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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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을 다 읽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남의 독서일기를 읽을 때 늘 그렇듯, 나는 내가 읽은 책에 관해 쓴 글을 먼저 읽고 이 책을 다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한다. 이 책의 저자에 그 정도의 예의는 차리는 편이 예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가 읽은 책을 나도 읽고 이 책의 각 장을 소화하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편이 좋겠다. 그래서 결국 다른 책 읽어가면서 이 책을 읽어야 해서 시간이 한참 걸렸다는 이야기.

나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고 음악을 닥치는 대로 듣는 편이다. 책들과 음악들, 영화들 사이에 줄을 세우고 그들을 분류하는 작업은 익숙하지 않다. 익숙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지만, 그런 필요성이 있지 않은가 생각하는 이유는, 결국은 책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식하다는 말은 모른다는 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뭘 알고 있는지 모른다는 데도 적용된다.

<독서일기>의 저자인 알베르토 망구엘은, 작가 설명에 따르면 유명한 작가이자 번역가이자 편집자라고 한다. (프로필 자체가 꽤 이상적이다) 게다가 학창시절에 서점 점원으로 일하다가 무려 보르헤스를 만나게 되는데, 시력을 잃어가던 보르헤스의 "책 읽어주는 남자"가 된다. 덕분에 보르헤스가 책에 덧붙이는 독특한 촌평을 얻어들을 기회를 얻게 되었고, 거기서 문학적 영감을 받는다. 게다가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외교관인 탓에 이탈리아, 영국, 타히티, 캐나다 등지를 옮겨다녔다고. 운이 겁나 좋았던 셈이다.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그가 읽은 책들을 열거한 독서일기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흔히 독서일기라 함은, 자기가 읽은 책에 대한 단상을 붙이는 데 지나지 않지만, 망구엘의 <독서일기>는 그가 여러번 반복해 읽은 책들 중 12권을 골라 한달에 한 권씩 다시 읽으면서 단상을 정리한 책이다. 다시 말해, 새로 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를 깊이 파고들어간 책이다. "독서는 편안하고 고독하며 느릿한 감각적인 행위다"라는 자신의 말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독서를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스스로 해박한 독자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다독을 해 온 사람이니, 여러 번 읽은 책을 한 달 동안 다시 읽으면서 생각에 잠긴다고 상상해보라. 얼마나 할 얘기가 많겠나.

그는 10월에 <네 사람의 서명>을 다시 읽었다. 자, 이 독서일기에는 <네 사람의 서명>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되어 있지 않다. 줄거리를 모르고, 책을 모르고 이 글부터 읽는다면 망구엘이 인용하는 인용구에만 관심이 치우칠 수 밖에 없을 정도다. 하지만 <네 사람의 서명>을 최소한 한 번 정도 정독해 본 독자라면, "국외자는 왓슨처럼 드러난 것 이상을 보지 못한다"는 말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그리고 저자가 여행을 하고 집에 돌아오고의 과정에서 신변에 일어난 자질구레한 일들이 자연스럽게 책과 섞인다. "홈스의 도시(내가 처음 영국에 갔을 때 찾으려 했지만 당연하게도 끝내 찾지 못했던 그 런던)은 완벽하게 허구이고, 실재하지 않는 현실의 반영이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을 것이다.

책에 대한 불만이라면, 왓슨을 왜 굳이 웟슨이라고 썼는지, 그리고 <피네건의 경야>로 이미 잘 알려진 책을 언급하는데 왜 굳이 <피네건즈 웨이크>라고 썼는지 하는 것들일 것이다. 저자는 한 권의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수많은 책을 인용하고 거기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낸다. 그야말로 보르헤스 아닌가.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책읽기다. 1년에 책 12권이라고 말하지만 아마도 120권도 넘을 것이다. 관련된 책과 관련되지 않은 책들 모두가 한 사람의 서가에 꽂혀있고, 거기서 끝없이 길은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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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9-23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너무 좋았어요. 이제, 그림일기와 독서의 역사를 읽어볼까 생각중이랍니다.

marina🦊 2007-09-23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고 나서 망구엘이 쓴 책을 다 사버렸어요. 연휴 동안 열심히 읽어야 할텐데요. 이 책 정말 너무 좋더라는. ^^
 
나만의 스타일 여행 - 하이힐을 신고 떠나는 도시 여행
김선경 지음 / 안그라픽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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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만의 스타일여행>은 뉴욕, 파리, 런던, 홍콩, 샌프란시스코를 우아하게 여행하는 법을 담고 있다. 요즘 <쇼핑 앤 더 시티>를 비롯해 이런 책들이 슬슬 유행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실제 이 책들의 효용가치에 대해서는 솔직히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샌프란시스코를 제외한 나머지 네 도시는 나도 최소한 2번 이상 갔다온 적이 있다. 출장을 갔을 때는 이 책에서 소개하는 고급 호텔에 묵은 적도 있고. 그래서 가 본 도시들의 경우에는 경험에 기초해서, 여기는 어디지, 라던가 여기도 나왔네, 하는 식으로 읽어보았는데,

다른 도시에 비해 뉴욕 부분 사진들에는 옆에 설명이 있는 호텔이나 식당 중 어느 호텔이나 식당의 사진인지 명기가 되지 않았다. 사진이 이미지컷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사실상 가이드로서의 효용가치가 떨어지는 셈이다. 하다못해 그냥 길거리 사진을 섞어놓았어도 전혀 알 도리가 없다. 어차피 이 책 한 권만 들고 가라는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 아니기 때문에 이 책에는 주소와 전화번호 이상의 정보가 없다. 실내를 찍은 어두침침하거나 흔들린 사진들을 너무 크게 쓴 것도 종종 등장한다;;;(퐁피두 센터 내부사진은 정말 안습이다) 딱히 멋있는 사진들도 아닌다. OTL 또 하나 궁금한 점은, 뉴욕은 style travel plus 쪽에 다양한 레스토랑이나 쇼핑할 수 있는 샵 정보가 실려있는데, 런던의 style travel plus에는 모든 여행가이드북에 실려있는 런던아이, 타워브릿지와 같은 관광 명소들이 중점적으로 실려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저자가 런던을 뉴욕보다 잘 몰라서일까? 뭐,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노팅힐의 트래블 북숍 아래에 있는 사진은 그 옆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의 내부 사진일까? 여튼 참 궁금한 게 많은 책이었다.

<나만의 스타일여행>은 각 도시를 최소한 한 번쯤 출장으로라도 가 본 적이 있는 상당한 소득수준의 여성이 일주일정도 그 도시에 가서 쇼핑과 휴식을 위한 여행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무척 유용할 책이다. 지도가 전혀 없이 주소만 적혀 있기 때문에 택시값을 선뜻 낼 수 있다면 이 책이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참고로 책 뒷표지에 적혀있는 스타일 여행 백서는, 도시 여행만 1년에 5번은 다녀오는 나로서는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여행을 가서도 멋지게 하고, 경험을 사고, 가끔 좋은 호텔에서 묵는 사치를 해 보는 것은, 도시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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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시간 노리코 3부작
다나베 세이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쓴 다나베 세이코는 당연하게도 오사카 출신이었다. 1981년에 쓴 책이라는 <아주 사적인 시간> 역시 오사카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사투리는 뭐, 늘 그렇듯 번역이 되지 않았지만, 여주인공의 남편 고가 그야말로 야비한 사나움을 번뜩이며, 지극한 남성적인 말투로 오사카 사투리를 뱉어내는 모습을 깔끔한 서울말로 읽고 있자니, 오사카에 몹시도 가고 싶어졌다. <완다라는 이름의 물고기>의 완다처럼, 나는 오사카벤을 들으면 흥분해버리는 류의 인간일런지도. 기다렸다는듯 토마토 한개쯤 뭉개버리는 듯한 그 말투가 가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좋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은 그저 그랬다. 그림을 그려가며 사는 여자가 우연히도 알게 된 남자는 너무나 너무나 돈이 많은집 아들이었다. 그 남자는 자꾸 결혼하자고 노래를 부르다가 고급 맨션을 사더니 같이 살자고 한다. 여자는 그 집을 구경갔다가 그만 집을 보고는 결혼하자고 해 버린다. 이 책은, 그들이 결혼한지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한다. 어딘가에 연재했던 글을 묶은 느낌이랄까, 같은 말이 자꾸 반복된다. 앞에서 한 비슷한 말을 반복한다. 인물들이 만나고 어쩌고 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만 든다. 기타등등.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름의 미덕이 있다는 뜻인가. 글쎄. 일본 소설들은 이런 데가 있다.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읽게 만드는 면이. 내용 전개는 껄끄럽고 서투르다는 느낌이 드는데, 공감이 가는 문장들이 수시로 발견된달지. (아, 여기까지 읽고 책을 다시 폈더니 작가의 말이라는 게 있다. 정말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나름 연작물인 모양인데, 불행히도 나는 노리코라는 여자 주인공에게는 공감할 수는 있지만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느끼는 심리의 일부를 나도 절절히 공감하기 때문에 책을 끝까지 읽을 수는 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약간 화가 나 버렸다.

관계의 주도권을 쥐는 사람은 주는 사람이다. 노리코의 남편 고는 벼락부자 집안의 적출 맏아들이며, 잘생겼고, 몸도 좋고, 자신감 넘치고, 여자도 차고 넘치게 만나던 사람이다. 질투도 강해, 노리코는 연애하다가 바람을 피웠다는 이유로 고에게 두들겨 맞은 적도 있다. 고는 노리코와 살아서 좋다고, 결혼해서 매일 보니까 좋다고 수시로 말하고 노리코는 그런 고의 장단에 맞추어 적당히 지내왔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마음속 어딘가가 툭 부러지는 소리를 들은 거다. 고는 노리코가 처녀시절에 혼자 살던 아파트에 몰래 가서 노리코가 옛날 남자들과의 섹스까지 기록해 놓은 일기장들을 훔쳐보고, 노리코는 남편과 함께 갔던 파티에서 알게 된 나카스키 씨와 만나면서 정신적 유대감을 느낀다. 게다가 고가 형과 갔던 골프여행에 사실 여자들을 동행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고는 도쿄에 가서 살면서 아이도 낳자며, 이렇게 대단한 집으로 시집왔으면 노력을 좀 하라고, 너같은 연상의 노처녀를 구제해줬잖아, 하는 식으로 공격한다.

남자의 기분이 저조할 때, 우울해하거나 기분나빠할 때 어떻게 해 주면 기분좋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부담이 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노력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어버리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기분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가 내 기분좀 풀어줘, 하는 표정으로 멀뚱히 있는데 갑자기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지는 거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내가 우울해할 때면 이러저러한 일로 기분이 풀렸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행동이 아무 도움도 안 되기 시작한다. 더 이상 그의 어떤 행동이나 농담으로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한다. 저 사람이 이렇게 노력해주는데, 난 더 이상 기분좋은척 조차 할 수 없는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나베 세이코의 말을 빌면,
"원래 사랑했던 혹은 서로에게 상냥했던 남자와 여자 사리에 냉혹한 말이 처음으로 오갔을 때의 심적 충격은, 세상의 그 어떤 큰 사건에도 필적할 만하다."

그 어떤 연기자에게도 사적 생활은 필요하다. 평생을 연기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까발려놓고 사랑받을 수 있는 인간도, 사실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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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꿀 - 삼손 이야기 세계신화총서 5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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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독서가 그렇지만(책에 한정하는 말은 아니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문제만큼 중요한 건 없다. 소설이나 영화라면 누구의 관점으로 볼 것인가, 누구의 시선으로 이 이야기를 따라갈 것인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세계신화총서에서는 다섯번째에 이르러 구약의 인물인 삼손을 다루고 있다. (가능한) 삼손의 관점에서. 마치 이제라도 그를 누군가 이해해 주어야 한다는 듯이.

하지만,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독법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 모든 가혹한 시련과 시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따르는 인물이야말로 성경에서 칭송하는 인물이다. 여튼, 다시 말하지만 성경을 읽을 때 주안점을 두는 곳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의 문제다.

최근 성경을 다시 읽고 있기 때문에 졸음을 참아가며(대체 왜 11시30분부터 잠이 오는 건데!) <사자의 꿀>을 읽었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흥미로웠다. <사자의 꿀>은 성경 독법과 다른 방식으로, 지리적인 문제와 성경 원문에 쓰인 단어를 들먹어가며 삼손의 이야기를 해석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삼손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으며(어렸을 때 영화로 삼손의 일대기를 본 뒤 너무 무섭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며칠전에 끝낸 성경은 욥기였다. 하지만 삼손의 이야기를 모를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고, 나 또한 알고 있다. 하지만 충분히 자세하지는 않았다.

데이비드 그로스먼은 성경에서 자주 벌어지는 단절과 비약의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이 텍스트가 서술된 방식에 집중해서 삼손의 내면을 들여다보려고 하고 있다. 이 책에서 종종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삼손에 대한 현대적인 평가는 그가 난삽하도록 폭력적이며, 그 도가 지나치다는 것 정도다. 자폭테러의 원조라는 말에도 한점 손색이 없다. 하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그리고 가끔 설교에서 삼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깨닫지 못했던 건 그가 상당히 시적인 언어를 구사했다는 사실이다. 삼손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사사기(혹은 카톨릭식으로는 판관)의 필자가 삼손에 대해 특별히 동정적이거나 우대하는 태도의 서술법을 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말이 시적으로 적힌 것은 상당히 기묘한 이질감을 안겨준다.

성당에서 삼손의 이야기가 인용되는 경우는 인간의 우둔함,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의 딱함,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인간의 마지막 목소리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집중되어 있다. 대중문화에서 반복적으로 차용되는 삼손의 이미지는, 이 책에서 몇번 인용해 들려준 바와 같이 그의 비정상적으로 강렬한 힘에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고독이라면. 영웅의 고독에 대해서라면 이미 많은 책들이 세상의 수많은 영웅들에 대해 분석한 바가 있지만, 삼손처럼 무지하게만 해석되던 인물이라면 약간 다를 수밖에 없다. 그가 시적으로 말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개그처럼 느껴진다. 결국,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성경 속에서도 다른 많은 등장인물들보다 훨씬 오해되어 읽히고 타인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계시를 받고 태어났으나 그는 살육을 저지른 뒤 목이 타 죽을 지경이 되거나 마지막 복수를 기원할 때에만 하나님을 찾는다. 성경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윗이나 욥처럼 믿음을 증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리석음을 증명하기 위한 인간으로 존재해왔다.

유대 전통에서는 그 호전성과 건달 같은 행동과 여자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짓 때문에 삼손을 가끔 경멸적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유대인의 의식 속에 삼손은 민족적 영웅이자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다. 어쩌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격의 구조 깊은 곳에서는 삼손이 진정 '유대적인 특질을 표현하고 함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외로움과 고립, 자신의 분리된 상태와 신비를 보존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 동시에 이방인과 섞이고 동화되고자 하는 가없는 욕망이라는 면에서. -114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점이며(혹은 신약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자식인 예수의 죽음이 '나'의 죄로 인한 것이며 그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남을 믿는 것),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혹은 권세나 영광)을 위해 어떤 쓰임을 가지고 있는지 깨닫게 해 달라는 소망이다. 자신의 달란트(talent, 즉 현대 영어에서 재능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그 단어)가 무엇인지 깨닫고 쓰임받게 해 달라는 소망. 그런데 그 달란트가, 삼손의 경우에는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여느 기적의 인물들처럼) 출생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그의 아버지가 아내의 임신에 대해 불만어린 시선, 혹은 의심을 쉬이 거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정도 간통의 증거물로서 인식되는 인물이었고, 부모에게서 탄생과 동시에 죽음을 거론당한 삼손은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도망하는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힘을 끝없이 토해내면서 살아간다. 폭행을 저지를 이유를 만들어 살육에 나서고, 굳이 적의 땅에 있는 창녀를 찾아간다. 그는 평범하게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평범을 갈구하지만, 그런 욕망 때문에 스스로를 낯선 자들 사이에 몰아넣기도 한다.

선택받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자신이 누구인가의 문제에 대해 누군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달라는 듯이. 그와 동시에 삼손은 자신이 하나님으로 부여받은 쓰임새가 아니어도 존재가치가 있는 인간임을 증명받고 싶어한다. 어디서 온 누구인지 제대로 밝혀지지도 않은 들릴라와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그래서다. 사랑에 빠진 일이 가치가 있는 이유는 그래서다. 하지만 그의 탄생의 목적이 민족을 구원하는 것이었고, 그가 애초에 왜인지 모르겠는 이유로 블레셋 처녀에게 장가를 들겠다고 했던 이유는 주께서 블레셋 사람을 치실 계기를 삼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사랑에 빠지는 것도 그래서, 필요한 일이었다. 삼손이 자유의지로 행한 유일한 일인 동시에 그가 잉태의 순간에서부터 쓰임을 명받은 그 이유를 실행하기 위해 필요했던 일. 주어진 운명에 상관없는 동시에 주어진 운명 그 자체로 그를 이끌 수 있는 일. 삶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인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고 신일숙은 말했지만(웃음), 삶은 언제나 가야만 하는 그 길로 가기 때문에 인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

+
삼손이 눈을 뽑힌 뒤 성노리개로 살았다는 해석은, 확실히 허무맹랑한 것은 아닌 듯하다. 이문열의 <익명의 섬>에 사는 깨철이와 삼손이 다를 바가 무언가. 그는 앞이 보이지 않으며, 건장하고, 건장함은 번식과 그 외의 갖은 쾌락을 함의하는 전형적 코드다. 게다가 그는 노예다. 어렸을 때 본 삼손 영화(대체 제목이 뭐였고 그걸 왜 봤을지 상상하기 힘들지만)에서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장면은 그가 연자맷돌에 묶여 그것을 돌리는 장면이었다. 대체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그 주변에서 야유하고 조롱하던 블레셋인들은 삼손의 머리가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등등.

성경에서는 섹스가 무척 많은 용도로 활용된다. 인간의 나약함은 섹스 혹은 사랑에서 비롯된다. 위대한 인물의 출산 역시 섹스에서 시작된다. 성령으로 잉태한다는 사실을, 성경 속의 인물들조차, (자칭 유일한) 하나님의 민족조차 믿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기이한 탄생은 오해와 수군거림의 시작이 된다. <우부메의 여름>에서 교고쿠도가 해석한 것처럼 이상한 탄생을 한 자들이 영웅이 된다기보다는 영웅의 특이점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이상한 탄생의 신화가 생기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여튼 흥미로운 일이다. 무려 다윗조차 간통죄를 저지르지 않던가. 죄를 짓는 일은 신앙을 갖고 유지하는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게다가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최초의 죄를 저지르기 이전에 이미 원죄를 지은 몸이다. 시작하기 전부터 게임은 끝나 있다.

무려 욥기에서는, 욥의 신실함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은 악마의 말을 따라 욥을 온갖 시험에 들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재앙이 클수록, 절망이 깊을수록 신실해져야 구원받을 수 있다. 여튼, 도망갈 구석이 없는 순환논리다.

많은 신화들이 그렇지만, 성경 역시 독해하는데는 보다 많은 상상력, 그리고 더 많은 지식과 구조적인 눈이 필요하다. 이른바 믿음이라는 것이 없이 성경을 읽자면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지만, 믿음으로 읽으면 모두 당연한 일 투성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운명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주인공들조차 알아서 운명의 수레바퀴에 몸을 맡기고 부서져간다. 우연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은 인간이 종교를 발명해냈기 때문에, 신화는 필연적으로 운명론을 강조한다.

삼손은 애초에 명받은 쓰임로부터 끊임없이 도망가려는 인물이다. 그 운명이 아니어도 자신에게 존재가치가 있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는 결국 운명으로 회귀하지만, 그의 투쟁은 의미심장한데가 있다. 재능으로부터 도망가는 일이, 재능을 받아들이는 일보다 더 간절할 수 있다. 결국 생애 마지막 순간의 삼손처럼, 재능을 빼앗긴 뒤의 무력함과 공포, 조롱을 모두 맛본 뒤에 아무런 확신 없이 기도만 가지고 덤벼야 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 운명으로부터 가능한 멀리 도망가고자 하는 충동이, 그의 삶을 자포하기한 것으로, 자기파괴적으로 만들었다. 자기 인정은 자기 혐오보다 힘들다. 그래서 낯선 사람들에게서만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
결국 삼손은 마지막 순간에 (기복)신앙으로 돌아간다. 삼손의 최후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보여달라는 내용이 아니라 나의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게 해 달라는 내용이다. 또한,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라는 말은 그간의 불충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통성기도다. 확실히 구약의 하나님은 강렬한 복수의지의 수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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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된 이야기
소피 칼 지음, 심은진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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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고백하거나 구연하는 기이한 방법:

이걸 아포리즘이라고 해야 하나. 소피 칼의 <진실된 이야기>는 약간 모호한 책이다. 내용도 그 생김새만큼이나 예쁜 책을 원하는 말랑한 감성의 소유자라면 이 책을 읽다가 혐오를 느끼거나, 최소한 불편해할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과격한 이미지와 글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다가 별 수 없이 실망해버릴지도. 어떻게 생각해도 내게는 딱떨어지는 구석이 없는 책이지만,

커피잔

그의 지성이 나를 주눅 들게 하였다. 그는 내게 함께 점심을 들자고 했다. 그의 제안은 나를 기쁘게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를 불편하게도 했다. 그와 대화를 나눌 지적 능력이 부족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나는 미리 준비를 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에 대해 말할 것인지 그에게 물어보았다. 별로 도움도 안되고, 또 쓸데없는 짓인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대화 연습은 나를 진정시켜주었다. 그런데 D는 뜬금없이 이런 주제를 정했다. "아침에 당신을 침대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주일 내내 생각했다. 그리고 여러 개의 대답을 모아놓았다. 약속한 날, 그는 내게 질문을 던졌고 나는 대답 대신 같은 질문을 그에게 되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커피향." 우리는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식사가 끝난 후 커피가 나왔다. 그리고 나는 추억을 위해 그 커피잔을 훔쳤다.

-71쪽.

다 읽고 나니 프레베르를 몹시 읽고 싶어진다.

이미지에 얽힌 짧은 이야기들은 확실히 불협화음을 내는 것으로 그 존재를 증명한다. 여성스러운, 몸으로 쓰는 문장. 좋아하기엔 약간 낡았지만, 싫어하기엔 너무 잘 알고 있는.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남편에 관한 열개의 이야기. 열 개의 이야기 중 하나는 남편의 편지에 관한 것이다. 결혼식을 올린 지 두달 후, 나는 그의 타자기에서 종이 한 장이 삐져나온 것을 보았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느냐고 언젠가 당신은 내게 물었지. 내가 아무 대답도 안했던가?" 그러나 이 편지는 내게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맨 뒤의 H라는 글씨에 줄을 긋고 내 이름의 이니셜인 S라고 쓴다.

아티스트로 산다는 건 참 좋은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는데, 소피 칼의 경우도 마찬가지.사진작가, 설치미술가, 개념미술가인 그녀는 폴 오스터에게 허구의 인물을 하나 창조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자신이 그녀처럼 되어 1년동안 살겠다고. 그녀는 <거대한 괴물>에서 마리아가 된다. 다음에 읽을 소피 칼과 폴 오스터의 <뉴욕 이야기>는 그녀가 살았던 뉴욕에서의 1년에 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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