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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최윤필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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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와 관련하여, 개인적인 경험 몇 가지.

1.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스쿨버스를 운행했는데 내가 워낙 아침잠이 많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스쿨버스를 놓치고 시내버스로 등교했다. 그날도 스쿨버스를 놓치고 시내버스를 탄 날이었다. 출근 시간 버스는 미어터지는 승객들로 말 그대로 콩나물시루가 되어 다음 정류소에 도착했고,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버스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버스로 몰려들었다. 아우성으로 시끄러운 곳은 버스 바깥만이 아니었다. 공간이라고는 머리 위 천장 밖에 안 남은 버스 안에서 기어이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기사아저씨, 그만 태워요!"

2. 어느 날 냉장고에서 요구르트를 꺼냈는데 별 생각 없이 들여다 본 병 표면의 유통기한이 이틀이나 지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걸 마셔도 될까, 고민에 빠졌다.

3. 아마 할로윈 위크였던 걸로 기억한다. S와 일정에 없던 Thousand Islands를 향해 갑자기 출발한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1000섬에 있다는 맥도날드 회장의 별장을 보러 가자'가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출발은 산뜻하고 경쾌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여행의 끝은 그다지 산뜻하지 못했다. 어디에서 길을 잘못 들었는지 지평선 너머는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데도 섬은커녕 물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기껏 나선 길에 아무 것도 못 보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계속 앞으로 앞으로 달리는데 어느 순간 어둑어둑해진 도로 저 앞으로 반짝이는 불빛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오호라, 저기구나, 좋아하며 얼른 그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차를 되돌리기엔 이미 늦은 지점까지 가서야 깨달았다. 그곳은 맥도날드 회장의 별장이 있다는 1000섬이 아니라 캐나다로 넘어가는 국경이었던 것이다. 일방통행 도로를 하나씩 양쪽에 끼고 가운데 커다란 단층 회색 건물 하나가 전부인 그곳이 미국과 캐나다를 가르는 국경이었다. 단순한 생각으로 국경을 통과하기가 무섭게 차를 빙그르르- 되돌려 그대로 속력을 내려는 순간 초소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영화에서나 듣던 "Freeze"소리를 들으며 반 강제로 차에서 내린 우리는 그제야 둘 다 여권도 학생증도 안 챙긴 것을 알았고 별 수 없이 국경 이민국 사무실에서 여권 번호를 불러 주고도 일 없이 2시간이나 붙들려 있다가 풀려날 수 있었다. 

이렇듯 살아오는 동안 나는 많은 경계를 만났고 경계 위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며 그중에는 의식/무의식적으로 경계를 들락날락 한 적도 부지기수였다. 물론 사는 동안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저와 같은 물적, 심적 경계와 수없이 마주칠 것이다.
경계는 우리의 의식과 생활, 우리가 누리는 물질세계, 정신세계 어디에도 존재한다. 다만 그것의 속성이 워낙 모호하고 희미하여 미처 못 느낄 뿐, 실제로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의 간섭을 받으면서 산다. 그러므로 경계의 바깥과 안을 가르는 것도 의미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저자가 제목으로 선택한 단어 '바깥'의 의미가 확대되는 것을 걱정하는 것도 일견 이해가 갈 듯도 하다.
저자가 선택한 것은 경계가 가르는 두 방향 중에서도 '바깥'이다. 그래서 제목도『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이다. 보통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은 '안으로 들어간다' 또는 '바깥으로 나간다'인데, '안'과 '바깥'이라는 단어의 쓰임새가 원래 그러하다. 그런데도 저자는 굳이 '바깥으로 들어갔다'고 쓴다. 간단한 표현의 차이일 뿐이지만 이 간단한 차이로 경계의 이쪽과 저쪽 즉, 안과 밖을 어느 한쪽의 소외된 공간이 아닌 수평적 공간으로 보고자 하는 저자의 배려가 읽힌다.
책을 읽으면서 '바깥'의 의미가 선뜻 와 닿지 않았는데 세 번째 챕터인 '퇴역마'에서 이 책의 제목 '바깥'의 단어의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막걸리'에 이르렀을 때 '바깥'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졌다. 그것은 물질일 수도 있고, 미추일 수도 있고, 역사일 수도 있다. 자의와 상관없이 바깥으로 밀려난 것도 있을 것이고, 스스로 바깥에 자리 잡았을 수도 있다. 밀려난 것들은 안으로부터 소외된 것일 테고, 스스로 자리 잡은 것들은 안을 밀어낸 것일 터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곳에도 희망은 있다. 안의 바깥은 또 다른 새로운 '안'이 되어 자생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10여 년 전이던가, M군이 '컬트'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나는 아마 "소수의 마니아적인 취미'라는 내용의 대답을 했던 것 같은데 그러자 M군이 "그럼 지금은 컬트지만 이후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아지면 컬트가 아닌 게 되는 거냐"고 되물었던 것이 기억난다. 기실 주류와 비주류, 안과 바깥을 나누는 것은 내 편, 네 편 나누는 것만큼이나 의미 없는 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경계에 무관심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수평적 사고는 양쪽을 모두 고르게 보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니 미리부터 문을 꼭꼭 걸어 잠글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안과 바깥이 자유롭게 흐르는 것. 결국 중요한 건 소통이니까.

사람은 누구나 사물에 관하여 일정 부분 나름의 강박 증세를 가지고 있기 마련인데 내 강박의 8할 이상은 책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애서가보다 공서가에 가까운 나는 책을 그야말로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데 당연히 책에 밑줄을 긋는다는 건 상상도 못 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밑줄을 긋고 싶은 충동이 여러 번 일었다. 일단 책을 펼치자마자 마주치는 책머리부터 저자의 유혹이 만만치 않다. 저자가 읽었다는 다니엘 켈만의 소설을 나는 아직 읽어 보지 않았으나 저자가 인용한, 책에 밑줄을 쳤다는 부분, '진실은 오로지 분위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거야. 그려진 형태가 아니라 색채 속에. 정확하게 포착된 소실점은 진실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에 나 역시 주저 없이 밑줄을 긋고 싶었다. 물론 나는 밑줄 대신 포스트잇을 붙였지만.
말이 나온 김에 포스트잇을 붙인 문장 두 개를 더 인용한다.

물론 우습다는 건 '과거의 미욱함'을 두고 한 말이다.
절망은 감정의 거스러미이고, 세상 어디에도 논리적 절망이란 없다. 그리고 우스운 절망, 우스워할 만한 타인의 절망도 없다. - p.159


세계시장에 진출하려는 막걸리 경쟁의 양상이 지역 단위 양조장까지 질식시킬 정도로 '와일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경쟁의 논리란 본래의 의미와 달리 힘센 자들이 사후적으로 펼치는 패권의 논리인 경우가 많고, 그 논리는 문화의 본래적 의미에 비춰 비문화적이거나 반문화적이기 쉽기 때문이다. - pp.324-326


책이 예쁘다. 제목은 더 예쁘다. 내용은 말 할 것도 없다. 썩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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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1인용 식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1인용 식탁
윤고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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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아홉 편의 단편으로 채워진『1인용 식탁』은 한 마디로 '강박'에 관해 이야기하는 소설집이다.

어느 날 무리로부터 소외되면서 혼자 먹는 밥에 익숙해지기 위해 학원을 끊는 여자(1인용 식탁), 빈대를 퇴치하기 빈대에 집착하는 남자(달콤한 휴가), 현실 곳곳에 숨겨져 있는 인베이더 그래픽을 찾아 나서는 남자(인베이더 그래픽), 꿈을 팔기 위해 꿈을 꾸는 남자(박현몽 꿈 철학관), 폭설 속 러브 모텔에 갇힌 남자(로드킬), 집을 떠나지 못하고 아이를 기다리는 여자(타임캡슐 1994), 아이슬란드에 가기 위해 서울을 떠나지 못하는 여자(아이슬란드), 몸 어딘가에 구멍을 뚫는 것에 집착하는 여자와 그 여자의 피어싱에 집착하는 남자(피어싱), 엄마의 유기농 집착에 맞서는 홍도의 인스턴트 반항(홍도야 울지 마라)까지.
아홉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내는 한 목소리는 바로 '강박'이다.

손자병법 모공편에 등장하는 '지피지기백전불퇴(知彼知己百戰不殆)'는 말하자면 강박의 긍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한자 성어이다. 반면「달콤한 휴가」는 말하자면 이 한자 성어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예로, 빈대를 완벽하게 퇴치하고자 하면 할수록 빈대에 대해 잘아야 하는데 결국 적을 알고자 하는 열성이 지나치면서 빈대라는 곤충에게 의식이 갇혀 버리는 부작용이 발생해 버린다.
물론 모든 강박이 이렇듯 심각하고 병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흔한 예로 가방을 사려고 계획을 세우면 그날로부터 거리를 돌아다니는 가방만 온통 눈에 들어오는 경험 정도는 누구나 가지고 있을 터인데 이 역시 가벼운 강박에 해당한다. 이렇듯 살다 보면 누구나 일말의 강박을 지니게 되거나 경험하게 되는데 소설집『1인용 식탁』에는 이러한 일상과 밀접한 여러 강박이 등장한다. 또한 소설적 상상력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강박에 익숙해지는 순간부터 강박이 사라질까봐 오히려 두려워하게 되는 심리를 관찰하는데(「1인용 식탁」「아이슬란드」참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공포로 인하여 강박증을 얻게 되는 인물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이 강박증에 의지하여 일상의 공포를 극복하려 하고 결국 그로 인해 일상이 파괴되는 비극적 결말까지 보여준다(「달콤한휴가」「피어싱」).
전개와 결말이 카프카 적이라고 할까, 일상이 공포로 돌변하는 순간의 경계가 매우 모호하고, 경계가 모호하고 비상식적일수록 그것에 대처하는 인물들의 반응 역시 비일상적이고 비상식적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로드킬」참고)
이에 비하면「홍도야 울지 마라」에 등장하는 강박은 가볍고 흥겹다. 유기농을 고집하는 엄마와 학교 앞 인스턴트 음식(달고나, 솜사탕 등)으로 엄마의 유기농 강박에 도전하는 홍도는 살풋 웃음 짓게 만든다.

읽고 나서 "응?" 하는 단편이 두어 편 있다. 영화든 소설이든 작가는 작품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얘기하고 보여주어야 한다. 나의 독해력이 떨어져서일 수도 있으나 얼핏 작가의 혼잣말이 읽히는 부분이 없지 않다.
하나 더. 이건 나한테만 해당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국내 소설을 읽을 때 독서를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은유법'인데「피어싱」의 경우 유독 은유가 과다하여 읽으면서 요철을 많이 느낀 단편이다.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야 나는 왜 이 수료증을 한 번에 받는 사람들이 5퍼센트에 그치는지 알 것 같았다. 85퍼센트의 사람들이 두려워한 것은 시험이 아니었다. 시험 이후에 찾아올 진짜 현실이었다. (중략) 내가 배우고자 했던 것은 혼자 자유롭게 먹는 방법이었으나, 정작 내가 얻은 것은 수강 기간 동안 내가 혼자 먹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위안이었다. 1인으로 구성된 체인점 같은 것. - pp.42-43,「1인용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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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독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는 점에서 독서는 라이벌이 함께 뛰는 마라톤과 비슷하다. 작가가 너무 앞서 뛰면 뒤따라가는 독자가 지치고, 작가가 독자의 뒤에서 뛰면 앞에서 뛰는 독자가 흥미를 잃어 버린다. 그러니 가장 재미있는 독서는 작가와 독자가 비슷하게 뛰는 것인데 독자층에 또렷한 경계를 긋는 전문서적이 아닌 소설(문학)은 더욱 그러하다.
정치, 경제, 종교는 싸움과 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대표적인 화제다. 이 세 가지 화제를 문학에 적용시킨다면 그중 예민하고 민감한 주제는 단연 종교일텐데 그 이유는 작가의 종교가 대개 화자를 구도자의 위치에 서게 하기 때문.
그러니 종교적인 피드백을 가지고 글쓰기를 하는 작가의 소설은 아무래도 작가가 심어 놓은 상징과 은유를 올바르게 읽어내는 것에 한계가 있는데 이는 읽는 사람의 편견 때문일 수도 있고, 작가의 고집(=보수적 편향성) 때문일 수도 있다.
이승우의 소설은 개신교를 빼놓고는 얘기가 안 된다. 그의 소설 주제를 지배하는 것은 종교적 원죄 의식과 구도(求道)이다. 그렇다고 그의 많은 단편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니 미리 그의 소설 읽기에 금을 그을 필요는 없겠다.
이승우의 소설은 주제면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어느날 일상성이 깨어지고 비일상이 일상이 되어버리는 카프카式 부조리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에게서 비극적 전형성을 집요하게 캐내는 종교적 원죄 의식이다.
그의 소설은 거의 이 두 가지 틀을 벗어나지 않는데 그러다 보니 인물과 사건은 대체로 다음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 정서적으로 어딘가 한군데 부서지고 부족한 Loser가 등장한다. 등장인물 대부분 이야기를 '털어 놓고' 싶은 사람들, 그 이야기를 기꺼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 카프카式  서사구조. 갑작스러운 소환과 그것에 따른 비극적인 결말이 예정되어 있는 개인의 소외 혹은 격리

단편집『심인광고』중 특히 좋았던 단편은 동명의「심인광고」「오토바이」「터널」이었다.
단편집『검은 나무』의 수록작 중「선고」와「사령」은 카프카 정서가 강한 단편. 특히 카프카 인용으로 시작하는 첫번째 수록 단편「사령」은 해설에서도 언급하고 있듯 카프카의『성』과 유사하다. 
「동굴」에 등장하는 화자의 독백(p.224, 아래 인용)은 일본 영화『기묘한 이야기』의 한 에피소드였던 '묶여있는 개'와 유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와 배부른 돼지의 차이는 윤리가 아니라 삶의 문제가 되면 한층 난해해진다. 
작가의 소설 중 가장 좋았던 것은 아무래도 나를 처음 작가에게로 이끈「오래된 일기」다.(『오래된 일기』수록)  

-책에 밑줄긋기

(…)나의 추리는 거기까지 이르렀다. 추리의 과정에서 나 자신 다소 흥분하고 조급해하였던 사실을 눈치채고 나는 좀 머쓱해졌다. 사람이 어떤, 특정한 일에 흥분할 때 그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 p.108,「일식에 대하여」

나는 유리창을 통해 창밖 풍경을 바라보면서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집에 감금되어 있는 신분이 낮은 남자의 신세를 떠올렸다. 남자의 신분은 화려한 집의 규모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자기 신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크고 화려한 저택에서 턱없이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잠자리까지가 그러하다. 그 크고 화려한 집에서 그는 제왕처럼 지낸다. 아무도 그를 제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 집으로부터 한 발짝도 나가지는 못한다. 그것은 금지되어 있다. 하긴 그가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는 그 집을 나가는 순간 이 집의 온갖 특혜를 등지고 자기 신분에 어울리는 비참한 신세로 돌아가야 한다. 자, 그러면 이 호화스러운 집에 갇혀서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는 이 신분 낮은 남자는 행복한가, 불행한가……. - p.224,「동굴」
* 이상『검은 나무』수록

 

저놈이 나를 버렸다, 저 나쁜 놈이…… 하고 어머니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쁜 놈이란 건 맞지만, 내가 어머니를 버렸다는 건 맞지 않다. 모든 나쁜 놈들이 어머니를 버리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를 버리지 않았다고 나쁜 놈이 아닌 것도 물론 아니다. '나쁜 놈'이라는 건 한 인물에 대한 개인의 주관적인 평가이다. 평가는 여러 가지 사실, 또는 특정한 사실에 기초해서, 심지어는 사실에 기초하지 않고도 내려진다. 어쨌든 그것은 누군가에 대한 '그의'평가이다. 그러니까 '나쁜 놈'은 그렇게 불린 사람보다 그렇게 부른 사람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한다. 예컨대 누군가가 나쁜 것이 아니라(나쁠 수도 있지만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가 누군가를 버렸다고 말하는 건 사뭇 다르다. 우리는 버렸다는 행위가 있을 때에만 버렸다는 말을 할 수 있다. 판단이 아니라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최소한 버리지는 않았으므로 어머니의 그런 비난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중략) - pp.179-180,「오토바이」
*『심인광고』수록

- 이승우 소설집
그 사이 신간『한낮의 시선』이 나왔다. 오랜만의 장편소설인데 아직 읽어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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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거리가 책읽기에 편중되었던,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발하게 보급되지 않았던 시기에 부족하지 않은 양서(良書)와 함께 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던 것에 부모님께 늘 감사하다.
나는 아직까지도 최고의 연애 소설은,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라고 믿는다.
고백하자면 처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  『부활』을 읽었을 때, 내 가슴을 떨리게 하고 내 정서를 건드렸던 것은 제정러시아의 전후사를 관통하는 이념이나 휴머니즘, 시대적인 고찰 같은 심오한 것이 아니었다. 나를 미친듯이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이국의 배경과 함께 펼쳐지는 불륜과 비극적인 사랑 그리고 삼각관계였다.
그러나 이들 소설이 그저 전쟁통에 귀족들이 연애하고, 불륜을 벌이고, 방탕한 귀족과 매춘부의 신분을 넘나드는 그렇고 그런 사랑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면 톨스토이 사후 1세기가 다 되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은 그의 소설을 읽어 볼 기회조차 갖지 못 했을 것이다.
이것이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고전의 힘일까.
동시대를 살면서 자신의 시대를 통찰하고 관조하려고 노력했던 작가의 시선은 시대의 통속 안에 머무르지 않고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자생한다. 이러한 자생력이야말로 고전 문학의 힘이고 통속 소설과 고전 소설을 가르는 차이일 것이다. 그리하여 소설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문학은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시선으로 사물을 조명하면서 기나긴 숨결의 장편소설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 나 자신의 모든 구상들을 결합시킬 수 있다. - 레프 톨스토이, 『부활』집필 중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저런 이유로 톨스토이의 러시아는 내게 냉전 체제 역사 속 소련이라는 이미지보다는, 소설이 가져다 준 상상속에서 존재했던 한 세기 전의 설원으로 뒤덮인 광활하고 거대한 시베리아 대륙으로 성큼 다가왔다는 점이다. 또한 그때의 정서적 울림은 쇼스타코비치의 왈츠를 통해서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영화 《Eyes wide shut》의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이(내겐 그랬다) 숨 쉴 틈도 없이 곧장 까만 화면으로 바뀌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위로 흐르던 『Second Waltz』는 이후 국내 영화, 드라마 등에 삽입되면서 이제 우리나라에선 완전히 대중적인 레퍼토리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국내에서 쇼스타코비치의 『Second Waltz』를 들을 수 있는 앨범중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앨범은 아마 Chailly와 Jansons가 지휘를 맡은 앨범이 아닐까 싶다.


Decca에서 발매된 Riccardo Chailly의 『Shostakovich The Jazz Album』은(개인적으로 중간 두 곡 정도 늘 스킵하는 곡이 있지만) Jazz suit 1, 2번 전곡이 들어있다. 전반적인 곡들이 모두 즐기기에 부담없고 무난한 레퍼토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Second Waltz는 이 앨범의 13번 트랙에 있다.

Chailly가 가볍다면 Jansons는 진지하다. Second Waltz를 좀 더 제대로 감상하고 싶다면 개인적으로 EMI에서 발매된 Mariss Jansons의 『Symphony No.11, ‘1905’』를 추천한다. 이 앨범에는 11번 심포니말고도 Jazz suit 1번 전곡과, suit 2번 중 6번이 수록되어 있는데 Second Waltz(6번)는 8번 트랙에 있다. Chailly와 비교해서 들어보면 지휘자의 해석이 같은 곡을 어떻게 다르게 표현하는지 알 수 있다.
조심스럽지만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감상은 Chailly에 비해 Jansons의 지휘가 훨씬 응집력이 있고 웅장한 힘이 느껴진다. 톨스토이의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상상했던 그 차갑고 서늘한 대륙처럼.

전혜린은 유고 에세이『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심포니 5번을 즐겨듣는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 때 틀어 놓은 판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심포니 제5번이다. 왜 그런지 그걸 듣고 있으면 생각이 정돈되어오는 것 같다. 특히 무언지 웅장하고 엄숙한 시작과 도중의 수많은 군화의 행진 같은 장조가 몹시 마음에 든다. 개인적인 사소한 것, 일상적인 것을 넘어서서 더 큰길로 눈을 돌리라고 이 음악은 말해주는 것만 같다(…). - pp.169-170,『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대목을 읽고 언젠가 쇼스타코비치의 15개의 심포니를 꼭 다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앨리스와 빌리, 쇼스타코비치, 전혜린... 이들이 자신의 삶에서 공통적으로 원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순간이 아니었을까...

전에는 완벽한 순간을 여러 번 맛보았다.
그 순간 때문에 우리가 긴 생을 견딜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을…….
- p.140,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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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8 제너시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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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보다 더 인간다운'은 로봇SF 장르의 보편적인 주제인데, 이 말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인간답지 못하여'를 강조하는 것처럼 들린다. 참고로 안드로이드라는 개념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270년이라고 한다.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는 SF물 중 (개인적으로)최고로 꼽는 것은 단연 리들리 스콧의《블레이드 러너》다.

"이 모든 순간들이 시간속에 묻혀버리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죽을 시간이 됐어...(All those momen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time to die...)."

쏟아지는 빗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4년의 삶을 마무리하는 로이의 모습을 보며 로이에게 '인간성'이 없다고 과연 단언할 수 있을까. 한편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고 있는 레이첼은 데커드에게 왜 자신이 인간인가(인간일 수 밖에 없는가)를 계속해서 설명하는데, 인간이 자신의 인간성을 믿지 못하여 고민하는 동안 안드로이드 역시 자신이 왜 인간과 다르다는 것인가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은 로봇SF의 고전적인 테제다. 물론 인간과 안드로이드 사이에 일어나는 이러한 문답은『2058제네시스』에서도 이어진다.

『2058제네시스』는 목차가 따로 없고 1교시, 2교시, 3교시, 4교시로 전개되는데, 1교시가 끝날 때마다 휴식 시간이 있다. 이는 수업이 아닌 시험 시간의 분류이며, 국가 최고 기관인 '학술원' 시험에 응시한 아낙시멘더(이후 '아낙스')의 시험 과정이 전체의 틀이고, 아담과 안드로이드 아트의 얘기가 내용의 줄기를 이루는 액자소설이다.
시험은 구술과 면접으로 이루어지는데 아낙스가 준비한 과제가 바로 '아담 포드'이다. 이 책의 원제 'Genesis'에 역자가 덧붙인 '2058'은 아담의 출생 년도를 뜻한다. 

지구에 불어닥친 대전쟁과 전염병 이후 플라톤은 섬에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섬 주위를 방벽으로 둘러싼 다음 외부로부터의 침입, 유입을 일체 거부하고 저지한다. 하지만 이제껏 없었던 완벽한 세상처럼 보였던 플라톤의 제국도 공포와 위기의 시대가 지나가자 불만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는 얼핏 오랜 전쟁을 끝낸 완벽한 영웅이 우주에서 가장 완벽한 세상을 만들지만 점차 이 '완벽함'조차 불만으로 느끼는 군상들을 보여준 프랭크 허버트의『듄』의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데, 물론 아트레이드의 세계와 플라톤의 세계는 전혀 다르다. 플라톤 제국의 문제점은 플라톤이 이상적인 사회를 모든 것이 통제되는 사회와 동일한 개념으로 정의해버림으로써 시민의 자유를 제한했다는 데에 있다. 자유란 인간이 누리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데, 인간을 위한 이상적인 사회를 위해 인간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역설이 생겨난 셈.
그리고 이러한 역설이 낳은 것이 바로 아담 포드이다. 아담은 제국이 가장 원하지 않는 인간형인 '반항하는 인간'이지만 급증하는 시민들의 불만에 직면하여 아담을 처형할 수도, 풀어줄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 정부는 가장 진보된 안드로이드 아트의 테스트 상대로 아담을 활용하기로 결정한다. 즉 살려는 두되, 자유를 빼앗는 것이다. 그리고 아담과 아트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은 부분으로 쪼개면 모두 우연에 의해 발생된 것 같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보면 어쩐지 필연성이 느껴진다.
아낙스는 시험관과의 문답 과정에서 점차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인과율의 신화'가 그것이다. 

인과율의 신화: 이 말은 모든 일은 원인에서 발생한 결과이며, 원인이 없이는 아무 것도 생기지 못한다는 인과율의 법칙을 맹신하는 것을 비꼬는 말이다. 맨 첫 원인도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데에서 인과율의 허구가 발견된다. - p.27,『2058제네시스』 

아낙스는 인과율에 부정적인 입장이지만 문답이 거듭될수록 아낙스의 주장은 오히려 인과의 필연성을 좇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로봇SF를 접할 때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픽션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로봇, 그러니까 안드로이드는 대부분 긍정적인 호감을 끌어낸다. 물론 이 호감의 배경은 안드로이드의 '인간성(비슷한 것)'에 있다. 인간의 상상물이니 당연한 얘기일 수도 있으나 이유야 어떻든 아담과 설전을 벌이는 아트는 근래 내가 만난 안드로이드 중 가장 호감 가는 녀석이었다. 유머 감각이 넘치고, 때로는 신랄하며, (고집스러운 아담 때문에)때로 절망도 하는 아트의 모습은 '인간적'이라는 단어 외에는 표현이 안 된다. - 불만이 있다면 지극히 미국인스럽다는 것 정도. 

책 전반부에선 철학자, 기술자, 군인, 노동자로 나뉘는 시민의 계급이 출생과 동시에 유전자의 게놈 정보를 해독하여 분류된다는 점에서 영화《가타카》가 연상되었고, 책 중반의 아담의 생애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부분에선 감정마저도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이퀼리브리엄》이, 그리고 책이 끝나갈 무렵에는, 책 내용과 상관없이, 완벽한 세상을 꾸며주었더니 자꾸만 불만이 속출하여 불완전한 세상으로 시스템을 수정하였다는 영화《매트릭스》의 세계관이 떠오른다. 우울한 얘기지만 아무래도 SF가 상상하는 미래는 디스토피아(dystopia)에 근접해있는 듯 하다. 

아는 만큼 읽히는 책이다. 책을 얼마쯤 읽었을 때, 이 책은 재독하는 책이 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의 반전도 굉장히 인상적이다. - 중간 지점 쯤에서 마주친 어느 문장에, 어?, 하다가 마지막 장을 펼쳐보는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원래 나는 스포일링(당하는 것)을 즐기지만 이는 영화에 국한되는 것이지 책은 별개다. 마지막 장을 미리 펼쳐보는 짓을 하는 '책'은 만화책이 유일한데 이 역시도 해피엔딩이 아니면 안 읽기 때문에 생겨난 버릇이다.

인간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부처는 무엇입니까" 묻는 제자에게 "똥막대기다"했다는 스승의 선문답을 떠올리게 한다. 원래 이런 문제는 정답이 없는 법이다.
책을 읽고 여운이 길게 남는다는 의미는 독서 중에 자극받은 지적 호기심이 독서가 끝난 후에도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 역시 그러하다. SF에 거부감이 없는 이들에게 일독해 볼 것을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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