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이야기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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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과 아라크네는 방 이쪽저쪽에 놓인 베틀로 올라가 날실을 걸었다. 둘 다 부테허리를 허리에 감고 잉아에 날실을 꿴 다음 재바른 손놀림으로 씨실을 북에다 물려 날실 사이로 밀어넣었다. 씨실에 날실을 지날 때마다 바디가 이 씨실을 쫀쫀하게 짰다. 옷을 걷어올려 젖가슴을 질끈 동여매고 여신과 처녀는 있는 힘과 기를 다해 베를 짰다. 이 둘의 손은 쉴새없이 베틀 위를 오고갔다.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이들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까맣게 잊고 일했다. 이들이 베에다 짜넣은 실에는, 튀로스 염료로 물들인 보라색 실은 물론이고 색조가 조금씩 다른 여러 가지 색실이 섞여 있었다. 한 가지 색실이 다른 색실과 겹치는 부분에서는 어디서부터 이 색실에서 저 색실로 바뀌었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소나기가 하늘에다 그려놓은 긴 활꼴 무지개와 흡사했다. 무지개가 지닌 여러 가지 색깔의 띠는, 맞물리는 곳에서는 하나로 보이지만 여기에서 조금만 떨어지면 전혀 다른 색깔로 보이는 법이다. 옛 이야기의 내용이 그림으로 짜여 들어가면서 금빛 색실도 이 갖가지 색실에 섞여들어갔다. - p.242,『변신이야기1』

* 발췌한 부분을,『그리스 로마 신화』의 저자로 유명한 미국 작가 토마스 벌핀치는, 과학적인 사실과도 일치하는 묘사라고 이 대목을 극찬한 바 있다, 라고 본문에 부연 설명이 있다.

1. (설명과 상관없이)발췌한 부분은 읽으면서 사실적이고 기술적인 뛰어난 묘사에 감탄하는 한편 운문이라는 원문이 궁금해진 대목이다.

2. 어떤 이야기일까 궁금했던『변신이야기』는 읽고 보니 중국의『서유기』나『삼국지』만큼이나 잘 알려져 있는『그리스 로마 신화』였다. 자라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듣거나 읽어봤을 밤 하늘의 '큰 곰자리와 작은 곰자리'같은 별자리에 얽힌 이야기들, 나르키소스와 에코의 사연이 깃든 '수선화'나 아폴로를 사모한 요정의 슬픈 '해바라기'이야기같은 꽃과 꽃말에 얽힌 이야기들, 부엉이와 까마귀따위 새들에 얽힌 이야기 등등등... 추억의 앨범을 꺼내보는 듯한 신화 이야기는 이제는 조금 시시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어우러진 신(神)들의 좌충우돌 이야기는 여전히 매력있는 이야기임에 분명하다. 어릴 때 흥미거리로 읽었던 이야기들을 다시 읽는 장점은 예전보다 좀 더 확장된 자신의 세계관을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에 있다.

3. 중 1,2 정도의 자녀에게 필독서로 권하기에 좋은 책이다. - 아직 2권은 시작하지 않았지만 두 권을 모두 읽고나도 이런 감상이 달라질 이유는 없다.

4. 운문인 원문을 산문으로, 또 라틴어 원전을 영어본/일본본을 가지고 중역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태생적인 오류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번역의 요소중 가독성만 놓고 보면 이윤기의 번역은 훌륭하다고 할만 하다. 매끄럽고 재미있고 소설과 산문으로 다져진 역자의 문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 '서브 노트'로서의 역할일 뿐 라틴어 원전의 번역을 읽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5. 초보적인 실수들이 군데 군데 눈에 띈다. '쌍둥이 자매 아폴로와 디아나'라던지(자매가 아니라 남매다) 인명의 불일치 그리고 그 외 정말로 기초적인 오타 등등.

6. 책을 읽다 보면 올림포스산의 오만방자하고 질투쟁이에 유아적인데다 난잡하기 그지없는 신들의 가계도를 한 번 정리해 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정말 재미있는 신들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7. '대체로' 나는 만연체에 그닥 거부감이 없는 것 같다. 영미권 소설에 익숙해서인가. 어쨌든 만연체도 간결체도 모두 좋다. 늘 생각하지만 읽을 거리가 있는 것만도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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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인 최영의는 소와 싸울 때 '너 소야? 나 최영의야!' 라고 말하고 나서, 한 손으로 소의 뿔을 잡고 한 주먹으로 정수리를 난타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넘버 3>에서 송강호가 한 말이다. 그런데 소는 그렇게 '잡을 수' 있을지 모르나, 책은 그렇게 '잡으면' 안 된다. '너 책이야? 나 독자야!' 하고 집히는 대로 읽는 일은 난독亂讀이요, 페티시fetish이다. 좋은 독서가 되려면 '나는 왜 이 책을 읽는가?'라는 강한 동기 부여나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읽게 된 두 권의 책은 난독이거나 페티시가 아니라면, 또 다른 독서질병讀書疾病인 관음증에 가깝다. - p.178,『장정일의 독서일기 7』

- 본문의 '두 권의 책'은 앨리노어 허먼『왕의 정부』, 마거릿 크로스랜드『권력과 욕망』
-『독서일기7』은 기존 범우사에서 랜덤하우스로 출판사가 바뀌었다.

인용한 글은 마침 책을 쇼핑하듯 읽지 말아야지,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좀 더 집중해야지, 반성하던 시기에 남다르게 다가왔던 문단이다.
온라인 서점에서 출간을 접하자마자 바로 주문한『장정일의 독서일기 7』은 인쇄일이 10일로 찍혀 있다. 책을 주문한 것은 12일이었으니 이 정도면 장정일의 팬이라고 해야 하나.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서평가 장정일의 팬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다시 말하면 나는 장정일의 독서 리스트를 '매우' 신뢰하는 편이다. 이를 테면 국내의 모든 번역본 중 민음사의『호밀밭의 파수꾼』이 가장 좋았다는 얘기에(독서일기 7) 안심했고, 자기네 언어로『허삼관 매혈기』를 읽을 수 있는 중국인이 부럽다고 하는(독서일기 5) 부분에선 생각이 통하는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을 느꼈다. 또한 아마도 그의 독서일기 시리즈에 가장 자주 등장했을『롤리타』(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경우,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전반 30여 페이지쯤 읽었을 때 책을 구입해야겠다고 결정했다.

온라인 세상의 확장으로 타인과 만나는 것이 쉬워진 요즘, 비슷한 취향을 발견하면 우선은 반가움을 느끼게 되고 그 반가움은 내처 친밀감을 형성하는 데까지 이어지기 마련이다. 고작해야 같은 소설을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친구가 될 수 있는(『상실의 시대』무라카미 하루키) 이른바 문화소비의 세대가 아닌가. 이건 책도 마찬가지. 
사실 새로운 책을 만나는 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과 매우 비슷한 데가 있어서 거의 대부분 첫 한 문장, 혹은 앞 몇 페이지에서 그 만남이 즐거울 것인가 악몽이 될 것인가 결판이 난다. 

언젠가 저녁에 책장을 정리하다가 내 책 치고는, 꽤 많이 상한 이유로 눈에 띈『장정일의 독서일기』는(이 책은, 아마 출간 당시만 해도 연작 계획이 아니었던지 '1'이라는 숫자가 빠져 있다), 책이 왜 이렇게 상한 거지, 이리 저리 들추다가 공지영 작가 소설에 관한 저자의 감상에 공감을 느끼면서 정리는 이미 뒷전이고 기어이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장까지 읽게 했다. - 실제로 소설이 아닌 이런 류의 책들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순서대로 읽기보다는 틈틈이 넘겨서 읽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공지영의《고등어》(웅진출판, 1994)를 읽다.
(중략…)일전에《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같은 작가의 소설을 두고 한 평론가와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그 우스운 소설을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말했고 나는 관습과 역할 그리고 더 나아가 상징과 신화에 도전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의사 페미니즘은 TV를 통해(연속극) 매일, 아침 저녁으로 쉴새 없이 반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평론가는 페미니즘적 수준 성취는 물론이고《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오문과 악문으로 가득한 책이라는 나의 불평마저 접수하길 거부했다. 자신은 그런 문장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고등어》를 읽으며 나는 불평을 넘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앞서의 '형편없는 수준' 운운 하는 대목은 상당 부분 작가의 오문과 악문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 한다. - 『장정일의 독서일기』

사회통념에 반하는 소설을 저작, 출판했다는 명목으로 감옥까지 갔다 온 주홍글씨가 붙은 불온한 작가 장정일과 국내 여성작가들 중 단연 베스트셀러 작가의 꼭대기에 서 있는 작가 공지영. 하지만 장정일은 그 스스로 작가인 동시에 자타가 공인하는 거대한 독서량을 비축한 한 사람의 독자 혹은 서평가가 아닌가. 좋은 글을 쓰는 것과 좋은 비평을 쓰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작가 공지영이 독자 장정일의 지적에 한 번쯤 주의를 기울여주길 바란다면 오지랖 넓은 것이 될까.
온라인 서점을 이용하면서 더 이상 자필 기록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되기 전까지만 해도 책을 사면 책 표지 안쪽에 구입 날짜와 간단한 메모를 하던 때가 있었다.『장정일의 독서일기』표지 안쪽에는 '96년. 3.21. 거듭남을 위해'라고 씌어 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메모를 했는지 지금은 물론 기억에 없다.

장정일의 독서량은 알려진 것처럼 한 마디로 거대(!)하다. 한 개인이 읽을 수 있는 독서량이 과연 어디까지인가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중졸 학력이라는 드문 이력을 가진 소설가 장정일은 제도권 교육의 울타리 안에서 한번도 벗어나보지 못한 아니 감히 그런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내게 교육의 허와 실을 되짚어 보게 하는 생생한 증거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장정일의 소설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다음 소설을 기다려 본 일도 없고 이미 읽은 소설도 왜 읽었을까 후회했다. 그러니 나는 소설가 장정일의 팬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입으로 평론가가 되고 싶었다던 독자 장정일은 매우 신뢰하고 있다. 그래서 서평과 평론 가운데쯤 걸쳐져 있는 그의 독서일기를 읽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다음 독서일기를 기다리게 된다.
(여담이지만)그의 소설은『아담이 눈뜰때』『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내게 거짓말을 해봐』등을 읽었는데 단짝 친구K의 언니의 책장에 꽂혀 있던 것이 이 소설들이었다. 당시 꽤나 자극적이고 민감한 내용으로 사회적인 이슈를 몰고 다녔던 그의 소설을 K와 나는 금기를 엿보는 심리라고 할까, 다소 불온한 동기로 읽었는데 그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를 이해하기엔 우리가 너무 어렸거나, 아니면 그의 세계는 말 그대로 그 혼자만의 자아도취였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 밖의 기타등등의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이 몇 편 안 되는 소설로 장정일이 우리들에게 그의 이름 석자를 확실하게 각인시킨 것은 분명하다.
결국 작가 장정일과 독자 장정일에 대한 내 호오는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겠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청준에게 실망한 것은 아니다. 평소에 당신을 싫어했으니까. 그런데 묻고 싶다. 당신을 4.19세대라고도 하고 그것을 형상화하는 작가라고도 하는데, 잠든 어린 딸의 눈에 청강수를 찍어 넣는 애비는 마땅히 그 ㅈㄷㄱㄹ를 잘라 씹어버려야 하지 않나? - p.60,『장정일의 독서일기 5』

이처럼 영화《서편제》의 원작 소설과 원작 작가인 이청준을 싫어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독자 장정일은, 정작 자기가 쓴 소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장정일은『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 작품을 쓰면서 내 심부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고, 내가 쓴 모든 작품의 핵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을 읽어보신 분들은 헤아리셨을 테지만, 이걸 쓰면서 무척 괴로웠다. 사회적 통념과 작가의 상상력 사이에 가로놓인 괴리가 너무 커서 자아분열에 걸릴 것만 같았다. 그것은 마치 두 절벽 사이에 내 몸으로 다리를 놓는 것만 같았다. 두 발은 이쪽에 두 손과 머리는 반대켠에. 하지만 그 괴로움과 찢김이 바로 작가가 져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고, 바로 그 때문에 작가가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 p. 171, 계간지『리뷰』(96. 겨울호)

요즘 국내소설을 읽다보면 작가만큼이나 자질을 제대로 갖춘 평론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너무 일찍 간 故김현의 자리가 새삼 참 아쉽다.


 

 

  


폭풍처럼 읽어야 한다. '나는 그 책을 밤새도록 읽었다'라든가 '나는 이 책을 들자마자 손에서 놓지를 못했다'는 경험은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우리 인생은, 특히나 청춘은 그렇게 응축된 몇 개의 경험만을 나열할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어떤 책을 들고 3일 이상 뭉그적거리면 그 책은 당신 손에서 죽은 거라고 봐야 한다. '피로 쓰여진 책은 게으른 독자를 거부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던 니체의 생각에 나는 동감하고 있다. - p.176,『장정일의 독서일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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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4-06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정일작가는 '아담이 눈뜰때'만 아주 어릴때 읽어본적이 있어서 이렇게 서평을 잘? 하시는 분인줄 몰랐네요^^ 아낙네님의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인삼밭에그아낙네 2010-04-11 10:25   좋아요 0 | URL
엄밀하게 말하면 서평이라기 보다는 말 그대로 독서감상에 가깝다고 할까요, 글에서 쏟아지는 작가의 직접적인 표현이나 주관적인 감상이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들이 있어 저는 참 재미있게 읽는 독서기예요. ^^
 
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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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권의 소설을 읽을 때, 그 소설의 주제가 보편적인 사회 윤리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를 넘나들기까지 할 때, 독자는 독서를 시작함과 동시에 작가와 공범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 일찌감치 자신의 위치를 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가가 설치해놓은 복잡한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리.타.

로 시작하는 나보코프의 소설『롤리타』는 굳이 출간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설명이 없어도, 지금은 그 의미가 명백히 상징적인 명사가 되어버린 '롤리타'라는 제목만으로도 그 논란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소설이다.
그러나 변태적인 호기심으로 책을 펼친 사람들이라면 실망할지도 모를 이 소설은 막상, 그다지, 외설스럽지 않다. 외설은커녕 여타 기괴하거나 파격적이고 엽기적인 일부 소설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그 문체나 문장이 더 없이 아름답고 목가적이다. 게다가 재미있는 상황극을 보는 것처럼 때로 웃기기까지 하다. 하지만 아름답고 유머 가득한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너 온 서른 일곱 살의 지적이고 잘 생기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학자이자 교수인 험버트는 법적으로 부녀 관계에 있는 이제 겨우 열두 살난 돌로레스(이하, 로)와 뻔뻔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맺는, 즉 님펫에 집착하는 소아성애자 변태성욕자다. 비록 그 과정에서 험버트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갈등하고, 망설였던, 험버트의 주장처럼 로가 먼저 그를 유혹했던, 로가 얼마나 당돌하고 막무가내이며 제멋대로에 되바라진 여자애였던지 간에 그 중 어느 것도 로가 이제 겨우 열두 살이고, 막 사춘기의 문턱에 들어선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화자가 주인공인 소설은 그 주인공이 범죄자이거나 악인일 때 간혹 심정적으로 주인공에게 동화되고, 더 나아가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스톡홀름 신드롬을 보이는 독자를 양산한다. 하지만 독자는 나쁜 주인공과 좋은 주인공을 냉정하게 구분해야 한다. 소설속 휴머니즘을 지탱하는 관습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는 누가 주인공인가가 아니라 주인공의 절대 의지가 선한가 악한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독자는 좀 더 이성적인 독서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즉 하필 어린 여자아이에게 성애를 느끼는 심리적, 육체적으로 성적소수자인 험버트를 동정하고 그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이 험버트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

험버트는 어린 로를 사랑하고 그녀가 떠났을 때는 절절하기 그지 없는 내밀한 고백으로 그녀를 붙잡으려고 하지만 로는 그런 험버트의 사랑을 오히려 이용하고 배신한다. 이런 과정에서 로가 사뭇 어린 팜므파탈로 보여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실은 로는 강하고 현명한 아이일 뿐이다. 로는, 어디를 보나 험버트보다 못한 '퀼티'는 자신의 마음을 망쳤지만 험버트는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는 걸 구분할만큼 충분히 현명하고, 열 일곱의 나이에 임산부가 되지만 돌아오라는 험버트의 유혹을 뿌리치고 장애를 가진 노동자 남편과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강한 아이다.

가끔 어떤 소설은 읽고난 후 작가가 소설 속에 심어 놓은 기호를 제대로 짚은 것인지, 혹시 과잉해석은 아닌지, 작가에게 속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낮은 이해력이 작가의 의도를 놓친 것은 아닌지 등등 독자를 작아지게 만든다. 어쨌든 나보코프의『롤리타』는 재미있지만 슬프고, 슬프지만 희극적인 그러나 결국은 서정적인 소설이다. 고전은 읽는 과정에서 느끼는 재미뿐 아니라 읽고 난 뒤의 지적 충만감에서도 그 만족도가 확실히 다르다. 아마도 이것이 고전의 힘인 듯.

- 덧.
험버트의 님펫 집착증은 정신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닌 다분히 육체적인 관계를 최종적인 목적으로 한다. 험버트는 파리에 있을 때 님펫의 조건에 근접하는 (아마 열 여섯쯤 되었을 나이의)매춘부를 돈으로 사서 육체적인 관계를 즐긴 전력이 있고, 로를 호텔로 유인해서 강력한 수면제를 먹이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도 그의 목적은 더 없이 분명했으니, 로가 잠들었을 때 호텔 로비를 전전하면서 갈등하고 고민한 것도 '마지막 선을 넘을 것인가'였다.
그러므로 험버트가 직접적인 성관계를 지양하는 '그저 소아애(小兒愛)'일 뿐이라고, 로를 범한 것은 여름 캠프에서 로가 동급생 남자애와 관계를 가진 것을 알고나서였다고 험버트를 옹호해서는 안 된다. 험버트가 자신이 로의 첫번째 애인이 아니라는 얘기를 로에게 듣는 것은 관계가 끝난 뒤였다.(pp.183-188)
애석하게도 험버트의 성적 욕구는 '피부 접촉이나 포옹을 통해 정서적, 신체적 만족을 얻는' 수준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험버트를 그저 소아애가 아니라 소아성욕자라고 불러야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남자여서일까. 그래서 험버트의 무죄를 믿고 싶었던 것일까. 이러한 남성적 에고는 영화『롤리타』(1997, 애드리안 라인)에선 더욱 두드러지는데 어린 로가 알고 보니 사악한 마녀였다라는 해석은 역설적으로 남성들의 원죄 의식을 더욱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이렇게 해서 개인적 독서와 사회적 독서는 긴밀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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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4-06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이라...[롤리타]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정말 유명한!
살아가기위해 영악한? 강한 롤리타와 남자들이 충분히 심정적으로 이해된다 하더라도 결국 인생을 망치게 만든건 어른!이잖아요
요즘의 정말 영악하고 악의적인 소녀들도 사실은 어른들이, 우리가, 사회가 그들을 망가뜨리는거겠죠?

인삼밭에그아낙네 2010-04-11 10:20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아이는 어른의 거울'은 정말 적절한 표현, 적확한 의미인 것 같아요.
 
태백산맥 세트 (무선) - 전10권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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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늘의 현실이 내일의 역사가 되는 순류는 현대인들에게 다가올 세대를 위해 지나간 시대를 기록할 사명을 숙제로 안긴다. 하지만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결코 만만치 않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듯 패자의 역사는 왜곡되거나 은폐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역사는 흐른다'.

『태백산맥』은 민족의 분단 격동기를 향한 작가의 뜨거운 애정이 느껴지는 소설이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 등장인물들 간의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대화가 다소 넘침으로 인하여 감상적으로 빠져드는 감이 없지 않다.
그중에서도 미군과 빨치산을 대조군으로 놓고 비교하는 장면은 미군이 우리 정부의 국군통수권을 장악한 가슴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의 현장이었음에도 그만 웃음이 나오고 말았는데 특히 마지막 10권, 휴전 성립 후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헌영 숙청 장면에 이르렀을 때는 "아아, 이런-" 하고 말았다. 지나친 이분법적 선악 구도가 오히려 리얼리티를 와해시켜버리면서 이성적 긴장감 대신 낭만적 감상이 부각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태백산맥』을 읽을 무렵 중국의 현대소설 몇 권을 함께 읽었는데 중국소설을 읽다 보면 어른을 위한 동화를 읽는 듯한 기분이 곧잘 든다. 내용이 아니라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서 때문인데 그들이 사고하는 과정은 마치 어린애들처럼 정반합의 전형을 따르는 순진성이 있다. 그런데 중국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과『태백산맥』의 빨치산에게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정서가 바로 이 순진성이다. 동지를 위해 헌신하고, 당령이라면 의심하지 않고 무조건 충성하는 그들의 순박한 열정은 무척이나 인간적이어서 마치 윤리 교과서를 읽는 듯 하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정말 순진한가?, 물으면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한 가지를 대라고 하면 나는 아마 한동안은 '순진성'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실 분단 전쟁과 빨치산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6권 이후부터 이런 감상적인 장면이 시시때때로 등장한다. 박헌영이 숙청되는 배경을 설명하는 대화도 그렇지만 빨치산 투쟁 중에 보여주었던 이현상 남부군 대장의 휴머니티를 칭송하는 부분은 그 옛날에 우스개 소리로만 들었던, '김일성 장군은 나이 열 몇살에 나뭇잎을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는 북한 교과서 얘기만큼이나 동화적으로 읽힌다. 아마 나의 순진성이 그만큼 퇴색되어진 탓도 있을 것이고 이 소설이 실제로는 80년代에 씌어진 이유일 수도 있다. 80년代. 이 한 마디로도 참 많은 것이 설명되지 않는가.

『태백산맥』의 장점이라면 대하소설임에도 열 권이라는 숫자가 부담스럽지 않은 대중성을 빼놓을 수가 없다. 한 마디로 재미도 있고 가슴 뻐근한 감동도 있다. 다만, 소설의 전반부에서 이야기 진행이나 흐름과 상관없이 생뚱맞게 등장하는 성애 묘사는(예. 외서댁과 염상구, 하대치와 주막집 주모) 신문 연재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사뭇 아쉽게 느껴진다. 뭐, 남자들은 다르게 느낄 수도 있겠다. 사실『태백산맥』에는 여러모로 남자들의 로망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다. 남자의 의리, 남자의 신념, 그리고 강한(?) 남자 등등.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가장 애정을 느꼈던 인물은 죽산댁(염상진의 아내)과 김사용이었다. 죽산댁은 그야말로 거친 격랑의 한 시절을 온 몸으로 버텨내는, 시대를 대변하는 민중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고 김범준, 김범우 형제의 아버지 김사용은 죽산댁과는 다른 의미에서 동시대를 살았던 민중의 한 축으로 소설의 지면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거대한 산으로 다가오는 인물이었다.

소설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문학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간혹 지나치다 싶게 관념적인 혹은 감상적인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좌익과 빨치산, 제주 4.3 항쟁, (충분하지는 않지만)거제도 수용소 등 군사독재의 그늘에 묻혀서 오랫동안 왜곡된 채 은폐되어 있던 기형의 역사를 양지로 끌어내고, 근대를 살아낸 농민의 치열하고 가슴 아픈 역사를 정면으로 밀도 있게 보여주는『태백산맥』은 그 자체만으로도 문학이 지탱해야 할 사회적, 역사적 기능을 충분히 다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역사를 배우고, 역사를 바로 알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건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이고 또한 후대에게 물려줘야 할 의무이다. 역사를 안다는 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첫 번째 걸음이기 때문이다. 

- 지나가는 말. 흔히 '맑시즘'이라고 부르는 마르크스 사상의 요체는 그의 대표 저서가『자본론』인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이후 정치 경제학으로 발전하는) '경제사'다. 앨빈 토플러가『제3의 물결』에서 권력의 이동이 초기의 노동에서 (장원을 소유한)영주에게로 옮겨오는 과정을,『권력 이동』에서는 이들 권력이 근대를 지나면서 정보(information)를 차지하는 자에게 이동하는 과정을 잘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로 역사는 권력, 즉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계층 간의 엎치락 뒤치락으로 요약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기존의 계층(=자본을 소유한 권력자들)을 전복시키기 위한 선행 과정으로 계급 투쟁이 필연적이라는 점인데 이러한 계급 투쟁의 사상적 무장과 가장 잘 부합되는 것이 바로 맑시즘이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당시에 맑시즘은 계급 투쟁에 공고한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는 최고의 '주의'(-ism)였던 셈. 
아이러니한 것은 막상 맑시즘의 광풍이 몰아친 지역은 마르크스의 고향인 독일도 아니요,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유럽도 아닌 여전히 농토가 국부의 대부분을 지탱하고 있는 러시아를 비롯한 중국, 한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였다는 점이다. 왜 하필 농민이 혁명의 주체가 되었을까. 이는 맑시즘의 사상적 기초 중 유물 사관(=역사적 유물론)이 잘 설명하고 있는데 생산력의 주체, 생산 관계의 부조리, 소유의 불평등이 가장 집약되어 나타나는 대표 모델이 바로 농민과 지주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인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의 배경 역시 농노해방과 新기계 문명이 충돌하면서 이러한 계층간 불화가 극에 달하면서였다. 이로써 나치즘과 파시즘이 유럽을 집어 삼키고 있을 때 동아시아에선 맑시즘이 확산되고 있었던 배경이 설명된다.  

유물론은 역사를 필연으로 설명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역사는 거의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필연의 산물이든, 우연의 산물이든 역사는 이전의 기록 앞에 현재의 인간들을 데려다 놓는 것을 즐긴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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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래 대하소설과 관련된 얘기는 이미 시중에 차고 넘치므로 이 부분은 생략하고,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만 정리

1.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과 『한강』을 연이어 읽는 동안 꽤 자주 떠올랐던 '남자의 논리'. 신문 연재글의 특징인지 특정 에피소드에서는 여지없이 남성적인 본위(本位)가 강하게 드러난다.

2. 역사를 올바로 아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자본주의가 팽창하고 물질의 가치가 중요하게 된 베이비붐 이후의 세대일수록 자기 안의 중심을 잡는 일이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아는 것은 개인의 중심을 잡는데 가장 큰 무형의 자산이다. 정신을 위해 할 수 있는,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가치 있는 투자(=역사 바로 알기)를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3.『한강』을 두고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 주인공이 없어 글이 산만하며, 그래서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작가의 첫번째 대하소설 『태백산맥』보다 떨어진다는 평을 가끔 본다.『태백산맥』과『한강』은 읽는 관점을 달리 해야 한다.『한강』은 세태소설, 연대기에 가깝다.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독자에게 얘기를 전달하는 역할로만 읽히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한 예로 유일민, 유일표 형제는 다른 여느 인물들처럼 분단이 낳은 연좌제의 가장 큰 피해자로만 읽혀야 마땅하다.

4. 소설을 읽고 소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해방전후사의 인식』, 일명 '해전사'를 읽어봐도 좋겠다. 비슷한 제목의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역사를 보는 저술의 관점이 다르므로 주의해야 한다.

대하소설은 시작했을 때 한참에 몰아서 같이 읽는 것이 좋은데 어쩌다『아리랑』혼자 뒤처진 것이 아쉽다. 

- 조정래 대하소설 3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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