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계
장아이링 지음, 김은신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그녀가 소곤거리듯 외쳤다.
"어서 가요!"
잠시 어리둥절하던 그가 곧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출입문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렸다. 입구에 사람이 없긴 했지만 달려나가면서 바로 어둡고 비좁은 계단 난간을 잡으려면 문기둥을 잡고 돌아나가야만 했다. 연거푸 몇 개의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 내려가며 울리는 쿵쿵 소리가 그녀의 귀를 때렸다. - p.59


여자는 남고, 남자는 달아났다. (그리고)
도로는 봉쇄되고, 여자는 도로에 갇혔다.

동명의 소설을 각색, 감독한 이안 감독의 영화《색,계》를 보고 난 후 계속 궁금했다.
"어서 가요!" 여자의 말을 들었을 때, 혼자 달아날 때, 여자의 처형을 묵인할 때, 남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서 가요!" 남자에게 그 말을 할 때, 홀로 인력거를 탈 때, 흔들리는 인력거 위에서 거리가 봉쇄되는 것을 보면서, 여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상대방의 사랑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사랑이 산산히 부서지는 순간을 맞이한 여자와 남자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궁금했다.

『색, 계』는 영화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그 인기를 배경으로 주목을 받게 된 소설로 국내에 출간된 장 아이링의 다른 책이 그렇듯 이 책 역시 7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 단편집이다 (다만, 첫번째 수록작「망연기」는 소설이 아니고 작가의 짤막한 작품 소개글이다).

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연극과 현실 속에서 진행되는 실제 삶의 다른 점은 '내가 아닌 남의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반면 연극과 실제 삶의 공통점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역할을 맡고 있으며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야 하는 책임을 가진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의 딸, 누구의 친구, 누구의 상사 혹은 직원, 누구의 이웃 등등...
그러므로 연극에서 막이 내리는 것과 인생이 종착역에 다다르는 것은 어떤 점에선 같은 의미를 지닌다. 연극이든 삶이든 어느 한 쪽이 끝나는 순간, 그(녀)는 자신이 맡았던 역할과 함께 소멸되어 진다. 하물며 실제 삶이 연극이 되어 버린 이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소설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그러니까 영화에선 볼 수 없었던 그들의 이야기인데, 여자는 모든 것을 '끝내려는' 순간 남자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느끼고, 남자는 모든 것이 '끝난' 순간 여자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구나 생각하는 부분이다. 그럼 그들은 자신의 마음은 어디에 두었을까.

영화는 많은 여운과 해석을 낳게 했으나 의외로 소설은 짧은 길이만큼이나 서사가 단순하게 다가온다. 사실 소설『색,계』는, 그녀의 다른 소설집『경성지련』『첫번째 향로』도 그렇지만, 읽고 났을 때 썩 만족스럽지는 않다. 그녀의 소설을 읽다 보면 끝내 집을 뛰쳐나가지 못한 노라의 정서가 느껴진달까, 그런 면에서 전근대 격동기를 살아내는 여성을 지면 속에서 다루는 힘은 여성 작가인 장아이링보다 오히려 남성 작가인 쑤퉁 쪽이 한결 노련해 보인다. 시대를 거스르지도, 시대에 순응하지도 못한 못한 작가의 재능에 연민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참고로『색,계』의 단편 목록 중에선 동명인「색,계」가 가장 낫다.

원작인 소설보다 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영화가 더 좋았던,『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과『색, 계』의 공통점은 영화 말미의 시퀀스가 소설과 다르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원작과 별개로 감독이 자신만의 해석을 덧입히는 것인데 감독의 이러한 재해석으로 이들 두 영화는 원작과 또다른 독자적인 서사를 가지게 되고 원작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된다.    

덧.
남자가 달아난 후 혼자 거리로 나와 인력거에 탄 그녀가 인력거꾼에게 가자고 한 곳은 친척이 사는 '위위엔루'인데 '위위엔루'의 한자가 '愚園路'(우원로)이다. 이것이 실제 지명인지 작가의 의도적인 작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번역되어진 것보다 장아이링의 문장이 한층 은유적이고 다층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찜찜함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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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옛적 한 신앙이 돈독한 영주가 살고 있었다. 어느날 파수병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오며 홍수가 났다고 보고했다. 그 영주는 얼른 성당으로 가서 신에게 구원을 빌었다. 곧 물은 성당계단까지 밀려 왔다.
그때였다. 한 농노가 조그만 나뭇배를 저어오며 영주에게 타라고 재촉했다. 영주는 말했다. "고맙지만 괜찮네. 나는 신을 믿고 또한 정의를 믿네. 신이 나를 구원해 줄걸세." 그러는 사이 물은 점점 차올라 왔고 영주는 설교단 위로 몸을 옮겼다.
이때 갑자기 모터 보트 한 척이 물살을 가르며 나타났다. "영주님, 어서 뛰어 오르세요." 그러나 고결한 영주는 고개를 저었다. "걱정말게. 난 신을 믿네. 내게 시끄러운 기계 따윈 필요치 않아." 마침내 물은 성당 전체를 삼켜버렸다.
영주가 가까스로 성당 꼭대기의 첨탑 하나를 거머쥐었을 때 세찬 바람에 물살이 갈라지더니 머리 위로 헬리콥터 한 대가 나타났다. 조종사가 외쳤다. "영주님, 제발 이 줄사다리를 잡고 올라오십시오." 영주는 외쳤다. "걱정말게. 난 아직도 신을 믿네. 그분이 나를 구해 주실 거야." 얼마 후 물은 불어나 영주는 익사했다.
영주는 천국에서 신을 만났다(그는 착한 영주였던 모양이다.) 영주는 항의했다. "신이시여, 저는 당신을 일생 동안 숭배했습니다. 성직자들의 말씀을 하나도 어기지 않았고, 다른 이들이 당신을 의심하여 기계에 의지할 때에도 저는 끝까지 당신의 구원을 확신했습니다. 어찌하여 저를 익사시키셨나이까?" 신이 되받았다. "이 멍청아! 너에게 나뭇배, 모터 보트, 헬리콥터를 보내 준 사람이 대체 누구라고 넌 생각하느냐?" - p.172,「격분한 현자 카를 마르크스」

사실, 나는 인용한 문장, '신앙심 깊은 영주' 에피소드를 작가의 의도와 전혀 다른 의도, 다른 목적으로 끌어다 인용하곤 한다.

지금도 심심하면 가끔 아무 챕터나 펼쳐서 읽는 토드 부크홀츠의『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는 학부생 때 리포트를 쓸 때 참고하려고 읽었던 책으로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비유와 만담등을 섞어가며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 경제(사)학 분야의 교양 입문서다.   

전공이 전공이니만큼 이 부문에 신간이 나오면 의무적으로라도 읽어야 할 것 같은 책임감 같은 게 있는데, 읽어야 할 책 목록의 상위에 늘 올라가 있는 마르크스의『자본론』은 그의 유물론의 핵심 내용인 '잉여 가치'를 여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로 안 읽는다기보다는 못 읽고 있는 고전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K.마르크스 역시 생전 그의 개인적인 행적을 보면 "아니, 이런 인물이 경제사적, 철학사적 분야에 그토록 크고 방대한 영향을 끼쳤단 말인가" 놀라게 된다. 하지만 다행히 역사는 인간을 심판하지 않고 그 인간의 업적을 심판하는 너그러운 잣대를 가지고 있다.  

중요한 건, 4대 성인에서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재능인데 마르크스 역시 그 재능이 있었으니 타고난 달변, 문장력, 그것을 이용한 대중적 설득력이 바로 그 것이다.

히틀러 얘기가 나온 김에, 언젠가 M군과 "지구에 멸망이 온다면 어떤 형태로 올까?" 라는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종교 분쟁이 원인이 되지 않을까" 라고 했고, M군은 "어설픈 영웅 한 사람 때문일 것 같다" 고 했다. 생각해보면 꽤 타당성이 있는 숫자다. '1'이라는 숫자 말이다. 

*『자본론』을 읽기 전, 가볍게 읽기 좋은 몇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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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지음 / 김영사on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젠 분당 초당으로 쪼개진다는 시청률에서 늘 나쁜 성적을 내면서도 마니아를 몰고 다니는 드라마 작가 노희경. 나는 그녀가 책을 낼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그리고 기다렸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연말, 아마도 마지막이 될 책 주문을 하려고 온라인 서점에 접속하고 드라마 작가 노희경의 신작 에세이 출간 소식을 봤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아, 드디어"였다. 그러고도 망설였다. 실망하면 어쩌지. 실망하면,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장바구니. 그리고 예정된 시간보다 더 일찍 내 손에 들어온 그녀의 책...

나는《화려한 시절》과《바보 같은 사랑》을 제외하곤 그녀의 드라마를 제대로 끝까지 본 것이 없다. 그녀가 만든 세계에서 사는 '그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날카로운 창 끝이 가슴을 겨누고 있는 듯 답답하고 위태로워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파묻혀 TV 너머 그들의 세상을 마냥 구경할 수 없게 만든다. 한마디로 내 여리고 보드라운 정서는 그녀의 건조하고 날 선듯한 목소리를 버거워했다. 한 주에 몇 개씩 쏟아지는 많은 작가들의 고만고만한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랑과 그녀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 왜 다른가. 그래 봤자 사랑 아닌가?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녀의 드라마는 매번 이런 내 생각을 비웃었다.

참으로 건조한 목소리로 사랑, 사랑, 지치지도 않는지 사랑 타령을 하는 작가가 당연히 궁금했다. 사랑 때문에 깊이 상처받아 "사랑 따위!" 조소하고, 상대를 저주하고, 자신을 한없이 뭉갠다 싶더니 언제 그랬나 싶게 "그래도 사랑만이 구원" 이라고, 뻔뻔하게 사랑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인물들을 날 것 그대로 보듬는 작가의 그 끈질긴 정서가 궁금했다.
한 때는 "이 작가는 로맨스랑 어울리지 않아" 단정 짓기도 했다. 지금은, 지금은 조금이지만 어쩌면 알 것도 같다. 흉내낼 줄 모르고 꾸밀 줄 모르고 부서질 줄 알면서도 온 몸으로 부딪치는 무모한 그들을 보듬는 이 사람이야말로 사랑을 얘기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드라마 작가의 에세이답구나 싶은 그녀의 첫 책『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는 작가의 치열했던 한때, 작가 자신, 사랑, 일, 주변인을 향한 사적인 고백으로 채워져 있다. 책 사이 사이에 꽂혀 있는(물론 빠지지는 않는다) 내지에 작가의 필체로 쓴 짤막한 독백이 인상적이고 간간이 등장하는 드라마 얘기는 훔쳐보기 같은 가벼운 즐거움이 있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드라마에 등장했던 독백톤의 대사들을 활자로 보니 새삼 그녀의 드라마를 소설로 읽고 싶었던 갈증이 이것 때문이었구나 했다. 
책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소설 출판을 제의하는 출판사의 전화에, "나는 드라마 작갑니다. 때문에 소설을 쓸 생각이 없습니다." (뚝!) 응대하는 장면이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내 기분은 조금 이율배반적이었는데 첫째, (보지는 않았지만)그녀의 대본이 산문적(?) 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구나 하는 거였고 둘째, 소설은 안 쓰겠다는 작가의 단언에 실망보다는 안도감을 느꼈다는 점에서 그렇고 셋째, 그럼에도 그녀의 소설이 나오면 제일 먼저 살 테다,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드라마 작가로서 자존심이 단단한 그녀. 같은 극작가로서 그녀가 영화를 보는 관점은 어떨까. 나는 그녀의 드라마로 그녀가 꽤나 현실적인 강심장을 가졌을 거라고 막연히 추측했다. 하지만 영화《화양연화》속 불륜을 바라보는 그녀의 글과 소통하면서 이젠 그녀가 참 섬세하고 로맨틱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구나 한다.

책의 마지막은 그녀와 작업했던 이들의 메시지가 채우고 있다. 그들의 말처럼 나 역시 그녀가 책을 내주어 고맙다.

책을 읽을 때 보통 책갈피를 이용하는데 이 책은 책갈피 없이 읽었다. 한 번에 한 호흡으로 읽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나간 페이지를 다시 더듬는 것이 기꺼웠다는 의미다. 책을 읽다가 이유도 없이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는데 정작 울먹울먹 한 것은 책 읽는 도중에 친구의 전화를 받았을 때였다. 드라마를 거의 안 보는, 그래서 노희경이 누군지도 모르는 친구를 붙들고 코맹맹이 소리를 낸 것이다. 오랜만에 바보같은 짓을 했다. 

드문 일이지만 내가 책과 혹은 작가와 사랑에 빠졌구나,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을 구분하는 가장 뚜렷한 지점은 같은 책을 여러 권 사서 책장에 쟁여두고 싶을 때다. 나머지는 책장 가장 좋은 위치에 귀하게 모셔 놓고 한 권을 줄기차게 읽고 또 읽고 그리하여 다자이 오사무가 단언했던 것처럼 두 손의 때로 책이 검게 빛날 때까지 읽고 또 읽고 싶은 때가 그것이다.

남의 상처는 별거아니라
냉정히 말하며
내 상처는 늘 별거라고
하는, 우리들의 이기.  - p.112

라고 말하는 당신, 당신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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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책중엔 누구나 다 알지만 의외로 읽은 이는 별로 없는 책이 있다.『삼국지』가 바로 그런 책이다.
나 역시『삼국지』에 등장한 많은 인물들의 면면은 물론이고 그들이 치룬 전투에 대해서도 꽤 제법 알지만 막상 책은 읽지 않았다. 지나치게 잘 아는 이야기는 스스로도 내가 이 책을 읽었나 싶게 익숙해서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기회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삼국지』를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8, 9년쯤 된 것 같다. 당시 내가 제일 재미있게 했던 컴퓨터 게임은 공명전이었다.
공명전은 주인공 공명과 (삼국지의 내용에 의해 간혹 전투에서 빠지기도 하지만)유비, 관우, 장비 기본 옵션에 데리고 있는 군사들 중 필요한 인물들을 골라 조조와 손권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는 전형적인 롤플레잉 게임인데, 게임을 하는 동안 내 군사들 중 가장 레벨이 높은 인물은 단연 조운(자룡)이었다. 내 일방적인 애정을 받은 조운은 역사의 주인공들인 유비, 관우, 장비보다도 더 레벨이 높았고 매 전투마다 발군의 전투력을 발휘, 승전보를 올렸다.
그렇다고 편애하는 장군을 계속 내보낼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아서 조조나 손권 같은 적장들의 레벨은 당연히 최고 수준이기 때문에 전투를 봐가면서 맞붙여야지 안 그러면 애꿎은 장수만 잃는다. -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게임을 넘기면 다시 살아난다
즉 나관중의『삼국지연의』에 바탕을 두고 있는『삼국지』의 내용을 꿰고 있으면 전투에서 보다 훨씬 수월하게 이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적벽전을 치를 때 조조에게 관우를 맞붙이면 전투를 싱거울 정도로 쉽게 끝낼 수 있다. 한편으론 관우가 조조에게 진 빚을 잊지 못하고 조조를 놓아준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관우 넌 이번 적벽전투에선 제발 빠져!' 해봤자 소용 없다. 역사를 바꿀 순 없으므로 싫든 좋든 관우를 적벽전에 내보내야 한다. 각설하고...

지난 달에『삼국지』를 모태로 하는 영화 두 편,《삼국지 : 용(龍)의 부활》과《적벽대전 1부》를 봤다.

먼저《삼국지 : 용의 부활》
사전에 아무 정보 없이 봤던 이 영화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조운이었다. 제목의 '용'이란 조운의 자인 '자룡'을 뜻했던 것.
영화의 문제점이라면, 조운이 명장인 건 분명하나 그래서 삼국지 인물들 중 내가 가장 아끼는 인물인 것도 사실이나 그를 지나치게 영웅적으로 묘사한 부분이다. 기록된 사실만으로도 그는 이미 충분히 영웅인데 굳이 거기에 신화적인 요소까지 덧입혀야 했는지 영화는 내내 그를 비장하게 몰아댄다. 물론 나는 중국인이 아니므로 내가 모르는 그들만의 정서가 존재하겠으나 한 인물을 영웅으로 조명하는 것과 신화화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적벽대전 1부》
적벽전을 치르기 전까지가 1부 내용이고, 본격적인 적벽전은 2부에서 다룬다. 그런데 주연급 캐스팅 과정의 비화 탓인지 아니면 그것이 원래 감독의 의도였는지 주유(양조위)의 분량이 지나치게 많다. 단지 분량뿐 아니라 2/3 지점이 넘어 가면서부턴 그야말로 주유의, 주유에 의한, 주유를 위한 영화가 되었다. (그냥 '주유전'이라고 해도 됐을 듯...)
연출과 관련, 좀 황당했던 대목도 있다. 공명이 손권과 동맹을 맺기 위한 방편으로 주유를 찾아가는 장면인데, 때마침 군사훈련을 참관하고 있던 주유의 옆으로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우아하게 슬로모션으로 날아가는 화면이 나온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감독이 오우삼이었다. (오감독님, 도대체 하얀 비둘기를 얼마나 키우시길래 아직도 비둘기를 날리시는 건가요... --;)
뭐, 어쨌든, 이리하여 이때부터 주유의 말이 난산 끝에 새끼를 낳는 장면도 구경하고, 주유가 공명과 가야금 대결하는 것도 지켜보고, 주유의 집 처마에서 예쁘게 슬프게 비장하게 떨어지는 낙숫물을 보며 나도 저런 집에서 살고 싶다 부러워하다 보니 어느새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랜 기다림 끝에 아, 이제 좀 볼만하려나 했더니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조조의 십만군을 주유와 공명이 사이좋게 내려다 보면서 1부가 끝나버렸다.

나는 호기심이 많아서 영화《삼국지》두 편을 보면서도 궁금한 것이 참 많았다. 원래 어중간하게 알면 궁금한 것도 많은 법. 하여 내 주변에서 유일하게『삼국지』를 읽은 M군에게 계속 전화해서 이것저것 물었더니만 어지간히 귀찮았던 모양이다. 일주일 뒤에 M군으로부터 택배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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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디킨스가 세인트 제임스 홀의 만원을 이룬 청중 앞에서 ‘올리버 트위스트’를 큰 소리로 낭독했을 때 그의 심장 박동은 72에서 124까지 치솟았다. 당연한 일이다. 우선 그는 페이긴이 되었다. 측면에 날개처럼 붙은 청중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의 친구 찰스 켄트는 그 몇 분간 디킨스가 “악마의 화신” 같았다고 전한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으며, 차양을 친 듯한 눈썹은 무시무시한 파충류의 더듬이처럼 움직였고, 반쯤은 여우같기도 하고 반쯤은 독수리 같기도 한 그의 모습 전체가 굶주린 맹수처럼 사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파충류, 포유류, 조류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려면 누구라도 맥박이 빨라졌을 것이다.) 이어 디킨스는 책의 여백에 써놓은 무대 지시 사항(“몸을 부르르 떤다… 공포에 질려 주위를 돌아본다… 살인이 다가온다.”)을 흘끗 본 뒤에, 빌 사이크스가 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몽둥이를 휘둘렀다. 마지막으로 그는 낸시가 되어 숨을 헐떡였다. “빌, 오, 빌.” 그녀는 자신의 피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디킨스는 낸시를 몽둥이로 때리고 사이크스의 목을 매단 뒤에는 무대 밖의 소파에 엎어져 10분 동안 말을 제대로 이어 나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 p.147,「낭독의 쾌감」 

 

앤 패디먼의 에세이『서재 결혼 시키기』의 미덕은, 같은 활자중독자로서 작가에게서 유사한 경험을 발견하고 공유하는 데서 오는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트루먼 카포티의 자전적 소설『인 콜드 블러드』가 원작인 영화《카포티》에도 문제의 ‘낭독’ 장면이 나온다. 카포티는 영화《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자이자 시나리오 작업도 했는데 당시엔 출판 전후에 홍보를 겸한 자신의 책을 낭독하는 행사가 일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낭독’에 대한 부분은 온다 리쿠의 장편『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4장에서도 잠깐 언급되는데, 작가는 읽는 책이 보는 책이 된 디지털 세대인 지금의 다음 세대쯤에 이르면 아마 다시 ‘듣는 낭독’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라고 자신의 견해를 살짝 내비친다. - 사족이지만,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은 '삼월은 붉은 구렁을 타고' 이다. 단어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도 그 느낌이 참 다르다. 왜 쓸데없이 제목을 잘라 버렸을까 궁금한 대목.

나도 낭독을 할 때가 가끔 있는데 주로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에게 한다. 대부분 책을 읽고 너무 좋아서, 혹은 반대로 너무 싫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입 밖으로 쏟아내고 싶은 욕구를 도저히 참기 어려울 때 낭독을 하는데 내 낭독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어 하던 친구가 유학을 간 후로, 지금은 M군이 내 낭독의 대상을 도맡아 한다. 처음엔 전화기를 붙들고 M군에게 그 책을 꼭 읽어보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다가 급기야 M군이 ‘문제의 책’을 읽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내 성급함이 전화선을 타고 ‘낭독’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M군, 처음엔 잘 들어주는 것 같더니 차츰 귀찮아하다가 나중엔 들어주는 척만 하다가, ‘척’하면 한 번 들을 걸 두 번 듣게 된다는 걸 경험한 후에는 이젠 제법 성의있게 들어주고 촌평도 해준다(하지만 여전히 귀찮아한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하게 되는 고민은 내가 낭독자로서 얼마나 객관적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사실 내가 상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인간이다 보니 ‘낭독’하기에 이르면 스스로 알아서 이러한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니 낭독 전에 자연히 사설이 길어지게 되는데, 전화기 저쪽에서 내 이런 사설을 인내심 있게 들어주던 M군이 결국 못 참고 한 마디 한다. 

“다 감안해서 들으니까 그냥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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