서인데, 판본이 여러개 있고,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첨부가 있었기 때문에 폴리카르푸스 당대 배경을 온전히 추론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고로 '가장 오래된 문서'라는 타이틀 이외에 남는 것이 없다고 평가받는다.)

2.그렇다고 두 개의 텍스트, 특히 '서신'과 같은 경우에는 신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띄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곤잘레스와 같은 경우에는 이 폴리카르푸스의 서신은 어디까지나 이그나티우스의 서신들의 진정성을 밝혀 준다는 점에서만 서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 같다.

3.그리하여 '서신'과 '순교록'을 분리시켜서 연구하는 게 일반적인 경향인 듯 싶은데, 개인적으로 이것은 지나치게 문헌학적으로만 바라보거나, 교리사의 시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 아닌 가 싶다. 서미르나라는 공간아래, 폴리카르푸스라는 인명을 걸고 있지만 두 개의 서신은 분명한 거리감을 갖는데, 이 '거리감'의 원인을 찾는다면 다르게 보게 되지 않을까. 나와 같은 경우에 관심이 가는 것은 순교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전과 일어나고 있는 혹은 일어난 후의 기독교 공동체의 예수 인식의 차이점이다. 

일단 '서신'을 보면,

예부터 알려진 여러분 믿음의 견고한 뿌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열매를 맺는다는 솟긱을 듣고 나는 기뻐하였습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음까지 참아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데스의 진통을 풀어주시고 그분을 일으키셨습니다.(p51)

이 부분에서 눈에 띄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데스의 진통을 풀어주셨다'라고 하는 것이다. 하데스는 익히 알려진데로,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옥의 신인데 여기서 나는 그레코로만 문명 아래 있는 기독교인의 구원인식, 좀 더 나아가서는 유대교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기독교의 모습을 읽는다. 폴리카르푸스는 유대인이 아니며, 따라서 이들에게 메시아 사상이라는 것은 이들의 사유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들에게 존재하는 것은 죄의 현실인데, 이들은 이것을 '하데스'로 대표되는 악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예수는 바로 그 악에 기원한 죄의 사슬을 풀어낸 자이고, 그러한 면에서 유대계-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던(과도기라 할 수 있는 바울의 서신까지 유지되었던) 예언-성취의 도식은 서서히 희미해진다. 5~7장까지 이어지는 교회의 구성원들에 대한 권면은 언뜻 신명기사가의 글을 연상시킬 정도로 '순결' (흠없음)을 강조하지만, 그러한 윤리를 끌어내는 동기는 결코 구약에서 처럼 집단의 역사적 경험에 있지 않다.(젊은이와 처녀를 구분하고 있다는 것은 특이할만한 사항인데, 이부분을 다루는 것은 이 텍스트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사적 경험의 부재. 이것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예수의 역사적 실존조차 회의하게 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주된 요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마저 부정된다면, 기독교의 의의는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폴리카르푸스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7장에서 그는 강하게 경고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오신 것을 고백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정녕 반그리스도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있은지 불과 100년도 채 안되었지만, 그 후 수없이 논란이 되는 예수의 역사적 현존 문제는 이 때부터 존재했고, 시간이 흐를 수록 점차 확대된다.

4.'순교'의 경험은 그러한면에서 이런 논란을 불식시키는, 혹은 '가현설'적인 흐름을 잠식시킬 수 있는  일대 사건이었을 것이다. '순교록'을 보면, 폴리카르푸스의 순교과정을 예수의 수난과 비슷하게 전개시켜 나가고 있는데, 이는 예수의 역사적 현존을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각인시키려는 아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폴리카르푸스의 '서신'이 상대적으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는 요한복음의 영향권 아래 있다는 것으 상기하면 주목할만한 변화이다.)  이것은 그 후기에도 마찬가지의 용도로 사용되는데, 마르치온을 등장시킨 '러시아 판본의 맺음말'을 보면 그것이 확인 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순교가 '구원의 증표'로 부각됨에따라 자기구원을 이루기 위해 순교를 당하고야마는 일들이 생기는 것이다. 또한 순교를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고백을 부정하는 케이스 또한 발생했다. 이것은 순교라는 공동의 역사적 경험 이후의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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