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만 봐도 닳는 것
임강유 지음 / 읽고싶은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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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친정을 찾았다. 몇 년 만에 간 할머니 산소에 도착 후차에서 내려 본 풍경에 미소가 지어졌다. 표지와 너무나 닳은 풍경에 핸드폰을 꺼내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용돈으로 받은 돈을 몇 번이나 꼬깃꼬깃 접어 시집오실 때부터 가지고 계시던 자그마한 비단 지갑에 넣어두셨다가 나에게만 살짝 꺼내 주셨다. 어릴 때 타지에 자주 일을 하러 가시는 아버지와 가끔 동생을 데리고 어머니가 아버지를 만나러 가시면 할머니가 오셔서 보살펴 주셨다. 그때 끓여주셨던 된장찌개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가 않는다.


오랜만에 든 시집 제목을 가만히 읊조려보며 바라만 봐도 닳을 정도로 그리움과 애달픔이 드는 것들이 있는지 떠올려보았다. 엄마의 미소, 할머니의 된장찌개, 아빠의 손, 남편의 어깨, 큰아들의 작업화 등이 스쳐 지나갔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엄마, 점점 잊혀가는 그리움의 맛, 손마디가 굵어진 손가락, 밤마다 아픈 어깨에 뒤척이며 잠을 청하는 옆자리, 졸업도 하기 전부터 쉼 없이 일하는 작업화. 이제는 볼 수 없어서 그리워서, 볼 수 있지만 너무 애달파서 마음이 닳아간다.


달빛, 벗 삼아


세월의 유수는 짐작기도 어려워

흐르는 강물과도 같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향을 잃은

돛단배 위에 머문답니다.


누군가 내게 물었습니다.

"왜 노를 젓지 않습니까?"


제 대답은 바람을 노 삼아

삶을 여행하는 중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다 해가 지고

오후 여섯시가 일곱 시를 만나는 시점

하늘이 보랗게 물들었습니다.


저의 세월은 그렇게 흐르고

점점 세월의 유수를 따라 흐릅니다.


오늘은 내일을 위한 일부.

오늘 밤은 제게는 전부가 된 일부겠지요.


잔잔한 호숫가 위에 떠있는 돛단배에서

달빛을 벗 삼는 그림자가 되어서 말입니다.


바라만 봐도 닳는 것 P38-39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세상살이를 겪으며 쌓여가는 경험이 더해진 감정은 이리저리 부딪치며 닳아서 깎여간다. 조금은 지친 마음에 문득 찾아온 시집 한 권이 단비 같다. 최근 소설이나 에세이의 긴 호흡의 책들 위주로 읽었다. 그러한 책들은 생각의 깊이를 더해준다. 그러다 가끔은 따라가기 벅차 숨이 찰 때도 있다. 쉼표 같은 시 한 구절이 여유로움을 가져다준다.


현대 시문학 다카시 문학상을 수상한 「바라만 봐도 닳는 것」은 할머니에 대한 시이다. '금지옥엽 바라만 봐도 닳는 날 키우느라 닳아버린 우리 할머니의 허리.'에서 느껴지는 할머니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문득 할아버지가 떠오른다. 초등 2-3학년 때쯤이었을까. 할아버지께서 오셔서 주머니를 뒤적이시더니 봉지 두 개를 내미셨다. 그러나 더운 여름 날씨에 아이스크림은 다 녹아 막대만 봉지 안에 남아 있었다. 손주들 먹이려 귀한 아이스케키를 사서 주머니에 넣고 오시는 동안 녹아내리는지도 모르셨던 것이다. 잊혀 기억 저편에 묻혀있던 그리운 모습들이 알음알음 깨어난다. 어떤 것들이 있는지 좀 더 안으로 들어가 보아야겠다.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들에 잊힌 그리운 추억을 꺼내보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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