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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서동욱 지음 / 김영사 / 2024년 1월
평점 :
이동진 평론가가 추천한 서동욱 교수의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는 말하자면 보관함과 장바구니 경계에 있던 책인데- 재미있을 것 같은데 추천한 사람이 이동진(책 취향이 나랑 안맞음),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아싸! 가져온 책이다. 그때 눈에 안 띄었으면 아마 주문했을 것 같지만.
여튼 프롤로그를 읽다가 고개를 갸우뚱했으니,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동진 평론가가 극찬한 프롤로그가 이 책의 여러 챕터 중 가장 별로였다. 철학자이자 시인인 저자의 직업적 정체성이 프롤로그에 그대로 담겼는데 철학자 특유의 관념론적 사고가 시인의 언어를 빌리니 문장은 예쁘고 심오한 뭔가도 있는 것 같지만 결국 '뭐라는 거지' 싶은 거다. 아, 이번 독서는 난항이겠구나 예감한 순간이었다.
저자의 문법이 내 기호와 맞지 않다는 거지 내용은 흥미롭다. 책은 전반적으로 사물의 미시에 집중하는데 '반복'을 위시한 몇몇 챕터에서 마주치는 니체의 흔적이 반갑다.
한스도 의식하지 못하는 일이었지만, 쇼샤는 한스가 초등학교 시절 호감을 품었던 히페라는 소년과 닮았다. 한스는 동성인 히페를 연인으로 사랑한 적이 없다. 그런데 히페에 대한 호감은 히페를 닮은 쇼샤에 대한 사랑이 탄생하는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과거의 히페는 현재의 쇼샤에 대한 사랑 속에서 반복된다. 그러니 반복은 어떤 것이 동일한 모습으로 다시 찾아온다는 뜻이 아니다. 즉 히페는 히페로서 반복되지 않는다. 히페가 쇼샤로 변신하고서 반복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반복은 서로 다른, 즉 차이 나는 것들(히페와 쇼샤) 사이에서 생긴다. (p.38)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내용을 몇 꼽아보자면 인간이 실수를 반추하거나 같은 악몽을 반복해서 꾸는 이유는 자가치유 때문(pp.36-37), 교회에 사람이 없자 물고기들에게 가서 설교를 했던 성 안토니우스의 일화(p.90), '근대' 개념의 환기(p.154), '도시가 건축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이 도시를 소유한다'(p.276)는 원근법 해석, 수집에 열을 올렸던 발자크를 통해 과거의 사물에 관심을 쏟는 자는 수집가, 미래의 사물에 관심을 쏟는 자는 발명가로 정의하는 것(p.303) 등이다.
이중 '근대'에 덧붙이자면 '근대'는 그동안 단어 혹은 용어로 관성적으로 습득했던 내겐 신선한 학문적? 환기가 되었다. 다만 그와 별개로 「근대와 인간 주체의 탄생」은 해당 책에서 가장 진도가 안 나갔던 챕터인데 이유는 철학자와 일반인의 위치에서 오는 괴리 때문이다. 당연한가? 당연할지도.
지식인의 현학적인 태도가 빛을 발하는 때는 대개 개념을 개념으로 설명할 때인데 이 챕터는 유독 이런 장면이 많다. 저자는 '근대'로 포문을 열고 '인간 주체'를 끌어오는데 문제는 '인간 주체'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과 '주체'를 잘게 부수는 서술이다. 앞서 이 책은 저자가 사물의 미시에 집중한다고 썼는데 '인간 주체'는 이 집중도가 지나쳐서 살짝 현기증이 일 정도. '인간 주체'는 고대 그리스 철학으로 갔다가 라틴어로 갔다가 칸트와 하이데거를 거쳐 다시 근대로 돌아오는데(pp.156-157) 이 과정을 거치고서야 마침내 '인간중심주의'가 등장한다. 산넘고 물건너 황야를 가로질러 도착하고 보니 목적지가 옆집인 걸 발견한 기분.
문제는 '근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거다. 이어지는 챕터는 '근대 이후 A.I.'인데, '인간-기계' 또는 '주체-기계'인 키메라는 인간의 가장 좋은 조언자가 될 수도 있고,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자기의식을 지닌 인간 주체가 인공물과 자연을 지배하는 시대, 바로 근대와 결별한 것일까?(p.167) 는 논리의 전개는 재미있다만 다소 비약적인 결론으로 느껴진다. 단적으로, 챗GPT의 활약에 나는 저자만큼 감탄하지 않는다.
얼마전에 S와 아마 오래지 않아 로봇이 음식을 요리하는 세상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나눴다. 쿡봇(cook-bot)이 축적된 데이터에 기반해 정확한 계량을 거쳐 조리한 음식을 내놓는 거지. 당연히 음식은 맛있을 것이다. 근데 쿡봇이 맛을 알까?
영화 <매트릭스>는 아키텍트가 인간의 행동양식을 관찰하고 분석해 '인간세상'을 복제하지만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해 완벽한 구현에 실패하고 여섯 번이나 시행착오를 겪는 내용이다. 네오와 오라클의 대화에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의 차이'가 등장하는데 인식론의 영역을 정복한 기계가 과연 존재론의 영역도 정복할 수 있을지, 도래할 A.I.미래에 현시점에서 내가 가장 궁금한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할란 엘리슨의 소설 『I have no mouth, and I must screem』은 과학자가 슈퍼컴에게 매일매일 'I AM'을 가르치는데 어느날 슈퍼컴이 'AM'을 깨우치고 인간세계를 정복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정도 수준에 도달한 기계라면 신인류로 인정해도 되지 않을까요?
해체는 사물의 전복이 아니라 새로운 사물이 탄생하는 진통이라는 내용은 더이상 새롭지 않지만 철학적 논쟁의 양극단에 서있는 데리다의 영향력과 마주치는 순간은 여전히 놀랍다.
기차의 창문들 각각처럼 세계는 전체를 이루지 않는 파편들, 차이뿐이다. 전체성은 주인공이 한 창문에서 다른 창문으로 옮겨갈 때 그 '횡단선'에서 생성된다. 그러니 횡단선을 따라 생기는 이 전체는 파편들을 통일하는 원리 같은 것이 아니라, 파편들의 차이로 이루어진 전체이다. 그것은 하나의 원리도, 법칙도 없으며 오로지 다양성으로만 이루어진 우리 세계의 모습이다. (p.213)
1,2,3부는 다소 엎치락뒤치락 읽었다면 4부는 술술 넘어간다.
저자의 이력을 보고 철학자의 언어와 시인의 언어가 만난 결과물이 궁금했는데 대중의 언어가 아닌 것은 알겠다.
참. 오랜만에 강백호(슬램덩크)의 대사를 만나 반가웠다.
"영감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국가대표였을 때였나요? 난 지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