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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지음 / 김영사on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젠 분당 초당으로 쪼개진다는 시청률에서 늘 나쁜 성적을 내면서도 마니아를 몰고 다니는 드라마 작가 노희경. 나는 그녀가 책을 낼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그리고 기다렸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연말, 아마도 마지막이 될 책 주문을 하려고 온라인 서점에 접속하고 드라마 작가 노희경의 신작 에세이 출간 소식을 봤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아, 드디어"였다. 그러고도 망설였다. 실망하면 어쩌지. 실망하면,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장바구니. 그리고 예정된 시간보다 더 일찍 내 손에 들어온 그녀의 책...
나는《화려한 시절》과《바보 같은 사랑》을 제외하곤 그녀의 드라마를 제대로 끝까지 본 것이 없다. 그녀가 만든 세계에서 사는 '그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날카로운 창 끝이 가슴을 겨누고 있는 듯 답답하고 위태로워서, 가장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파묻혀 TV 너머 그들의 세상을 마냥 구경할 수 없게 만든다. 한마디로 내 여리고 보드라운 정서는 그녀의 건조하고 날 선듯한 목소리를 버거워했다. 한 주에 몇 개씩 쏟아지는 많은 작가들의 고만고만한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랑과 그녀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 왜 다른가. 그래 봤자 사랑 아닌가?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녀의 드라마는 매번 이런 내 생각을 비웃었다.
참으로 건조한 목소리로 사랑, 사랑, 지치지도 않는지 사랑 타령을 하는 작가가 당연히 궁금했다. 사랑 때문에 깊이 상처받아 "사랑 따위!" 조소하고, 상대를 저주하고, 자신을 한없이 뭉갠다 싶더니 언제 그랬나 싶게 "그래도 사랑만이 구원" 이라고, 뻔뻔하게 사랑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인물들을 날 것 그대로 보듬는 작가의 그 끈질긴 정서가 궁금했다.
한 때는 "이 작가는 로맨스랑 어울리지 않아" 단정 짓기도 했다. 지금은, 지금은 조금이지만 어쩌면 알 것도 같다. 흉내낼 줄 모르고 꾸밀 줄 모르고 부서질 줄 알면서도 온 몸으로 부딪치는 무모한 그들을 보듬는 이 사람이야말로 사랑을 얘기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드라마 작가의 에세이답구나 싶은 그녀의 첫 책『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는 작가의 치열했던 한때, 작가 자신, 사랑, 일, 주변인을 향한 사적인 고백으로 채워져 있다. 책 사이 사이에 꽂혀 있는(물론 빠지지는 않는다) 내지에 작가의 필체로 쓴 짤막한 독백이 인상적이고 간간이 등장하는 드라마 얘기는 훔쳐보기 같은 가벼운 즐거움이 있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드라마에 등장했던 독백톤의 대사들을 활자로 보니 새삼 그녀의 드라마를 소설로 읽고 싶었던 갈증이 이것 때문이었구나 했다.
책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소설 출판을 제의하는 출판사의 전화에, "나는 드라마 작갑니다. 때문에 소설을 쓸 생각이 없습니다." (뚝!) 응대하는 장면이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내 기분은 조금 이율배반적이었는데 첫째, (보지는 않았지만)그녀의 대본이 산문적(?) 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구나 하는 거였고 둘째, 소설은 안 쓰겠다는 작가의 단언에 실망보다는 안도감을 느꼈다는 점에서 그렇고 셋째, 그럼에도 그녀의 소설이 나오면 제일 먼저 살 테다,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드라마 작가로서 자존심이 단단한 그녀. 같은 극작가로서 그녀가 영화를 보는 관점은 어떨까. 나는 그녀의 드라마로 그녀가 꽤나 현실적인 강심장을 가졌을 거라고 막연히 추측했다. 하지만 영화《화양연화》속 불륜을 바라보는 그녀의 글과 소통하면서 이젠 그녀가 참 섬세하고 로맨틱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구나 한다.
책의 마지막은 그녀와 작업했던 이들의 메시지가 채우고 있다. 그들의 말처럼 나 역시 그녀가 책을 내주어 고맙다.
책을 읽을 때 보통 책갈피를 이용하는데 이 책은 책갈피 없이 읽었다. 한 번에 한 호흡으로 읽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나간 페이지를 다시 더듬는 것이 기꺼웠다는 의미다. 책을 읽다가 이유도 없이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는데 정작 울먹울먹 한 것은 책 읽는 도중에 친구의 전화를 받았을 때였다. 드라마를 거의 안 보는, 그래서 노희경이 누군지도 모르는 친구를 붙들고 코맹맹이 소리를 낸 것이다. 오랜만에 바보같은 짓을 했다.
드문 일이지만 내가 책과 혹은 작가와 사랑에 빠졌구나,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을 구분하는 가장 뚜렷한 지점은 같은 책을 여러 권 사서 책장에 쟁여두고 싶을 때다. 나머지는 책장 가장 좋은 위치에 귀하게 모셔 놓고 한 권을 줄기차게 읽고 또 읽고 그리하여 다자이 오사무가 단언했던 것처럼 두 손의 때로 책이 검게 빛날 때까지 읽고 또 읽고 싶은 때가 그것이다.
남의 상처는 별거아니라
냉정히 말하며
내 상처는 늘 별거라고
하는, 우리들의 이기. - p.112
라고 말하는 당신, 당신을 좋아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