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 / 시공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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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한국 출간을 꽤 오랫동안 기다렸다. 현대문학에서 나온 하진의 단편집들이 다 재미있었고, 이 책이 재미있다는 말을 듣고 원서로라도 읽어야 하나 오랫동안 망설였기 때문에 더더욱.

무엇보다 먼저. 다이 시지에의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를 재미있게 읽은 사람이라면, 이 책도 꼭 읽을 것. 혹시 이 책을 읽고 나서 이 리뷰를 읽는 분이라면 그 책을 꼭 읽을 것. 최근 <기다림>과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만큼 추천해주고 반응이 좋았던 책들이 드물다. 해학적이라 잘 읽히고, 생각할 꺼리가 무척 많은 책들이다.

 

1983년 중국이 이야기의 무대다. 육군병원에서 내과의로 일하는 쿵린은 해마다 여름이면 이혼 청원서를 들고 고향으로 향한다. 17년간 별거하고 있는 아내 수위와 이혼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이혼이 간절한 이유는 그가 결혼을 맹세한 여자친구가 있기 때문이고, 아내와의 결혼이 병상에 누운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시종일관 진지하게 쿵린과 쿵린의 애인 만나, 그리고 쿵린의 아내 수위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쿵린과 만나의 관계는 불륜이랄것도 못되는 소박한 연심에 지나지 않으며, 수위는 전족을 하고 나이들어보이는 박색일지는 몰라도 더없이 성실하게 시부모를 모셨다. 누구 하나를 비난할 수 없는 이 팽팽한 삼각 관계는 읽는 사람까지 갈등하게 만든다.하지만 애초에 셋 모두 행복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누구나 잘 알고 있으니 문제가 심각하다. 그래서 20년이나 이 상태를 질질 끌게 되는 것이고.

 

쿵린은 희화화하기 좋은 우유부단한 지식인 그 자체. 홍상수 영화나 누리 빌게 세일란의 <기후>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과 비슷하다. 욕망하는 게 있지만, 그 욕망을 끊임없이 부인하면서 누군가 등을 떠밀어주길 바란다. 하지만 막상 욕망을 실현할 순간이 오면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며 뒷걸음친다. 그러니 원하던 일이 이루어진다 해도 그는 행복할 수 없다. 늘 이곳 아닌 저곳, 이것 아닌 저것을 곁눈질한다. 이 책의 제목 <기다림>이라는 말은, 이 책에서 크게 두 번에 걸쳐 장기간 지속되는 쿵린의 마음 상태다. 기다림이 끝나고 결국 또 다른 기다림이 시작된다. 중국 사회에 대한 메타포로도 읽을 수 있지만, 그런 생각 하지 않고도, 남녀간 연애의 종말이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을 생각하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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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모리 에토 지음, 김난주 옮김 / 시공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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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이야기하는 소설들을 읽으면서 마음이 움직이는 일은 흔치 않다. 사랑뿐이겠는가. 일상, 생활, 직장 등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서 그렇다. 그 중 사랑이라는 주제에 유독 민감하게 구는 것은, 어쩌면 내가 여자이기 때문일수도 있고 사랑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일수도 있다.

-나이를 먹으면서 달라진 사랑이야기의 취향이 있다면, 운명을 끌어들이는 이야기에는 점점 냉소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외가 생기려면 아주아주 그 소설이 뛰어나야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처럼.

-최근 읽은 사랑이야기 중에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D.H.로렌스의 단편 <당신이 날 만졌잖아요>와 모리 에토의 단편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다.

-모리 에토의 소설집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에는 <그릇을 찾아서>라는 단편이 있다. 이 이야기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을 깨닫는 이야기, 그리고 자신과 닮은 순간을 살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난 여자의 이야기다. 돌아갈 수 없는 곳에 와 있다. 그 남자와의 만남은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차 한잔의 제안은 그 이상을 암시하고 있고,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1시간 이상은 아니다. ...하지만 1시간으로 쉽게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정지은 시간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느낌이야말로, 내가 이 소설에서 좋아한 점. 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을 것 같지만.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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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소소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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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이한 웃음’을 주는 <괴소소설>은 작가가 현실에서 겪은 일이 시발점이 된 여러 기이한 상상력 이야기다. 단편집 맨 마지막에 있는 작가의 말이 재밌는 건 그래서인듯.

현실적인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느낌. UFO가 차솥 너구리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어찌나 심각하게 하는지 덩달아 웃어버렸다. 맨 마지막 단편인 <동물가족>은 작가가 꽤 애정을 가지고 있는 단편인 것 같던데, 음, 꽤나 오싹했다. 가족을 바라보는 소년의 고립된 싸늘한 시선은 결국 무서운 결말로 치닫는다.

만족도로 보면 이번 웃음 시리즈 3권 중에서 가장 만족스러웠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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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소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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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소설>은 ‘독기어린 웃음’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모은 단편집이다. 다른 두 권의 단편집보다 사회비판적인 성격이 강한 이야기가 많다.

<유괴천국>은 공부에 시달리는 손자를 놀게 해 주고 싶어 손자를 납치한 부유한 할아버지 이야기다. 아마, 요즘 공부에 대한 학부모와 아이들의 집착에 가까운 태도를 본 사람이라면 짐작하겠지만, 할아버지가 납치한 아이는 무엇보다 공부를 하고 싶어한다. 스스로 뭔가를 결정해 본 적도 없다.

<메뉴얼 경찰>은 사건 해결보다는 자리보존에 목을 매는 경찰들에 관한 풍자극이다. 매뉴얼대로 따라가면 유죄는 무죄가 되고 무죄는 유죄가 될 분위기라, 자꾸 헛웃음이 나온다는. 한국 공무원들 생각도 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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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소소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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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소소설>은 ‘쓴웃음 소설’을 모은 단편집이다. 이른바 "썩소소설"인 셈인데,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진지한 유머감각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은 것 같다. (다른 두 권에 비해 편하게 읽혔다)

유명한 문학상을 둘러싼 작가와 편집자의 동상이몽은 상의 종류가 많아 수많은 신인 작가가 태어나고 또 잊혀지는 일본의 문단 현실을 풍자하는 이야기가 여러 편에 걸쳐 이어진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 문단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아, 그 단편들을 읽으며 정말 썩소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는 <신데렐라 백야행>.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백야행>의 핵심을 신데렐라 이야기와 결합시켰다. 섹스에 능한 신데렐라가 아버지와 계모, 왕자를 모두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킨다는 이야기다. 사실 <백야행> 안 본 사람은 그냥 피식 웃고 말 정도의, 별로 완성도는 대단치 않은 이야기인데, <백야행>을 읽은 사람이라면 잊을 수 없는 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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