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카프카 - 프란츠 카프카 타계 100주기 기념
김태환 외 지음 / 나남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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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6월 3일 프란츠 카프카(1883~1924)가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소설가 존 업다이크는 카프카가 현대인의 의식 구조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었다고 풀이했다. 그 전형성이란 세 가지 느낌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첫째, 정체불명이라서 달래지도 못하는 불안과 모멸의 감지. 둘째, 밑도 끝도 없이 난해한 세상이 개인의 발목을 잡는다는 감각. 셋째, 오랜 관습과 신앙의 외피로부터 발가벗겨진 나머지 모든 접촉에 아파하는 신경 조직처럼 과도하게 예민한 감수성 등이다.


'카프카를 위하여' (p.21)


2024년 카프카 사후 100주기 기념으로 출간된 『카프카, 카프카』는 '카프카에스크kafkaesk'(카프카스럽다, 카프카적이다) 깃발 아래 모인 저자들의 소설, 수필, 비평으로 구성되었다. 책은 먼저 아포리즘으로 포문을 여는데 아포리즘 하나하나가 한숨 나오게 좋다. 카프카 잠언 모음은 솔 출판사의 전집에도 있고 단행본도 있으니 한번쯤 읽어보길 추천한다. 


이렇듯 한 세기가 지나도록 카프카 이후 세대에게 여전히 영향력 있고 영감의 원천이 되는 카프카를 나는 천재라고 부른다. 참고로 아포리즘 일부는 '응?' 싶은 저자의 해설도 있지만 이건 해석의 영역이므로 개인의 몫이겠다.


불안과 비정상이 가득한 카프카 소설의 진짜 공포는 정작 그러한 상태에 놓인 인물들은 독자만큼 불편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 괴리에 있지 않을까. 마치 칸트가 인용했던 프리드리히 2세의 말을 빌려 '당신이 따지고 싶은 것에 대해 따지고 싶은 만큼 따져보라. 그러나 복종하라'를 실천하는 모범시민이랄까. 하물며 그들은 제대로 따지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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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칼럼은 시간을 들여 정독할만 하다. 개인마다 감상과 해석은 제각각이겠으나 내게 카프카에스크는 '불안, 소외, 출구없음'으로 정리된다. 불안, 소외는 산업혁명 이후 시민사회가 겪는 공동의 질환이고 이미 문사철이 충분히 다루어왔고 앞으로도 다룰 것이므로 새로울 것은 없다. 이야기하고 싶은 건 '출구없음'인데 1인극 '빨간 피터의 고백'의 원작인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서 무리 중 혼자 포획된 원숭이 피터가 대서양을 건너는 우리 안에서 바랐던 게 자유가 아니라 출구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p.136) 


기억해야할 것은 어딘가로 나가는 출구는 동시에 어딘가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것이다. 결국 피터는 인간을 학습하는 것에 성공하고 인간 세상으로 들어가는 출구를 연다. 카프카는 굳이 출구와 자유를 설명하지 않고도 인간화된 피터를 통해 두 의미의 차이를 백마디 말이나 장면보다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이기호의 소설은 요즘 시국에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짧은 소설을 읽으면서 인간이 이룬 사회에서 인간의 악의가 타인과의 관계성에서 실체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를 생각해봤는데 대부분 '이기심(이기주의)'으로 귀결되었다. 본인 탓일지도 모르는 한 인간의 사망 소식을 대하는 화자의 태도가 시종일관 어찌나 차갑던지 '굳이 저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불쑥 치솟는 반발심의 경로를 더듬어보니 '굳이 저렇게까지'의 종착지에 도사린 것 역시 화자의 '이기심'이었다. 단순히 자신의 기분이 상했다는 자기본위가 타인을 불안으로 결국 사망으로 떠밀고도 인간이라면 느껴야 할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 짐승도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에 비추어 본다면 이 소설의 화자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인 것이다. 


카프카의 주인공들이 열리지 않는 입구를 앞에 두고 벽 바깥에서 영원히 떠도는 육체라면 이기호의 단편 《심사》는 이기주의라는 벽 안에 갇힌 인간의 마음이다.


수록작 모두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 재료가 신선하고 좋으면 맛있는 요리가 나오듯 카프카는 문학적 영감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한 시간이다. 

다만 새 챕터를 읽을 때마다 책 후면을 뒤적여 저자와 약력을 확인했다. 좋은 재료라도 요리사의 칼질에 따라 삼키지 못할 쓰레기가 되기도 하니까. 이렇듯 감시와 처벌은 동전의 양면처럼 동행한다. 이 행위를 하며 카프카에스크를 자처하는 글들을 읽었다. 이것이야말로 또다른 의미의 카프카에스크(Kafcaesk/Kafcaesque)이겠거니, 카프카와 제법 어울리는 현실적인 역설에 혼자 웃었다.


카프카의 절친 막스 브로흐가 카프카의 유고를 비롯한 원고, 메모, 한 줄 쪽지까지 어떻게 습득하고 보관했으며 히틀러 시대를 거쳐 무사히 출간했는지 M에게 얘기해줬더니 M이 "유대인 친구를 만나야겠군" 했다. Oh...!





S가 치과진료를 받는 동안 이 책을 읽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깐 정차했을 때 S에게 아포리즘에 등장한 '프로메테우스'에 대해 한참 떠들었다.

시작은 "S야, 불 훔친 프로메테우스의 엔딩이 뭐였지?" 물으면서였다. 독수리에게 간을 빼앗기고 그 다음이 뭔지 도통 기억이 안 나는 거다. 영원히 반복해서 간을 빼앗기고... 그걸로 끝이던가? 최근 문득 느낀 건데 소설을 제외한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물의 엔딩이 종종 기억이 안 난다. 혹시 나처럼 엔딩이 궁금한 분이 있을까 하여...

3000년 후 헤라클레스가 나타나 독수리를 활로 쏘아 죽이고 프로메테우스는 드디어 바위와 독수리로부터 해방된다.


프로메테우스 엔딩으로 시작해서 카프카의 프로메테우스를 거쳐 리들리 스콧의 영화 '프로메테우스'로 넘어갔다.

영생불사하고 싶은 돈 많은 인간의 미친 욕심과 인류의 기원의 미스테리를 풀고 싶은 과학자의 미친 신념을 태운 프로메테우스호가 인류의 기원을 만나러 우주로 날아간다. 


"생각해봐. 개미가 인간을 숭배한다고 해서 인간이 개미를 존중하진 않잖아? 인류의 기원(인간의 창조주, 외계인, 엔지니어 뭐든) 도 마찬가지였던 거지. 그래서 인간이 개미를 아무 생각 아무 느낌 아무 감정 없이 손끝 발끝으로 눌러죽이고 개미굴에 불을 지르듯 인류의 기원도 인간을 마구마구 몰살해. 인간은 무슨 자만심으로 신이 인간을 기꺼이 반길 거라고 의심 없이 믿었을까. 웃기지? 재밌지?"


영화를 안 본 S가 웃기고 재미있다고 했다.



맞다. 우리는 지금 카프카의 초기 독자들이 함께 발견한, 카프카 소설의 어떤 본질로 다시 돌아간 것이다. 나는 카프카의 마스터 플롯master plot이 욥기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보는 사람들의 그룹에 기꺼이 속하려 한다. 막스 브로트, 게르슘 솔렘, 마르틴 부버 등이 카프카를 그렇게 읽었다. 나중에 노스럽프라이가 지나가는 말로 카프카의 《소송》을 <욥기>의 미드라시Midrash(주석 문학) 같다고 한 것도 유명한 사례다.

나는 이 표현을 확대 해석해서, 카프카 문학의 부피가 <욥기>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읽는다.


신형철 '오직 나만을 위한 불가능' (pp.212-213)


신정론은 고통의 문제에 대한 대응이고, 고통의 문제는 소위 '악의 문제problem of evil'속에서 다루어진다. 라이프니츠의 《신정론》에 따르면 세 종류의 악이 있다. 피조물의 근원적 불완전성이 있고(형이상학적 악), 그 때문에 저질러지는 범죄가 있으며(도덕적 악),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이 있다(물리적 악). 고통은 결국 악의 문제다. 그렇다면 고통에 대해 묻는 일은 왜 악이 있는지를 묻는 일이 된다. '악의 문제'란 전지·전능·전선하다고 간주되는 신이 왜 세상의 악을 창조 혹은 방조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 악에 대한 물음은, 물음을 다음과 같이 구체화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하나의 문제로 드러난다. '신은 악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렇다면 진지하지 않은 것이다. 신은 악의 존재를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전능하지 않은 것이다. 신은 악을 알고 또 어찌할 수 있는데 그냥 방치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전선하지 않은 것이다. 어느 쪽이든 결함이 있는 신이란 그 자체로 개념적 모순이다. 그러나 악은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신은 없거나, 있어도 가치 없는 존재다.'


신형철 '오직 나만을 위한 불가능' (pp.213-214)



라이프니츠 '신정론의 세 종류의 악'을 창세기 카인의 살인에 대입해보면 신정론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단숨에 이해할 수 있다. 그러게 신이 잘못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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