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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딸들
D. H. 로렌스 지음, 백낙청 옮김 / 창비 / 2001년 3월
평점 :
품절
D.H. 로렌스가 쓴 단편 <당신이 날 만졌잖아요>는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시선을 외면하는 데 선수인 여자의 기묘한 로맨스를 보여준다. 이 단편은 <목사의 딸들>이라는 소설집 맨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다. 작가 이름과 단편 제목이 벌써 완전 선정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야기는 그렇게 어두침침하지는 않다. 어두운 침실이 사건의 발단이기는 하지만.
로클리 집안에는 세 식구가 살고 있다. 나이들고 육체가 허약해진 아버지, 노처녀인 마틸다와 에미 자매가 바로 그들이다. 마틸다는 분별력있는 우아한 여인이었고, 에미는 집안 일을 잘 돌보았다. 자매의 아버지인 테드 로클리는 아들이 없는 인생을 한탄하다가, 에미가 열네살, 마틸다가 열여섯살이었을 때 여섯 살 먹은 헤이드리언이라는 남자애를 양자 삼아 데리고 왔다. 소녀들은 낯선 소년을 반기지 않았고, 자신들을 누나라는 말 대신 사촌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게 했다. 그러다 열다섯살이 되었을 때 소년은 식민지로 가겠다고, 캐나다로 가겠다고 했다. 그러다 전쟁이 일어났고, 헤이드리언은 참전해 유럽으로 왔고, 휴전협정이 맺어지자 그는 양아버지와 사촌들을 만나기로 했다. 그래서 스물 한 살의 헤이드리언이 로클리 집안에 돌아와 얼마간 양아버지의 침실을 쓰게 되었다. 헤이드리언은 영국보다 민주적인 캐나다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는데 마틸다는 그 사실이 약간 불만스럽다. 너무 잘난체를 하는 것 같아서다. 게다가 아버지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양아들이 찾아오다니, 유산 다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닐까. 아버지가 유산 문제를 이야기한 날 밤, 마틸다는 아무래도 걱정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버지 방으로 갔다. 침대 위에서 뒤척이는 기색을 느낀 마틸다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 누워 있는 얼굴의 이마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오늘밤엔 잠이 안 오시나봐요?” 돌아온 대답. “아니, 자는데요.” 아버지의 침실을 헤이드리언이 쓴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날 밤, 마틸다도 헤이드리언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사랑한다는 고백도 아니고 키스도 아니고, 자던 남자 이마에 손 한번 얹은게 뭐가 문제라고. 하지만 그 일 이후로 두 사람은 서로를 예민하게 의식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헤이드리언은 마틸다와 결혼할 생각이 있다고 양아버지에게 말을 한다. 양아버지는 그 제안이 마음에 든 나머지 마틸다가 그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유산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딸들을 협박한다. 마틸다는 그가 돈 때문에 자기와 결혼하려 한다고 우기지만 헤이드리언은 그저 침착하게 행동할 뿐이다. “돈 때문이 아니라는 걸 마틸다 사촌은 알고 있어요.” 침착하지만 굴하지 않는 저돌적인 태도로, 헤이드리언은 마틸다를 설득한다. “나도 그 일이 실수였다는 것은 알아요. 하지만 잊어버리지는 않을 거에요. 일단 남자를 깨워놓으면, 자라고 해서 다시 잠을 잘 수 있는 건 아니란 말입니다.” 마틸다는 화를 내며 망측한 말이라고 하지만 헤이드리언의 태도는 흔들리지 않는다. “뭐가요? 당신이 날 만졌잖아요.” 그리고 헤이드리언은 승리를 거둔다. 마틸다의 태도는 그대로인 듯 하지만 차가움은 미묘하게 가라앉은 채 두 사람은 결혼을 한다.
고전적이다 못해 낡은 옛날 이야기같아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이 날 만졌잖아요>에는 요즘 드라마에도 통용될 코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10살 연상의 여자를 좋아하는 헤이드리언에게서 <아현동 마님>을 연상할 수 있고, 무관심한 듯 하지만 나이 어린 에미를 두고 마틸다에게 집중적인 관심을 보이는 헤이드리언의 태도는 츤데레에 다름아니다. 친딸과 양아들이 결혼하는 식의 가족드라마 역시 낯설지 않고, 딸 부잣집의 괴팍한 아버지 캐릭터도 낯이 익다. 돈 때문에 결혼을 해야 하는 식의 이야기는 또 어떻고.
마틸다의 아버지가 최종적으로 작성한 유언장은 이런 내용이다. 마틸다가 헤이드리언과 결혼하면 옛 유언장, 즉 약간의 물건과 돈을 제외하고 모든 재산을 마틸다와 에미가 상속받는 게 유효하고, 마틸다가 거절하면 사망 후 육개월 후 전 재산이 헤이드리언에게 넘어가게 된다. 헤이드리언은 돈 때문에 결혼하고 싶어하는 게 아님을 이보다 더 명징하게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마틸다가 결국 결혼을 승낙한 이유도, 그런 이해득실을 따져 본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