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니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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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뜨거운 태양 아래의 어느 해변에서 읽을 책을 골라달라는 친구의 말에 <유지니아>를 추천했다. 읽고 나면 더 더울게 분명하지만, 또한 뒷목 서늘한 기분도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는 여름이라는 계절과 잘 맞아떨어진다. 20년전 대규모 독살 사건이 있었다. 일가가 몰살당했는데, 한 소녀만 살아남았다. ...그러면 범인은 그 소녀일까? 그런데 그 소녀는 앞을 볼 수 없다. ...그런 사건이 있었다. 10년이 지나 그 사건을 소설로 쓴 이웃집 소녀가 있고, 또 10년이 지나 누군가가 그 사건을 파헤치고 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이야기에 깊이 발을 들일수록, 난처한 소설이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버려야 하는 상황의 연속이다. 사건의 윤곽은 뚜렷해지는데, 전체적인 모습은 뿌옇게 흐려 보인다. 어느 순간 눈이 뜨일 것을 기대하며 책장을 넘기지만, 녹록하지는 않다. 마지막까지 읽고 가장 강렬하게 기억하는 건, 여름의 무더위와...

몇 권 연속으로 읽은 뒤 한동안 질려 있었던 온다 리쿠의 세계를 좀 더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한 책. 내년 여름쯤에, 다시 한번 꺼내보면 그 징글징글한 아련함이 조금 더 선명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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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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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공항으로 가는 길에, 나는 창밖을 본다. 공중을 떠다닐 수 있을 듯 가벼운 기분이다.“행복은 정상 이하의 중력에 있는 것 같아.” 내가 말한다.
마저리의 시선이 느껴진다. “깃털처럼 가볍게, 그런 뜻이야?”
“깃털은 아닐지도 몰라. 풍선에 더 가까운 기분이야.” -54

나는 SF라는 장르를 거의 알지 못한다. 크게 정을 붙여본 적도 없다. 환타지라는 장르도 그렇다. 가끔 혼비백산하게 만드는 작품을 만날 때면, 실제로 좋아하는 것보다 더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건 사실이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읽은 책이 얼마 되지 않는데다가, 내가 환타지나 SF의 매력을 느끼는 순간은 책보다는 영화에 있기 때문이다. 어려서 본 <스타워즈> 시리즈, 극장에서 멍하게 화면을 바라보던 순간의 강렬한 매혹(어렸을 땐 내가 모르는 세계를 보는 게 가장 좋았다, 일상이라는 단어 따위 엿이나 먹어라). 빨려들어갈 것 같은 공간과... 뭐 <토탈 리콜>과... 스탠리 큐브릭과... 음음 빗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그런 게 다다. SF를 안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현재 상황에서 책을 골라야 한다면 선택할 수 있는게 한정되어 있을 뿐이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안 날 추리소설의 목록 쪽이 우선권을 갖는다는 말이다. SF 팬들에게 다소 겁을 집어먹은 것도 사실이지만. -ㅅ-

<마일즈의 전쟁>과 <어둠의 속도>를 연달아 읽었는데, 두 책의 느낌은 무척 다르다. 그러니까 이 두 권이 같은 장르로 분류된다고? 누가 그렇게 물으면 아니라고 답해야 할 것 같을 정도다. <어둠의 속도>는 장르문학쪽 레이블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일즈의 전쟁>이 스페이스 오페라라면, <어둠의 속도>는 철학책이다. 똑같이 생각하기는 힘들 수밖에. 특히 나같은 SF 문외한에게는.

<어둠의 속도>를 읽으면서 감탄한 점 중 하나는, 엘리자베스 문이 자폐인인 루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면서 루의 생각의 속도와 습관에 독자를 길들인다는 데 있다. 누구나 지나치고 말 소소한 것들을, 루는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게다가 루는 미래의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치료과정을 통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도 다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폐인이 아닐 수는 없다. 루의 관점에서 보는 세상은 변덕스러운 애인과 같다. 루는 빛에 예민한데,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얼굴과 화를 내는 얼굴은 그의 눈에 똑같이 빛난다. (그래서 처음엔 그 둘을 구분하는 게 힘들었다) 혹은, 속을 알 수 없는 애인 같기도 하다. "정상인"들은 할 말이 없다고 분명히 말하는 대신 에둘러 시간이 없다고 우물거리기 일수다. "정상인"들이 표현하는 삶의 이면 읽기는 루에게 늘 버겁다. "정상인"들에게도 버겁듯이. 별로 다르지 않은 거다.

...뭐 이런저런 설명은 다 집어치우고, 이 책이 좋았던 가장 큰 이유는, 엘리자베스 문이 너무나 분명하게, "루를 위해 슬퍼하지 말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루를 동정하지 말것. 루를 위해 슬퍼하지 말 것. 마지막 부분에 루를 바라보는 톰의 시선에 맞닿으면 결국 울컥하면서 슬퍼지는데, 그 슬픔은 톰을 위한, 그리고 나를 위한 것이다. 이기적이고 속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현재 사랑하는 모습 그대로 있어주지 않는 데 대한 억울함이다. 나도 톰처럼 생각했고, 톰처럼 슬퍼했는데- 그걸 루를 위해서라고 착각하지 말 것. 루는, 행복해할 줄 아는 인간이다. 정상 따위의 꼬리표와 상관없이.

+
이 글을 쓰고 싶었던 건 대학교 때의 프랑스어 회화 교수님 때문이다. 그때 문제가 된 말은 정확히 말해 정상적인normal은 아니고 자연스러운naturel이었는데, 그 수업때 우리는 불어로 시를 지어오게 되어 있었던가 그랬다. 동기 중 하나가 시를 "설명"하다가(미친 게 틀림없다, 뭘 설명해) 자연스러운 어쩌고 운운했는데, 그 단어 하나로 교수님 뚜껑이 열린 거다. 그 때부터 "니네 자연스러운 게 뭐야? 너네가 사는게 자연스러워? 약 안 먹으면 죽을 걸 약을 먹어서 살아, 그게 자연스러워? 자연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어? 니들이 하는 것 중에 인위적으로 수정되지 않은 게 있어?" 정상적인, 자연스런... 이런 말들의 폭력성. 참고로, 엘리자베스 문은 그 교수님보다 더 우아하게 독자를 설득한다만.

++
루는 마저리가 예쁘지 않았어도 좋아했을 거라고 말했다. 개인적으로, 그건 거짓말이라고 믿는다. (웃음) 왜 남자들은 예쁜 여자친구를 자랑하면서 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거지. 마저리가 착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ㅎㅎ 나는 루가 천재가 아니어도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천재인 루를 좋아하게 된 마당에 그런 걸 주장하는 게 무슨 소용이야.

+++
나로서는 <마일즈의 전쟁>과 <어둠의 속도> 중 뭐가 더 좋은지를 가를 수 없다. 내가 SF를 종종 챙겨 읽을 정도의 애정을 갖는 건 <마일즈의 전쟁> 같은 책들 때문인 게 사실인데, SF라는 꼬리표 없이도 누구에게나 완벽하게 읽힐 가능성이 높은 <어둠의 속도>는 아무리봐도 대단하다고밖에 생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는 긴다이치 코스케를 좋아하지만 또한 필립 말로를 좋아한다. 장르적 재미라는 건, 아름다운 글이 주는 만족감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롤러코스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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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7-05-26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흥미로운 책과 리뷰를 발견합니다.
가끔 발견하는 이런 소설에 열광을 해요.

marina🦊 2007-05-27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은 책입니다. 음, 한동안 소설 읽는 재미가 시들해졌었는데 말입니다.

asdgghhhcff 2007-07-10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려고 하는데^^ 정말 재미있을 듯 하네요

marina🦊 2007-07-12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네,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핑퐁 1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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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다이요가 그린 <핑퐁>이라는 만화를 읽었다. 최근 읽은 만화 중에서 최고로 즐거운 작품이었다.
<핑퐁>은 친구에서 라이벌로 발전해가는 두 소년의 이야기다. 스마일(츠카모토)과 페코(호시노)는 어려서부터의 단짝. 페코는 어려서부터 탁구 신동이었고, 그의 단짝인 스마일은 승부근성이라고는 없는, 웃는 법이라고는 거의 없는 모범생 녀석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는 달리, 스마일의 천재적 탁구 재능을 알아챈 60대에 접어든 왕년의 명선수 버터플라이 조 할아버지는 스마일을 '발견'하고 열광한다. 버터플라이 조가 실패했던 길을 스마일이 걷지 않게 하려고 그는 스마일을 위한 특훈을 준비한다. 스마일은 성장한다. 승부에서 도망만 치던 그는 이제 승부에 냉혹해진다. 같은 시기에 페코는 뛰어난 선수와의 경기에서 완전한 패배를 겪고는 좌절한다. 하지만 탁구에 대한 열정으로 그는 다시 탁구채를 손에 쥔다.

이하 스포일러라 흰글로 가려두었습니다. 무무키님, 죄송합니다;;; 예전에 이 글을 절판된 책에 썼던 거라서, 미처 -ㅅ- 생각을 못했다는. ㅜㅜ
놀랍게도, 스마일 혼자 주인공인 것이 아니었다. 세상은 노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지만 재능만으로 되는 것도아니어서... 재능을 바탕으로 한 '즐길 줄 아는' 투지를 이길 만한것이 또 어디있겠는가. 페코가 다시 탁구를 하게 되는 과정과 스스로를 이기는 과정이 눈부신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페코는 정말 탁구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죽도록 열심히 한다. 그렇게 몰두할 뭔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눈에는 그저 축복받은 것처럼 보인다.
스마일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도 스마일은 웃지 않는 캐릭터다. 무뚝뚝하고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 때문에 역설적으로 스마일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창호를 연상시키지 않는가? 꺅!)
스마일이 결국 우승하지도, 탁구선수를 계속하지도 않아서 기뻤다. 선생님이 되어 주어서 고마웠다. 훨씬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어서, 무표정에 애정과 여유가 묻어나서 보기 좋았다. 2등을 하고서도 1등처럼 웃을 줄 안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quote:

싫다 해도 재능이란 건 냄새가 나기 마련이야.

이상을 따르는 것은 간단합니다. 단지 이상의 추구를 허락받은 사람이 적을 뿐이죠.

네 단념은 지극히 빨라. 소용없는 공은 절대 ?아가질 않지. 그 간결함... 물러터졌어...(중략) 그 얇디얇은 날개로는 바다를 건널 수가 없어.

상대 선수의 심정을 고려해서 치는 네 공은 정말로 추악해. 방자하기 짝이 없단 말이다.

힘내요 웬가씨, 난 강해요.

날지 못하는 새도 있는거야.

탁구는 계속해. 피를 토할 때까지 달려가 봐. 피섞인 오줌이 나올 때까지 휘두르란 말야. 지금보단 좀 편해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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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무키 2007-01-30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저기요...4권까지 읽고 5권 기다리고 있는데, 그렇게 결론을 말씀해버리시면 어떻해요. 스포츠 만화에서 누가 이기는가를 미리 알아버리는 건 정말 재미없다구요. ㅠ ㅠ

marina🦊 2007-01-30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무키님, 죄송합니다. ㅜㅜ 예전에 절판된 상태에서 다른 데에 썼던 걸 그냥 올렸더니 이런 사고가;;;; 흑흑흑 그래도 ㅠㅠ 정말 재미있는 책이라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OTL
 
진산 무협 단편집 -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
진산 지음 / 파란미디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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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을 많이 읽지 않았었는데, 진산이라는 작가 이름 때문에 손에 든 책이다. 쉽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여자가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복수니, 의협이니 하는 개념들이 너무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무협이라는 장르 특유의 극단적인 즐거움을 약간 맛보는 데는 손색이 없는 책들이었다. 거의가 슬프게 끝난다. 왜 복수에 성공해도 행복할 수 없는 거야. 왜 살리고 싶은 사람을 살려도 개운치가 않은거야. 왜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여도, 10년이나 잊지 못하던 남자와 재회해도 마냥 기뻐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거야. 대체 무협물의 세계관이라는 건 뭘까. 운명론, 그것도 비극적 세계에 갇힌 인간군상의 발악. 다들 어찌나 사연이 많은지. 멋진 남자들은 다 뭔가 문제가 있고 말이지. 좀 투덜대고는 있지만 꽤 신나게 읽었다. 그 절망의 순환구조라니. 저자가 로맨스 소설을 발표할 때 쓰는 민해연이라는 이름으로, 권말에 각 단편에 관련된 뒷이야기를 적은 부분도 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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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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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할 수 없는, 상상할 수 있다고 절대 얘기할 수 없는 아우슈비츠에서의 10개월을 너무나 담담하게 적어놓은 책이다. 생각보다 첫 장부터 눈물이 철철 흐르지도 않는다. 감상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덤덤하게 서술하는데, 그 덤덤함에서 "결코 잊지 않겠다"는 결의가 엿보여서 소름이 돋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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