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2006년 광주인화학교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소설『도가니』는 인호가 기간제 교사로 발령 받아 무진市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실화를 소설화할 때 즉 저널리즘식 글쓰기를 할 때 작가는 감상에 빠지거나 감정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인물들로부터 심리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이건 기본이다. 작가는 어디까지나 전달자여야지 소설속 인물들과 함께 어울려서 울고 불고 떠들어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3자가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객관적인 사실을 정보로 전달해야 할 작가가 오히려 나서서 감정을 선동하고 있다. 저작이 사회소설일 때, 작가 공지영은 여전히 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듯 보인다. 아니면 극복할 마음이 없던가.
"이 아이들에게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어요" 하는 것과 "가여운 아이들에게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정말 짐승, 악마 같은 놈들 아닌가요?" 하는 것은 어조에서부터 큰 차이가 있다. 이 작가를 보면 주목 받고 산 사람의, 주목 받지 않으면 못 견디는 것 같은 정서가 느껴진달까.
무엇보다도『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선 '죄 없는' 아름다운 청년 사형수가 왜 죽어야 하느냐고 사형제도의 부당함을 주장하여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더니『도가니』는 절정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구성상의 몇 가지를 제외하더라도 그 결말에 이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은 결국 무죄 처리되어 자기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반면, 무사히 제자리로 돌아가는 인호는 물론이고 피해 학생들 모두 예전의 악몽으로부터 구원받아 새로운 보금자리와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게 되어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감동적인 메시지로 매듭을 짓는 것으로 작가는 슬그머니 발을 빼버리는 것. 이런 동화같은 온화한 결말로 책 판매량은 늘었을지 모르나 독자 입장에선 사회적 독서를 할 기회가 제한된다는 점에서 작가 스스로 한계를 드러낸 셈이다.
늘 감탄하지만 이 작가의 소재를 고르는 재주는 참 뛰어나다.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일 터. 하지만 아무리 좋은 재료도 그것을 다룰 줄 모르면 소용없는 법. 곪은 상처를 치료하려면 상처를 찢고 고름과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지켜보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적어도 사회고발소설을 쓰려고 작정했다면 그 정도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소설외적인 문제일 뿐, 몇 년 새 아동성범죄가 너무도 만연하고 있는 요즘, 다시 한번 광주인화학교 사건을 대중에게 환기시켰다는 의미에서 이 소설이 해낸 역할 - 잊혀진 사건에 대한 주의 환기 - 에 비하면 저런 부분들은 차라리 부수적이고 하찮은 것인지도 모른다. 

광주의 옛이름이 무진주(武珍州)이기도 하지만 소설 속 무진은 김승옥의『무진기행』에 등장하는 가상의 도시 무진(霧津)이다. 문학 비평집을 읽다 우연히 마주친 짧은 문단에 반해서 그 날로 전집을 구입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김승옥의 무진市인 것이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찹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 pp.159-160,『무진기행』   

김승옥의 영향일까. 이번 공지영의 소설은 예전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담백하고 묵직한 문장들이 많이 등장한다.

강인호가 자신의 승용차에 간단한 이삿짐을 싣고 서울을 출발할 무렵 무진시(霧津市)에는 해무(海霧)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흰 짐승이 바다로부터 솟아올라 축축하고 미세한 털로 뒤덮인 발을 성큼성큼 내딛듯 안개는 그렇게 육지로 진군해왔다. 안개의 품에 빨려들어간 사물들은 이미 패색을 감지한 병사들처럼 미세한 수증기 알갱이에 윤곽을 내어주며 스스로를 흐리멍덩하게 만들어버렸다. 바닷가 절벽 위에 선 사층짜리 석조건물 자애(慈愛)학원도 그렇게 안개 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 p.7,『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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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세 달 전인가, 알라딘에서 중고샵 책 상태에 관한 설문을 할 때 선택 항목을 보고 불안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최상 항목에 책에 서명하고, 줄 긋고, 표지 찢어진 등의 내용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됐다. 혹시 이런 항목들을 보고 '아, 이 정도는 최상이라고 해도 될라나?' 생각하는 어설픈 판매자들이 등장하는 건 아닌가 노파심도 들었다.

내 경우, 책을 구입할 때 기본적으로 소장 목적이 포함된다. 일단 내 손에 들어온 책은 이유가 뭐든 사정이 어떻든 타인에게 주는 건 물론이고 되팔거나 버리지 않는다. 때문에 중고샵을 이용할 땐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 - 품절/절판으로 책을 구할 수 없을 때 고민고민 하다 구입한다. 상태가 좋은 책이 없으면 차라리 읽기를 포기하고 그게 언제가 되든 재출간을 기다린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말 그대로 새 책입니다' 

라는 설명이 부연되어 있으면, 구매자는 '말 그대로 새 책이려니'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도 중고책인데, 중고에 새 것을 바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배송비까지 물면서 적지 않은 가격을 치를 땐 판매자의 '최상'을 믿기 때문이다. '새 책에 가깝다' 하면 '새 책에 가까우려니' 기대하는 게 잘못인가?  

중고샵에 바라는 건 아주 소박하고 단순하다. 책 상태에 관해 판매자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라는 것.

읽지만 않으면 새 책인가? 정체불명의 오염 흔적에 알 수 없는 도장들이 잔뜩 찍히고 묵은 먼지로 책은 누렇게 변색되고. 이게 말 그대로 새 책인가? 분명한 건 상품 설명에, '새 책이지만 심한 노끈 자국이 있습니다', '먼지로 인한 오염 자국이 심합니다' 등의 솔직한 설명만 있었어도 구입하지 않았을 거다.

돈 버는 판매자가 아니라 돈 쓰는 구매자를 위해 알라딘은 보완책을 마련하길 바란다.

중고 상품을 등록할 땐, 하다 못해 상태를 '최상'으로 등록하는 상품엔 최소한 상품의 사진이라도 올리게 하던가. 상태가 설명과 다르면 간단하게 환불처리 할 수 있도록 해주던가.

이게 어려운가? 아주 간단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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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SF 작가라는 아서 C. 클라크의 단편집(아서 클라크 단편 전집 1953-1960 / 황금가지)의 첫 번째 단편은「다른 호랑이」(The other tiger)인데 원래 제목은 '반박'이었으나 프랭크 스탁턴의「숙녀일까 호랑이일까」(The lady or the tiger)에 헌정하는 의미로 제목을 바꾸었다고 한다.
실제로 불과 4페이지 분량의 짧은 단편은 내용만 보면 프랭크 스탁턴의 단편과 그닥 연관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원래 제목 '반박'이 딱 제격인데, 또 한편 생각해 보면 '인생은 예측불허'라는 동일한 주제를 보여주니 바뀐 제목도 그다지 나쁘진 않다.
'무한한 우주'를 가정하는 데서 시작하는「다른 호랑이」의 결론은 이러하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는 태어날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태어난 것이다. - p.16 「다른 호랑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매년 어마어마한 인세 수입을 올리는(비교하자면 '해리포터'보다 더 많이 벌어 들인)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밀레니엄』의 작가 스티크 라르손은 스웨덴 출신의 기자인데 이 사람의 삶이 참 드라마틱하다. 
모아 놓은 재산이 없었던 그는 은퇴 후 노후에 도움이 될까 해서 생애 첫 소설『밀레니엄』3부작을 쓰는데 출간 6개월 전 엘리베이터가 고장나 7층 사무실까지 걸어서 올라갔다가 심장마비로 급사하고 만 것. 이후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엄청난 수입을 벌어 들였지만 정작 장본인은 수입은커녕 자신의 원고가 책으로 만들어진 것도 못 보고 죽은 셈이다. 한 치 앞을 모르면서 백년대계하는 인간의 나약함이랄까 어리석음이랄까...
참고로 이 사람의 소설은 내 취향엔 조금 어긋나는데, 때문에 얼마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며 어마어마한 인세 수입을 올린 소설이라는 기사를 읽고 좀 많이 놀랐다.


스티그 라르손 외에도 자신의 소설이 가져다 준 행운을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비운의 작가 중에는 영화로 제작되어 많은 인기를 끈『마이너리티 리포트』『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을 꿈꾸는가』『페이첵』의 필립 K.딕도 있다.



다시「다른 호랑이」로 돌아와서...
인생이 예측불허라는 건 아마도 인간의 마음이 예측불허인 데서 기인하는 바가 크지 않을까.
같은 맥락에서, 프랭크 스탁턴의「미녀일까 호랑이일까」는 공주의 선택을 보여주지 않고 끝을 맺는데 사실 나는 공주가 연인을 위해 '미녀'(the lady)를 선택했을 거라는 데에 '매우' 회의적이다.

노예의 두 눈은 어느 쪽이냐고 묻는 듯 이글이글 타올랐다. 공주도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공주는 손을 들어 오른쪽을 가리켰다. 아무도 그녀의 행동을 보지 못했다. 그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문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였고, 그는 자신 있는 손길로 오른쪽 문을 열었다.

자, 한번 생각해 보라. 공주는 지난 수주일 동안 호랑이가 소름 끼치는 이빨을 드러낸 채 뛰쳐나오는 광경을 상상해 왔다. 다른 쪽 문을 연 모습도 상상했다. 처녀를 보고 미소 짓는 그의 얼굴! 결혼식 종이 울리면 공주는 입술을 깨물며 머리칼을 쥐어뜯는 것이다. 차라리 그가 당장에 죽어 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무시무시한 호랑이와 사랑하는 이의 비명소리!

공주는 노예가 물어 올 줄 알고 있었고 무슨 대답을 할지도 생각해 두었다. 한 순간의 지체도 없이 공주는 오른쪽 문을 가리켰다. 나는 이 물음을 여러분에게 던지고자 한다. 과연 무엇이 나왔겠는가. 미녀일까, 호랑이일까?

-「미녀일까 호랑이일까」, 프랭크 스탁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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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연애조작단>(이하, '시라노')는 추석 연휴 때 부산에서, <무적자>는 어제(금요일) 저녁에 봤는데, 간단평을 하면 '시라노'는 오밀조밀 아기자기하고, <무적자>는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거친 인상이 든다. <시라노>는 코믹 멜로이고, <무적자>는 액션 느와르이니 당연한 얘기인가 싶기도 하고.

<시라노>를 연출한 김현석 감독의 예전 작품은 <YMCA야구단>과 <스카우트>를 봤는데 이 감독은 연출보다는 각본 쪽에 더 재능이 있는 듯하다. 연출을 못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야기는 조밀하게 잘 쓰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늘 얼마쯤 부족하다 싶은 찜찜함이 남는다.
시라노는 17세기 프랑스 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5막 시극에 등장하는 인물로 박색의 외모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숨기고 친구의 연애편지를 대필하는 인물. 이러한 플롯을 그대로 빌려온다는 점에서 영화는 이를테면 극속 극 형태를 취하는데, 연애에 서툰 사람들의 연애를 성사시켜주는 일을 업으로 하는 '시라노 에이전시'를 중심으로 이곳을 찾는 연애 초보들의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하지만 능동적으로 시라노 역할을 자처했던 에이전시 대표 병훈(엄태웅)은 어느 날 에이전시를 찾아온 상용(최다니엘)으로 인해 소설 속 시라노처럼 옛 애인 희중(이민정)과 고객 상용 사이에서 매파 노릇을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 영화는 뭐랄까, 요소 요소에서 톡톡 튀는 대사와 설정들은 웃음도 나고 재미도 있지만 막상
극장에서 나온 후에 영화를 기억할만한 인상적인 임팩트가 없다. 다만 영화에서 헤어진 옛 애인과 재회했을 때 병훈이 보여주는 몇 가지 행태들이 눈에 띄는데 기존 로맨틱물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정형을 탈피한, 지극히 현실적인 병훈의 반응/역반응이 꽤 신선하다. 시라노의 거대한 코가 병훈에겐 어떤 형태로 감춰져 있는지 보는 것도 영화를 보는 재미.

<무적자>는 리메이크 원작 <영웅본색>을 못 본 이유로 일단 비교는 불가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원작을 안 본 것이 득일까 실일까 갸우뚱 기우뚱 했고, 덕분에 영화관에서 나올 때 제일 먼저 한 건 원작인 <영웅본색>을 봐야겠다는 결심이었다.
내용은 딱, 남자들 얘기다. 영화를 보는 중에 두 번 웃었는데 모두 <영웅본색> 주제가 나올 때였다(영화는 안 봤지만 주제가는 안다).
송해성 감독의 영화는 이번이 처음인데 감독의 스타일을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 건, 그만큼 이 감독의 노선이 분명하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송승헌 씨 연기. "은서야~" 할 때 고개를 비틀며 입가를 아래로 살짝 늘이는 버릇이 여전히 남아 있긴 한데 발성이 굉장히 묵직해졌달까, 배우 느낌이 물씬 나는 것이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 했다.
여하튼 재미있는 건 나는 영화 속 남자들의 의리, 우정, 형제애 이런 것에 제법 유치한 감동을 느꼈는데 정작 이 영화를 본 (내 주위)남자들은 상당히 냉정하게 반응하더라는 것.
여담이지만, DVD가 출시되면 꼭 한번 세어보고 싶다. 태민이 끌고 온 부하들과 영춘의 총에 맞힌 태민의 부하들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많은지.
영화 전반에 걸쳐 리얼리티는 많이 떨어진다. 줄거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이야기야 어차피 픽션이므로 감안하고 본다) 단적인 예로, 대한민국 현실에 어울리는 건 아무래도 총싸움보다는 칼싸움인지라 비록 등장인물들이 무기밀매업에 관계되어 있다고는 하나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시도 때도 없이 해대는 총질은 아무래도 이건 좀 아니올시다 싶다. "마이 뭇다 아이가"가 달리 명대사이겠는가.
(그러고 보니, '고마해라'가 '마이 뭇다' 앞에 오냐, 뒤에 오냐로 친구랑 실랑이를 벌였던 기억이 난다) 

<시라노>도 <무적자>도 원형을 과거의 작품에서 빌려오거나 가지고 왔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마침 요즘 읽고 있는『클래식 중독』(조선희 / 마음산책)은 저자의 옛 영화 다시 보기 기록으로, 영화 얘기에 덤으로 영화와 얽힌 내외적 수다로 가득하다.
나는 기자 혹은 기자 출신이 저자인 책은 사전 정보가 없어도 거의 고민 없이 장바구니에 담는데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대부분)서술간 사실 관계가 명확하고, 글이 의도하는 바가 뚜렷해서 가독성이 좋으며 무엇보다 기자 특유의 촌철살인의 어법을 읽는 것이 즐겁다는 것이 그들을 신뢰하는 이유다.
이 책은 작가가 기자 출신(연합통신 기자, '씨네21' 편집장 등)이라는 점 외에도 옛날 영화에 대한 호(好)가 나와 통했다는 점에서 꽤나 재미있게 읽고 있다.
사실 옛날 영화는 '옛'이 풍기는 어감 탓인지 왠지 촌스럽고, 고루하고, 밍숭맹숭 심심할 것 같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일례로 내 경우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옛날 영화와 마주쳤을 때 거의 대부분 그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되는데, 반면 영화가 현대물인 경우 금방 다시 채널을 돌려 버리는 일이 많다.
참고로 내가 좋아하는(-라기 보다는 여러 의미로 깊은 인상을 받은) 옛 영화는 국내 작품은 <최후의 증인>, 국외 작품은 <줄 앤 짐>(프랑소와 트뤼포 연출)이다. <최후의 증인>은 몇 년 전에 <흑수선>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 되기도 했는데 원작은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이루었던 김성종의『최후의 증인』. 이 외에도『클래식 중독』에서도 언급되는 <어제 내린 비>도 무척 인상이 깊었던 영화로 기억에 남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혹시 원작 소설이 있을까 찾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참고로 각본은 (조선희 씨에 의하면)당대 최고 신문 연재 인기 작가였던 최인호이다. 

시간이 관여하는 모든 사물은 저마다 고유한 역사를 가지는데 영화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작품의 품질을 시간의 선/후로 가리는 것은 소모적인 낭비로 보인다. 이번 연휴에 영화를 고를 때 확 끌리는 작품이 없어 고민을 많이 했는데 요즘 들어 옛날 영화가 여러모로 양적 질적으로 더 풍성했고 더 재미있었다는 아쉬움이 부쩍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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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문지 푸른 문학
김도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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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성장소설이라는 건 책을 다 읽고서야 알았다.
소설을 읽는 내내 느꼈던 감상은 어른을 위한 동화랄까, 소설이 참 착하다라는 것. 정말 소설이 착하다.
내용은 제목이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중2 때 담임이 내준 반성문을 30년이 지나서야 쓰게 된 나의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통로였던 웅변을 그만둔 직후 나선 백일장. 그리고 그 백일장에서 중압감을 못 이기고 우연히 읽은 남의 글을 '일부' 가져다 쓴 것이 빌미가 되어 쓰게 된 원고지 500매의 반성문. 그러나 벌을 수행하면 죄를 인정하는 것이 되기에, 또 그 외에도 내,외적인 이유와 변수들로 인해 나는 반성문을 쓰는 것을 자꾸만 미루게 된다. 그리고 30년 만에 담임선생님의 병실에서 다시 화두처럼 떠오른 아직 쓰지 않은 반성문과 과거의 기억들. 그리하여 목련을 보면서 마침내 쓰기 시작하는 반성문은 자신의 잘못과 마주하는 당혹감을 지나자 이내 지나간 시간을 향한 향수를 불러오는 추억 여행이 된다.
내용 중에 아내가 나에게 '반성이 아니라 변명처럼 보인다'고 지적을 하는 부분이 있는데 어쩐지 공감이 가는 대목이었다.
사실 긴 학창시절 동안 반성문을 써 본 경험이 없어 잘 모르지만 만약 반성문을 쓴다면 나 역시 자기 최후 변론 같은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정성을 들인 문장이 참 예쁘게 다가오는데 그래서인지 목련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마치 시인의 그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담인데, (소설 속)김 작가가 쓴 백일장의 글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눈 오는 겨울, 정거장, 소녀, 소녀가 두고 간 사진... 그 위에 덧입혀진 까까머리 중2 남학생의 정서가 궁금하다.

「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이 어른을 위한 착한 소설이라면 이어지는 단편「진부의 송어 낚시」는 한 편의 유쾌한 콩트를 읽은 듯한 느낌이 든다.
짧은 분량임에도 상당한 존재감을 가지고 다가온 정미도, 정미의 담임도, 송어축제 게시판을 수놓는 글들도 모두 깨알같은 잔재미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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