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프라하의 소녀시대 ㅣ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프라하의 소녀시대>는 프라하에서 60년대 초, 10대 초반을 보낸 요네하라 마리의 이야기다. 그녀의 아버지는 공산당원으로, 프라하에 있는 공산주의 이론지 편집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덕분에 프라하에서 생활하게 된 그녀는 각종 공산주의 국가에서 온 친구들과 지냈다. 이 책은, 공산주의가 나름 찬란히 빛나던 마지막 시기에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산주의의 이념을 받들어 온 소녀들의 이야기이고, 그들의 후일담이다. 논픽션이지만 자전적인 책이고, 가끔 어떻게 이 여자는 이렇게 세세한 대화를, 말을 다 기억할까 싶기는 하지만(난 초등학교 4학년 이전 친구들의 이름은 아예 기억도 하지 못한다. 사실은 대학 친구들 태반의 이름도.), 단지 소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로서 산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지기 때문에 흥미진진하다.
같은 공산주의 국가라 해도 나름의 차이가 있다. 소년 소녀들이지만 다들 그 안에서 파가 갈리고 서로 친해지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한다. 그리스에서 온 공부하기 싫어하는 리차, 무늬만 루마니아 출신인 거짓말쟁이 아냐,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천재적인 야스나. 개성이 뚜렷한 이 소녀들의 이야기는 오늘로 오면 사뭇 다른 울림을 남긴다. 이제 와 둘러보는 동구권의 몰락이 안기는 씁쓸함을, 이 책은 비겁하게 비난하지 않고 따뜻하게 응시한다. 변명하는 대신 솔직히 말한다. 그게 이 책의 장점이다. 공산주의가 옳다, 자본주의는 옳지 않다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 그런 주장을 독자에게 심어줄 생각도 없다. 요네하라 마리는 다만, 자신이 겪였던 세계의 일부를 깎아, 토끼 모양을 낸 사과조각처럼 보기 좋게 놓아준다. 사소한 대화나 묘사가 낭비되지 않고 한 개인과 그 사회를 묘사하는 데 쓰인다는 경제적인 글쓰기도 나름 인상적이다. 40년만에 친구들을 하나씩 찾아가 만나는 대목에서는 시간의 변화와 동구의 몰락, 그리고 씁씁한 현실을 느낄 수 있다.
뭔가를 주장하는 대신, 설득하는 대신, 밤을 새워 화톳불 앞에 앉아 고구마를 까먹으며(사실 이런 거 해 본적도 없지만) 기나긴 이야기를 듣는 듯한 다정함이 좋다. 그리고 다시금 드는 생각은, 공산주의건 자본주의건을 떠나, 독재정권은 정말 나쁘다. 전쟁은 그보다 더 나쁘다. 야스나의 이야기를 읽다가는 몇 번이고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세상은 왜 이리 끔찍한 것일까. 보통만 되는 삶이라는 게 이렇게 힘든 것이었던가.
왜 못돼 처먹은 아냐는 잘 사는데 야스나는! 이 망할 세상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