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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시간 ㅣ 노리코 3부작
다나베 세이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쓴 다나베 세이코는 당연하게도 오사카 출신이었다. 1981년에 쓴 책이라는 <아주 사적인 시간> 역시 오사카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사투리는 뭐, 늘 그렇듯 번역이 되지 않았지만, 여주인공의 남편 고가 그야말로 야비한 사나움을 번뜩이며, 지극한 남성적인 말투로 오사카 사투리를 뱉어내는 모습을 깔끔한 서울말로 읽고 있자니, 오사카에 몹시도 가고 싶어졌다. <완다라는 이름의 물고기>의 완다처럼, 나는 오사카벤을 들으면 흥분해버리는 류의 인간일런지도. 기다렸다는듯 토마토 한개쯤 뭉개버리는 듯한 그 말투가 가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좋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은 그저 그랬다. 그림을 그려가며 사는 여자가 우연히도 알게 된 남자는 너무나 너무나 돈이 많은집 아들이었다. 그 남자는 자꾸 결혼하자고 노래를 부르다가 고급 맨션을 사더니 같이 살자고 한다. 여자는 그 집을 구경갔다가 그만 집을 보고는 결혼하자고 해 버린다. 이 책은, 그들이 결혼한지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한다. 어딘가에 연재했던 글을 묶은 느낌이랄까, 같은 말이 자꾸 반복된다. 앞에서 한 비슷한 말을 반복한다. 인물들이 만나고 어쩌고 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너무 작위적이라는 느낌만 든다. 기타등등.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름의 미덕이 있다는 뜻인가. 글쎄. 일본 소설들은 이런 데가 있다.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읽게 만드는 면이. 내용 전개는 껄끄럽고 서투르다는 느낌이 드는데, 공감이 가는 문장들이 수시로 발견된달지. (아, 여기까지 읽고 책을 다시 폈더니 작가의 말이라는 게 있다. 정말 연재되었던 작품이다.)
나름 연작물인 모양인데, 불행히도 나는 노리코라는 여자 주인공에게는 공감할 수는 있지만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느끼는 심리의 일부를 나도 절절히 공감하기 때문에 책을 끝까지 읽을 수는 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약간 화가 나 버렸다.
관계의 주도권을 쥐는 사람은 주는 사람이다. 노리코의 남편 고는 벼락부자 집안의 적출 맏아들이며, 잘생겼고, 몸도 좋고, 자신감 넘치고, 여자도 차고 넘치게 만나던 사람이다. 질투도 강해, 노리코는 연애하다가 바람을 피웠다는 이유로 고에게 두들겨 맞은 적도 있다. 고는 노리코와 살아서 좋다고, 결혼해서 매일 보니까 좋다고 수시로 말하고 노리코는 그런 고의 장단에 맞추어 적당히 지내왔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마음속 어딘가가 툭 부러지는 소리를 들은 거다. 고는 노리코가 처녀시절에 혼자 살던 아파트에 몰래 가서 노리코가 옛날 남자들과의 섹스까지 기록해 놓은 일기장들을 훔쳐보고, 노리코는 남편과 함께 갔던 파티에서 알게 된 나카스키 씨와 만나면서 정신적 유대감을 느낀다. 게다가 고가 형과 갔던 골프여행에 사실 여자들을 동행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고는 도쿄에 가서 살면서 아이도 낳자며, 이렇게 대단한 집으로 시집왔으면 노력을 좀 하라고, 너같은 연상의 노처녀를 구제해줬잖아, 하는 식으로 공격한다.
남자의 기분이 저조할 때, 우울해하거나 기분나빠할 때 어떻게 해 주면 기분좋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부담이 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노력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어버리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기분상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가 내 기분좀 풀어줘, 하는 표정으로 멀뚱히 있는데 갑자기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지는 거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내가 우울해할 때면 이러저러한 일로 기분이 풀렸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행동이 아무 도움도 안 되기 시작한다. 더 이상 그의 어떤 행동이나 농담으로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한다. 저 사람이 이렇게 노력해주는데, 난 더 이상 기분좋은척 조차 할 수 없는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나베 세이코의 말을 빌면,
"원래 사랑했던 혹은 서로에게 상냥했던 남자와 여자 사리에 냉혹한 말이 처음으로 오갔을 때의 심적 충격은, 세상의 그 어떤 큰 사건에도 필적할 만하다."
그 어떤 연기자에게도 사적 생활은 필요하다. 평생을 연기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까발려놓고 사랑받을 수 있는 인간도, 사실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