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 감각의 독서가 정혜윤의 황홀한 고전 읽기
정혜윤 지음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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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책에는 두 종류가 있다. 언급되는 책을 읽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경우, 언급되는 책을 읽지 않으면 충분히 즐길 수 없는 경우.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은 후자에 속한다. 제목부터 그렇지 않나. 세계가 ‘두번’ 진행되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는 한번 진행된 적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정혜윤은 이번 책에서 고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당신이 고전의 제목과 내용은 대강 알지만 읽은 적은 없는 독자에 속한다면,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 이상을 얻기는 힘들다. 이 책들을, 카프카의 <변신>을,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었다면, 정혜윤은 그 세계가 다시 진행되는 언어의 숲으로 당신의 손을 잡아 안내한다. 맹세컨대 당신이 이 책들을 어제 읽었다 할지라도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을 읽으면서는 생경하게 느껴지는 구절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번에 다 읽을 생각을 하는 건 무리고(그렇게 마음먹어도 실행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한달에 한권의 고전과 그에 상응하는 정혜윤의 글을 한 꼭지씩 읽어가는 독서 프로젝트나 모임을 해볼 만하다. 지독하게도 열심히 읽고 열심히 생각하는 저자의 책답게, 이 책에서는 많은, 또 다른 세계로 향한 창을 만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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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양들의 축연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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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고 술술 읽히는 소품이다. 미스터리한 분위기는 있지만 추리소설이라기엔 아쉽고, 으스스한 분위기는 있지만 공포소설이라기엔 부족하다. 그런데도 미간에 주름 잔뜩 잡고 두근거리면서 읽게 만든다. 책읽기가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 있다면 이런 책들 때문이 아닐까.
‘바벨의 모임’이라는 수수께끼의 사교모임을 둘러싼 연작 소설인데, 사실 모임 자체가 사건의 중심에 서는 일은 없다. 상류계급의 영애들만 가입 가능한 문제의 독서모임 ‘바벨의 모임’의 멤버들이 각자 겪은 이상한 일이라는 편이 맞겠다. ‘마지막 한줄의 반전’이라지만 대개 짐작 가능하니 너무 크게 기대하지는 말 것. 책을 좋아하는 몽상가로 십대를 보낸 소녀라면 손톱을 마구 깨물며 부모에 대한 불만과 세상에 대한 궁금증으로 몸부림치던 성장기를 떠올리게 되는 대목들을 만나게 된다. 집사물 덕후라면 이 책에 각별한 애정을 느낄 듯. 소녀를 보필하는 소녀라니, 거참….
요즘 이런 작은 모임을 둘러싼 이야기를 담은 연작 단편집을 심심찮게 보게 되는데 다 기본은 한다. 무겁고 두꺼운 책들 사이에서 숨을 고르듯 한권 읽고 넘어가기에 딱 좋다. 사쿠라바 가즈키의 <청년을 위한 독서클럽>(여자 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빠져들 오묘한 분위기)과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미스터리의 색이 좀더 짙다)도 읽어보시길. 연작 미스터리계의 <유주얼 서스펙트>인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은 기본으로 마스터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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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 진시황과 이사 - 고독한 권력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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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의 김태권이 <초한지>와 <삼국지연의>를 10권의 만화 <김태권의 한나라이야기>로 엮어냈다. 첫 두 권이 먼저 선을 보였는데, 1권은 <진시황과 이사> 2권은 <항우와 유방>이다. 그런데 왜 한나라일가. 작가의 말을 빌면 이렇다. “서양 문명에서 로마 제국에 해당하는 것이 동아시아에서는 한나라다. 로마가 서양 역사에서 하나의 전범이듯, 한나라 역시 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그러했다.” 역사의 큰 줄기를 잡아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는 것만이 다는 아니다. 고정관념처럼 굳어진 몇몇 인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거나 혹은 동양적 성공신화의 모델이 된 사건을 재발견하게 해 준다. 예컨대, 폭군으로만 알려진 진시황. 그는 왜그렇게 욕만 먹었나. 비슷한 업적을 쌓고도 서유럽에서는 영웅이 되고(알렉산드로스 황제), 동아시아에서는 악당이 되는(진시황제) 이유는 무엇일까. 평민 출신도 천자가 될 수 있다는 궁극의 출세 판타지를 제공한 유방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1권보다 2권이 재미있으니, 이후의 이야기를 기대해볼만하다.
책의 모든 페이지에는 작가가 단 주석이 달려있는데, 본문의 이야기를 부연하는 것과 본문의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된 자료에 대한 설명으로 나뉜다. 이사가 ‘듣보잡으로 살긴 싫다고’라고 결심하는 장면 등 꽤 진지한 필체로 ‘뷁!’한 표정의 등장인물을 그려내는 유머감각도 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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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이 너무 많다 귀족 탐정 피터 윔지 2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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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알트만의 영화 <고스포드 파크>의 톡 쏘는 고전미를 그리워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놓치지 않으면 좋겠다. 흔히 고전적이라고 할 때의 우아함을 기본으로, 은근한 풍자, 뼈굵은 농담을 곳곳에 숨겨둔 미스터리물이기 때문이다.
<증인이 너무 많다>는 애거서 크리스티와 더불어 영국 미스터리물의 황금기(추리소설이 부르주아의 애호물이었던 시절)를 다진 도로시 세이어스의 ‘귀족 탐정 피터 윔지’ 시리즈다. 이후 무수한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집사 캐릭터의 원형인 번터가 등장하는 시리즈기도 하다. 피터 윔지 경의 형인 제럴드 덴버 공작이 살인 혐의로 체포된다. 피해자는 공작의 여동생 메리의 약혼자 캐스카트. 모든 정황과 관계자들의 증언으로는 공작이 범인이지만 피터는 형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나선다. 문제는 지적이고 말주변 뛰어난 이 피터라는 인물은 때와 장소를 못 가리는 쾌활함과 통찰력으로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망치곤 한다는 사실. 여동생은 그를 ‘밉상’이라고 콕 집어 이야기하지만, 그런 얄미운 영민함 덕에 피터는 이후 법정 장면에서 판사와 검사를 약올리며 재치있는 변론을 펴나간다. 다만, 여러 문학작품을 인용해 복선을 깔고 인물의 성격을 꿰고 있는 상황에서 힘을 받는 은근한 유머의 특성상, 사건의 개요만 훑어가며 빠르게 읽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지루하다고 느낄 가능성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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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장 에슈노즈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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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자토페크는 실존했던 체코의 육상 선수다. 그는 1952년 헬싱키올림픽 장거리에서 5000m와 10000m에서 금메달을 딴 그는, 난생 처음 뛰어본 마라톤 종목 참가를 마지막 순간에 결정했고 그마저도 금메달로 끝맺었다. 그의 별명은 ‘체코 기관차’였다. 1952년의 금메달이 있기까지 그가 달리기에 재능을 발견하고 꾸준히 달리기 시작한 시기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과 소련 치하의 체코였다. 1983년 <체로키>로 메디치상을, 1999년 <나는 떠난다>로 공쿠르상을 받은 장 에슈노즈는 그런 자토페크의 달리기 인생을 소설로 썼다.
에밀의 이야기는 그가 노동을 시작한 운동화 공장의 고무 제작부에서 시작한다. 운동화 회사는 회사 이름을 노출하기 위한 스포츠팀 후원과 육상 경기 주최에 열을 올렸다. 에밀은 운동이라면 질색이었지만 점령군마저 청년 조직을 중심으로 스포츠 행사 개최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정말 운동이 좋아졌다. 온 힘을 다해 뛰니 쉽게 우승자가 되었다. 그렇게 달리기는 그의 일이 되었다. 성실한 전력질주자였던 에밀은 결승선 앞에서 전속력으로 뛰어 우승을 차지하곤 했는데, 경기 내내 체력을 안배하는데만 관심이 있던 당시 분위기에서 졸지에 막판 스퍼트라는 것을 발명한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더욱 큰 도시의 경기로 그는 뛰어나갔다. 유명한 선수들 사이에서 이제 그는 우승자가 아니었다. 에밀은 체코의 유일한 대표 선수로 참가한 대회에서 온 관중의 조롱거리가 되자 5000m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전력으로. 보는 사람들은 생각했다. 정상이 아니야. 저자는 해서는 안 되는 짓만 골라 하는데 이기고 있어.
그에게는 주법(走法)이라는 게 없었다. 고통을 사랑하는 이상한 달리기 선수. 그리고 이상한 세상. 그의 고국에서는 고위층이 회의를 했다. 에밀은 현실 사회주의의 현상이므로 그를 곁에 두고 아껴야 하며 너무 국외로 보내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결정. 그래서 에밀은 국제대회에 나갈 수 없게 되곤 했다. 프라하의 봄 직전의 프라하와 그 이후의 프라하. 그는 늙어가고 더 이상 이길 수 없게 된다. 장 에슈노즈는 영광도 몰락도 같은 톤으로 덤덤하게 그려낸다. 그렇게 <달리기>는 한 스포츠 영웅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희비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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