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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공부 -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장정일의 공부>는, 편집을 급하게 했는지 뭔지;; 약간 눈에 밟히는 대목들이 있다. 책 내용보다 이런 지적을 먼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자가 각종 인문서를 읽으면서 공부한 내용을 적고 있기 때문에 편집의 오류는 사실관계를 오독하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진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그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능력이 없는 학생을 사정없이 낙제시킨다면서 미국에서는 졸업하는 학생이 입학생의 20퍼센트 정도며, 독일에서는 약 30퍼센트, 이탈리아에서는 64퍼센트가 졸업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46쪽
다음의 문장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주술도 안 맞고.
기타무라 토코쿠가 실제 모델인 아오키의 궁핍과 자살은 물론이고, 아오키와 같은 문학 동인이면서 똑같은 궁핍과 자살에의 충동을 느꼈던 시마자키 도손의 작중인물인 기시모토의 삶은 새로운 문학이 소개되던 최초의 풍경이다. -108쪽
혹시 편집자가 장정일 안티일까? 어쨌건 문제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게다가 중제를 내용보다 훨씬 센세이셔널하게 뽑거나 아리송하게 뽑아놓은 이유도 잘 모르겠다. '소중화라는 슬픔'이라는 중제에는 마땅히 소중화에 한자가 붙어 있어야 하고(왜냐하면 이 이후의 단락에서야 소중화가 小中華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사람도 있을 게 마땅하므로), '문학 작품 읽지 마라!'에는 느낌표따위는 필요없다. 다치바나 다카시 자신이 문학서를 읽지 않는다고 했지, 남들이 문학작품을 읽는데까지 무용론을 펼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정적인 문젯점은, 이 책의 목차에는 각 장이 어떤 책에 대해 씌여진 것인지가 적혀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정확히 역사에 대한 글이 될런지 철학에 대한 글이 될런지 전쟁에 대한 글이 될런지를 예측하지 못한 채 읽단 각 장을 읽어봐야 한다. 정말 무심하기 짝이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시대의 문화 프로메테우스 장정일' 운운하는 광고 문구와 거창한 제목 <장정일의 공부>라는 데 이 책이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ㅅ- 그냥 <독서일기>가 어때서;;
동서양의 역사서를 비롯해, 다양한 인문서들을 장정일이 읽고 나름의 독후감을 덧붙인 이 책은, 장정일의 논리 전개나 깨달음의 과정에 그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어떤 인문서를 읽을만 하겠다, 내 관심사와 이 역사서가 맞을 것 같다-는 점을 알게 도와 준다. 이를테면, 나는 마르크 블로크의 <이상한 패배, 1940년의 증언>에 지대한 관심이 생겼는데, 장정일은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썼다.
승리의 원인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싶어하지만 패배의 원인은 등한시한다. 곧잘 사람들은 승리에는 불변의 법칙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배우려고 하지만, 어떤 분야에서든 승리는 항상 상황을 운영하는 자의 것이다. 다시 말해 원칙을 고수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임기응변을 이용하고 나아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상황을 창조하는 자의 것이다. 반면 패배에는 승리가 갖고 있지 않은 불변의 법칙이 있다. 그러니 패배에 대해 더 잘 아는 것이 일단 '피박'을 면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 책을 들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63쪽
결론적으로 나는 '피박'을 면하려고 <이상한 패배, 1940년의 증언>을 읽고 싶어하고, 장정일은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태하게 되는 태도인 '무지의 중용'을 피하기 위해 많은 책들을 읽고 이 책을 썼다.
<이상한 패배, 1940년의 증언>은 1940년 7월부터 9월 사이에 쓰였으나 나치 점령 중에는 출판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해방된 이후인 1946년에 책이 출간되었을 때 저자는 지상에 없었다. 그는 여러 가지 가명으로 지하운동을 조직하고 반란 기구를 만들다가 1944년 3월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뒤 6월에 총살됐다. 그는 죽기 전에 이 책의 제사(題詞)로 쓸 몇 개의 문구를 고전으로부터 발췌해 놓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얘야, 전장이나 사형대 위에서 또는 감옥에서 끝나지 않는 삶은 아름다운 삶이 되기에는 언제나 무엇인가가 모자란단다"라는 구정이었다. -75쪽
사랑은 생활의 바다 속에서 파선한다 - 마야코프스키의 시 재인용
작가 쪽에서는 무의식 중에 그 단조로운 생활에 약동적인 것을 만들고 그 도피 의식 또는 고독감을 가장 선명하게 하는 실제 연기를 생활 속에서 하지 못하면, 작품의 상품 가치를 높일 수 없다고 느끼게 된다. 가정의 불행이나 연애의 위기, 병이나 어느 정도의 실의 등은 그 도피 생활에 악센트를 만든다. 그러므로 작가는 자연히 거의 의식하지 못한채 그 불행을 기쁘게 맞이하게 된다. 다음 단계에서 그는 스스로 불행을 만든다. 위험한 실험적 연애를 적극적으로 하게 된다. 그러면 그 위기감은 한층 독자들을 즐겁게 만든다. 이렇게 해서 도피라고 하는 실제 연기 생활은 패멸 행위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근대 일본인의 발상 형식>, 이토 세이의 글 재인용 (사소설 작가가 빠져 있는 악순환에 대해)
*위의 인용과 연계해 흥미로운 부분-
"새삼 알고 보면, 우리 나라 작가 중에 이광수만큼 자서전을 여러 번 쓴 작가는 없다. (중략) 그는 마치 늘 고향이 그리운 사람처럼 걸핏하면 자서전을 쓰고자 했는데, 자서전 집필은 사소설을 쓰려는 유혹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처럼 젊어서 읽고 배운 일본문학의 독소는 깊었으되, 그의 문학은 끝내 사소설의 유혹을 이겨냈다. (중략)애초부터 그가 창작의 관심사와 주제를 자신의 일상과 가족이라는 범위에 국한하는 사소설을 썼다면, 훗날 공소한 계몽과 친일이라는 변절에 빠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가 사소설에 몰두했다면, 민족의 현실에 눈감은 미학주의자였다는 비난을 받는 것으로 그쳤을 것이나, 사소설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민족 개조론의 함정에 빠질 여지도 생겼던 것이다. 이 점은 이광수 개인의 운명은 물론 그를 기점으로 하는 한국의 근대문학의 향후 전개와도 연관되는 중요한 문제다. 이광수는 일본의 사소설로부터 한국의 근대문학을 방어했다. -1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