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부드러워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5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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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읽기'의 마지막 주자 『밤은 부드러워라』는 피츠제럴드가 생전에 발표한 네 권의 장편소설 중 마지막 소설이다.


이 소설은 예전에 몇 페이지 읽다 포기한 이력이 있는데 세월이 흐르고 역자가 달라졌어도 헐리우드 신성 로즈메리의 맥락을 알 수 없는 지리한 서술로 가득한 초반부는 '의식 흐름 기법'의 기시감을 불러오며 여전히 인내심을 시험한다. 하지만 초반부를 견디면, 정확히 78p 부터 페이지터너 구간이 시작된다. 인내심이 지금보다 보잘 것 없던 과거엔 발을 딛지 못했던 신대륙이다.


78p는 여름을 즐기려고 리비에라 해변에 모여든 무리들 중 한 명인 매키스코 부인이 자신이 목격한 것을 무리에게 알리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다 결국 사달을 일으키는 해프닝으로 시작하는데, 매키스코 부인은 아마도 무리의 중심을 자처하며 뭇사람들의 애정과 질시를 받는 다이버 부부의 비밀을 목격한 듯 보인다. 진입장벽이던 로즈메리의 지루한 의식흐름이 끝나고 바야흐로 플롯의 세계로 진입한 것인데 이때부터 독서가 한층 가볍고 흥미로워진다. 달리 '사건'이 소설의 3대 요소이겠는가.


하지만 『밤은 부드러워라』를 읽는 동안 집중을 방해한 진짜 복병은 초반부 로즈메리의 지루한 의식흐름이 아니라 1부와 2부를 읽는 틈틈이 딕 다이버의 엔딩이 궁금해서 찾아본 도서 리뷰와 책 후면 역자 해설이었다. 리뷰 다수와 역자 해설이 입을 모아 딕 다이버의 추락과 딕 없이도 건재한 니콜을 증언했고 이는 이미 익숙한 '개츠비 엔딩'이다. 나로선 가장 선호하지 않는 엔딩이고 따라서 소설을 읽는 시간은 취미가 아니라 노동이 되어 버린다.


피츠제럴드 소설을 연이어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피츠제럴드 잘알'을 자처하게 되는데 장르판에선 김치찌개, 업계에선 자가복제라고 하는 피츠제럴드식 문법 때문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포함 여러 단편을 읽는 동안 나는 재능있고 건실하며 건강한 의지와 잘생긴 외형과 미래를 향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에너지로 무장하고 막 인생의 항로 출발점에 선 청년이 '하필' 그녀와 사랑에 빠지면서 스스로 나락의 길을 가는 기승전결을 이미 충분히 넘치게 봤다. 그러니 나는 그러한 서사의 정점에 선 인물인 딕 다이버가 제이 개츠비와 다른 선택을 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물론 제이 개츠비와 달리 딕 다이버가 직접 화자인 요소도 독자의 감정이입을 한층 강화할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완독에 이르는 동안 '괴로운 걸 참고 소설을 계속 읽는 건 일종의 자해 아닌가, 도대체 나는 왜 매번 픽션과 거리두기에 실패하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와 M에게 수도 없이 던졌는데, 장담하건대 피츠제럴드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르는 M은 아마도 피츠제럴드와 피츠제럴드의 소설에 대해 대한민국 평균 독자보다 더 많이 알 거다. 내가 수 개월을 압박면접 보듯이 지치지도 않고 틈만 나면 떠들었는데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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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 다이버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정신의학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미래가 기대되는 전도유망한 스물여섯 살 청년이다. 딕은 우연한 인연으로 스위스 정신병원에서 어리고 예쁘고 부유하지만 정신분열을 앓고 있는 니콜을 만나고 니콜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지만 직업적인 윤리와 동정이 전부였던 딕의 이성은 니콜의 구애를 거절한다. 그러나 니콜의 거듭된 구애 과정에서 사랑이 싹트고 거기에 직업적인 사명감 혹은 책임감이 더해지며 딕은 건실하게 쌓던 미래의 전망과 그것으로부터 도래할 직업적인 성취를 포기하고 니콜과 결혼을 감행한다. 이때 딕의 선택이 가지는 무게는 프란츠의 충고로 가늠할 수 있다.


"잠깐." 돔러가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프란츠는 멈추려 하지 않았다. "뭐! 그래서 주치의나 간호사 노릇을 하면서 인생의 반을 바치겠다고… 절대 안 돼! 이런 사례가 어떤 건지 나는 잘 알아. 처음 한 번 발병으로 끝이 나는 건 스무 번에 한 번이야ㅡ다시 그 여자를 보지 않는 게 좋아!"

"어떻게 생각하시오?" 돔러가 딕에게 물었다.

"물론 프란츠 말이 맞습니다." (p.237)

 

『밤은 부드러워라』는 3부로 구성되었는데 딕과 니콜이 결혼에 이르는 내용은 2부에서 과거의 파편으로 등장하고, 1부는 리비에라 해변에 여름 휴가를 간 로즈메리가 역시 휴가를 보내려고 모여든 사람들과 그들 중심에 있는 매력적인 다이버 부부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 3부는 딕과 니콜의 결혼이 파국에 이루는 과정을 다룬다.


앞서 쓴 것처럼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 나이에 어울리는 치기와 미숙함마저 사랑스러웠던 딕 다이버의 운명이 다른 개츠비들과 다르기를 바랐으나 독서 틈틈이 찾아본 리뷰는 죄다 알콜중독자가 된 딕이 부유한 상속녀 니콜에게 버림받고 나락에 빠지는 엔딩으로 가득했다. 심지어 역자는 해설에서 닉의 결말을 두고 추락과 나락이라는 단어를 연이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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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와 역자 해설에 내가 속았구나 예감한 건 파리에서 우연히 만난 딕과 베이비(니콜의 언니)의 대화 장면에서였다.


"내가 니콜한테 맞지 않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지요." 딕이 말했다. "그렇다 해도 니콜은 아마 나 같은 유형의 사람, 의지할 수 있는ㅡ무한정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 결혼했을 겁니다."

"그애가 다른 사람과 살면 더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베이비가 갑자기 마음속 생각을 입 밖에 냈다. "물론 지금이라도 그렇게 할 수는 있죠." (p.356)


중요한 건 이 대화가 등장한 시점인데 딕이 '니콜에겐 굳이 내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말을 하는 장면은 알콜중독인 친우 에이브가 주류도매점에서 맞아 죽고 연이어 아버지가 노환으로 사망한 이후 등장한다. 딕은 에이브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몹시 비통해하는데 묵고 있던 숙소 밖으로 어느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걸 보는 딕의 모습에서 딕이 느끼는 비애감이 잘 드러난다.


그 얼굴들은 의례적인 슬픔을 보여주었지만, 딕은 에이브의 죽음, 그리고 십 년 전 자신의 젊음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잠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p.332)


또한 비참했던 에이브와 달리 평생 가난했으나 마지막까지 선한 의지로 살았던 아버지의 평화로웠던 죽음 역시도 딕이 잊고 있었던 또는 외면하고 있었던 무언가를 흔들어 깨운다.


두 사람의 죽음이 딕의 인생에서 극적인 변곡점이 된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후 딕은 미국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파리에 들러 더 젊고 더 충동적일 때도 유혹의 선은 넘지 않았던 로즈메리와 밤을 보내고(리비에라에서 헤어지고 무려 3년이 지난 시점이다), 스위스의 집으로 돌아와서는 공공연하게 알콜의존증을 과시한다. 자제력과 품위를 잃고 망가지는 딕의 모습에 가장 실망한 사람은 물론 니콜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니콜은 위화감을 느끼는데 이 과정의 서스펜스가 제법 묵직하다. 


그녀의 달콤한 위협이 균형을 흔들며 그를 앞으로 잡아당겼다. 

"당신은 전에도 나를 도와줬어요ㅡ이번에도 도와줄 수 있어요."

"옛날과 똑같은 방식으로 도와줄 수 있을 뿐이야."

"누군가는 나를 도와줄 수 있어요."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당신 스스로가 가장 잘 도와줄 수 있지. 아이들을 찾아보자고." (p.317)


그러나 그녀는 다음날 아침 딕과 함께 해변에 가면서 딕이 필사적으로 어떤 해법을 궁리하고 있다는 새로운 불안에 사로잡혔다. 골딩의 요트에서 저녁을 보낸 이후로 그녀는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p.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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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은 어느 때는 구제할 길 없는 알콜중독자였다가 어느 때는 모두가 기억하는 차분하고 이성적이고 따뜻한 중재자였다가, 양극단을 오가는데 기억할 것은 정신의학자 딕은 알콜중독자 친우를 가장 가까이서 10년을 지켜본 당사자라는 사실이다.


어느 새벽에 경찰의 연락을 받고 달려간 딕은 한밤에 소동을 일으켜 곤란에 빠진 메리 노스 일행을 돕는다. 만취한 딕의 무례한 언사로 둘의 관계가 냉랭해진 시기에 일어난 해프닝인데 이때 문제를 해결하는 딕은 놀라울 정도로 정상적이다.


"우리를 도와주던 날 밤에 선생님은 예전과 같았어요." 그녀가 말하고 있었다. "다만 마지막에 캐럴라인 때문에 몹시 불쾌한 표정이었지만. 왜 늘 그렇게 친절하지 않으신 거예요? 그럴 수 있으면서." (pp.507-508)


소설을 읽기 전 소문으로 '불륜과 알콜중독으로 끝장난 딕 다이버의 상류층 경험기'인 줄로만 알았던 『밤은 부드러워라』에 나더러 태그를 붙이라면 불륜, 재즈시대의 몰락, 아메리칸 드림의 신기루 따위가 아닌 #정통고딕을 붙일 것이다. 아마 피츠제럴드도 이 태그를 반기지 않을까. 참고로 단편 「얼음 궁전」에서 고딕 소설에도 재능이 있는 피츠제럴드를 이미 확인한 바 있다.


하얀 물살이 잡아챘다가 다시 찬란한 하늘로 던지는 빛에 드러난 그의 창백한 얼굴에서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곤혹스러움을 드러내는 주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초연해 보였다. 그의 눈은 곧 움직일 체스의 말로 향하듯 서서히 그녀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똑같이 느린 동작으로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가까이 끌었다. 

"당신은 나를 망쳤어, 그렇지?" 그가 온화하게 물었다. "그럼 우리 둘 다 망한 거야. 그러니ㅡ"

그녀는 공포로 몸이 차가웠다. (p.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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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부드러워라』 완독 후 소설 비평에 대해 생각해봤다. '읽지 않은 소설을 말하는 것'을 오독에 포함시키는 것에 관해서도. '게으른 독서'에 관해서도.


피츠제럴드가 자가복제가 강한 작가라는 이유로 '개츠비군 소설'에 일률적으로 '개츠비 비평'을 붙여넣기 하는 것은 게으르고 책임 없는 비평이다.


많은 리뷰와 해설과 달리 딕 다이버는 추락하지 않는다.

여타 개츠비들과 달리 딕 다이버는 늦지 않게 자신의 운명의 항로를 튼다. 딕은 성공적으로 니콜을 다른 남자에게 인계하고 니콜의 남편과 주치의라는 감옥에서 벗어난다. 종장에서 니콜이 점점 더 작은 소도시로 옮겨가는 딕의 근황을 알리는데 이를 두고 딕의 나락/추락이라는 해석은 실체 없는 유령이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로즈메리를 만나러 파리로 가는 여정에서 소도시를 경유할 때 작은 소도시에 대한 딕의 애정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자기보다 더 어리고 예쁜 여자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알콜중독자가 되어 본인 처지를 곤란하게 만드는 딕은 니콜에게 더이상 의지하고 존경하는 대상이 아니다. 니콜이 딕을 그렇게 정의하는 순간 딕은 니콜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는다. 


이혼이 결정되고 각자의 길을 가기 직전 그들은 모두 리비에라 해안에 있다. 수미상관으로 배치한 이 장면에서 니콜의 시선이 마지막까지 딕을 쫒지만 딕은 한때 애정을 쏟았던 리비에라 해안에 성호를 긋고 사라진다.


전체 맥락을 볼 때 딕의 소도시행은 니콜에게 버림받은 남자의 초라한 추락이 아니라 메타적 관점으로 딕이 니콜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성공적으로 달아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토록 애정을 쏟던 아이들과도 연락을 끊고서 말이다.


제이는 실패했지만 딕은 성공한 것이다.


 딕은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몸을 굽혀 난간에 머리를 기댔다. 이 환자의 진료는 끝났다. 닥터 다이버는 자유를 얻었다. (p.491)


궁금하다. 알콜중독자 딕 다이버가 니콜에게 버림받고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해석은 어디서 어떻게 나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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