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 적들 - 작가의 길을 묻는 28통의 편지
베르나르 앙리 레비&미셸 우엘벡 지음, 변광배 옮김 / 프로네시스(웅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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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른 사람들을 비겁하게 공격하는 데 이력이 난 당신, 기만적인 방송용 언행의 전문가인 당신. 그런 당신이 입는 하얀 와이셔츠조차도 불명예스럽습니다. 강자들과 친하고 또 어린 시절부터 아주 부유했던 당신.” 굳이 이런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사람은 다음과 같다. “나는 허무주의자에다 반동적인 인물이며, 냉소적인 사람인 동시에 인종차별주의자에 여성 혐오론자입니다.”
전자는 프랑스의 부르주아 좌파 지식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이고, 후자는 자기파괴적인 우파 소설가 미셸 우엘벡이다. 자칭(타칭) 공공의 적인 두 사람은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 편지 교환을 시작한다. 이쪽 진영과 저쪽 진영의 싸움닭이 편지를 주고받으니 재밌는 싸움 구경이 되겠구나 하는 기대는 이들의 지적이고 현란한 블랙유머를 엿보는 즐거움으로 바뀐다. 은근한 폭로전과 자기고백도.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자기 이름을 구글에서 검색하는 것으로 모자라 자기 이름이 뜰 때마다 실시간 알람이 울리게 해 두었다던가, 미셸 우엘벡이 ‘나의 어머니라는 시시한 여자’가 쓴 책 때문에 폭로된 가족사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라던가. 편지는 참으로 길게 이어지고 가끔은 책을 덮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지성이 하늘을 찌르지만, 68혁명을 거쳐 21세기를 현재형으로 살아가는 두 남자가 모든 면에서 정반대인 상대를 인정하며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은 2010년을 대한민국에서 사는 소시민의 눈에는 천상의 아름다움으로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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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소설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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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손바닥 혹은 나뭇잎 한 장. 장편소설(掌篇小說)이나 엽편소설(葉片小說)이라고 불리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콩트 모음집이다. 작은 판형에 290여쪽, 그런데 68편이나 실려있는 건 그래서다. 이야기 하나가 두, 세 페이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설국>으로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도 유명한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의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책이다. 그가 젊은 날에(이십대였던 1921년부터 1935년 사이) 쓴 이야기들이라 <설국>과 <잠자는 미녀>같은 작품들에 이르는 단초가 되는 ‘발상’을 만날 수 있어 흥미롭다. 여자의 몸, 어린 여자의 몸, 생명, 삶, 죽음, 희생을 비롯한 죽음과 맞닿는 탐미주의적인 아름다움을 탐색하는 이야기도 있고, 예상외로 쿨한 연애담도 있고, 환상담도 꽤 있다.
이야기 내용 자체에 집중해 호불호를 가르는 일도 의미있겠으나, 그보다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는 방법이 있다. “많은 작가들이 젊은 시절에 시를 쓰지만, 나는 시 대신 손바닥 소설을 썼다. 이제 와서 보건대, 이 책을 ‘나의 표본실’이라 하기에 부족함은 있지만, 젊은 날의 시정신은 꽤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짧은 이야기를 시처럼 구사해 풀어내고자 했다는 뜻이다. 고요한 호수에 파문이 일 듯 첫 문장에서 시작된 여운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도 이 책을 즐기는 방법. “그녀가 싫어 도망친 남편에게서 편지가 왔다.” “사실 그의 어머니는 눈치가 둔하다.” “노인과 젊은 처녀가 걷고 있었다.” “언니는 너무나 상냥한 사람이었는데 어째서 그토록 처참하게 죽어야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요즘 언니는 동생의 기모노를 자주 입는다.” “눈()이 반사되어 환해진 젖빛 유리문에 장식 소나무 그림자가 어렸다.” “여기서 말하는 장님이란, 눈이 안 보이는 걸 의미하지 않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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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 - 느낌이 있는 국립공원 속살 탐방기
박경화 지음 / 양철북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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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에서 선으로. 요즘 여행의 방식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 선을 그려야 하니 걷기 좋은 길, 오랫동안 깊숙히 들어가고 싶은 길이 주목을 받는다. 주말에 서울 성곽을 따라 걸었다거나 휴가를 내 제주 올레길을 일주했다는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주변에서 들을 수 있다.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는 그렇게 천천히 선을 긋는 여행을 시작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그 숲, 그 섬에 어떻게 오시렵니까>는 녹색연합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생태 환경 작가 박경화가 쓴 국립공원 탐방기다. 저자는 2007년에 국립공원 도보순례에 참여해 전국 국립공원을 탐방한 뒤 자료조사를 하고 다시 찾아 돌아보고 썼다. 저자의 이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에는 산성과 사찰, 자연생태계를 비롯한 국립공원의 생태학적 읽을거리가 많다. 2006년 벼락을 맞고 쓰러진 할아버지나무의 위용부터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새들 사진까지, 사진자료도 풍부하다. 여행정보는 기본. ‘왜 과일껍질을 버리면 안 될까?’(농약 때문에 썩지 않고, 애초에 과일엔 탄소가 많아 썩으면 파리 같은 벌레만 꼬인다), ‘절집에선 왜 전나무를 심었을까?’(부처님이 나무 아래서 탄생해 술프오 출가해 깨달음을 얻고 나무 아래서 열반에 드셨으므로)… 이런 시시콜콜한 호기심 풀이도 꽤 성실하게 되어있다. 이 책을 손에 꼭 쥐고,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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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북디자인 1935-2005 북디자인
필 베인스 지음, 김형진 옮김 / 북노마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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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북디자인>은 1935년부터 2005년까지 출간된 펭귄 책 표지 디자인의 역사를 담았다. 한 권의 책에 도판 500개. 현대 출판물의 역사를 아우르는 의미로도 부족함이 없는 저작이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펭귄 클래식’으로 가장 익숙한 출판사로 현대적이고 대담했던 초기 문고본 디자인부터 두루 눈에 익은 책들이 등장하지만 내용 면에서 낯선 시리즈도 있다. ’펭귄 스페셜’이라고 불리는 TV 시사 프로그램에 어울릴 법한 폭로적 저널리즘 시리즈가 대표적. ’펭귄 스페셜’은 전운에 휩싸인 유럽의 분위기를 반영한, 신문과 잡지보다 깊은 읽을거리를 보급판으로 선보인 것이었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상식>(1940) <통일을 위해 투쟁하는 중국>(1939) <왜 영국은 전쟁에 뛰어들었는가>(1939) <전쟁의 새로운 방법>(1940)과 같은 책들이 공격적인 수평선과 강렬한 타이포그래피의 표지로 선보였다. 이 시리즈는 1960년대 들어 각종 사회문제(흡연, 노동조합, 약물 등)를 다루게 된다.
펭귄 클래식의 역사적 시작은 1946년의 일이었다. <오딧세이>가 그 첫 책으로, 이후 1960년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출간되기 전까지 가장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펭귄은 여러 권의 책을 자사에서 출판한 유명 작가들을 위해서는 특정 서체를 지정해 표지를 만드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1960년대 추리소설 총서의 ‘간지나는’ 표지들은 당시 유럽영화 포스터들과 궤를 같이하는 강렬한 모던함 그 자체다. 1972년작 존 버거의 <어떻게 볼 것인가>에 이르면 내용과 형식의 기발함이 대구를 이루어 종합적인 완성도, 전달력을 높이는 데 성공한다.
모든 시도가 성공한 것은 아니다. 주머니에 쏙 들어갈 악보집을 만든다는 발상은 참신했으나,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서곡> 같은 악보집은 결국 판매 부진으로 37권만에 시리즈의 막을 내리기도 했다. 이때 악보집에 사용되었던 표지의 반복 패턴 중 일부는 10여년이 지나 펭귄 시선집에서 다시 선을 보인다(악보집과 시선집의 접점을 디자인으로 이어갔다니).
펭귄 클래식, 모던 클래식, 셰잌스피어 총서 등은 같은 표지갈이를 통해 분위기 쇄신을 거듭한다. 기본 디자인을 유지하면서 타이포그래피의 굵기와 위치, 로고의 세밀한 모양 등에 미묘한 수정을 가해 전체적인 분위기를 바꿔가는 모습이 흥미롭다. 책의 내용을 관통하는 ‘한 컷’의 힘을 보여주는 2000년대의 모던 클래식 시리즈는 책의 표지가 내용을 반영한 풍부한 표정 그 자체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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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 감각의 독서가 정혜윤의 황홀한 고전 읽기
정혜윤 지음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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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책에는 두 종류가 있다. 언급되는 책을 읽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경우, 언급되는 책을 읽지 않으면 충분히 즐길 수 없는 경우.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은 후자에 속한다. 제목부터 그렇지 않나. 세계가 ‘두번’ 진행되기 위해서 필요한 전제는 한번 진행된 적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정혜윤은 이번 책에서 고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당신이 고전의 제목과 내용은 대강 알지만 읽은 적은 없는 독자에 속한다면,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 이상을 얻기는 힘들다. 이 책들을, 카프카의 <변신>을,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었다면, 정혜윤은 그 세계가 다시 진행되는 언어의 숲으로 당신의 손을 잡아 안내한다. 맹세컨대 당신이 이 책들을 어제 읽었다 할지라도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을 읽으면서는 생경하게 느껴지는 구절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번에 다 읽을 생각을 하는 건 무리고(그렇게 마음먹어도 실행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한달에 한권의 고전과 그에 상응하는 정혜윤의 글을 한 꼭지씩 읽어가는 독서 프로젝트나 모임을 해볼 만하다. 지독하게도 열심히 읽고 열심히 생각하는 저자의 책답게, 이 책에서는 많은, 또 다른 세계로 향한 창을 만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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