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의 순간들 제프 다이어 선집
제프 다이어 지음, 이정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진에 그동안이라는 것은 없다. 그때는 그 순간이 있었고 지금은 이 순간이 있을 뿐,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사진은, 어떤 면에서, 연대순에 대한 부정이다. - [지속의 순간들] 제프 다이어, 199쪽

생각해 보니 그림의 역사, 예술의 역사는 익숙하지만 사진의 역사, 하면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진다. 사진이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의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기도 하고 사진이 가진 '현재성'이 매체의 역사를 거부한다. 제프 다이어가 선택한 방법은 목록이다. 사진가들이 촬영하기로 선택한 피사체들의 목록. 맹인을 촬영한 폴 스트랜드의 1916년 사진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2001년 9.11 당시 현장에 있었던 남성의 사진으로 마무리된다. 맹인의 목에 'blind'라 적힌 팻말이 걸려 있는 것과 같이 테러의 한복판에 서 있는 남자는 'After Death What?'이라 적힌 글귀를 목에 걸고 있다. 죽음 뒤에는 무엇이?


사진 뒤에는 무엇이? 사진이 찍힌 뒤 사진 속 피사체들은 어떻게 될까? 알 수 없다. 작가가 집중하는 것은 사진 속의 그 순간들이다. 맹인, 손, 모자, 벤치, 계단, 폐허, 살아있는 몸, 죽음, 도시, 거리, 목록은 무한하고 사진가들은 자기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피사체를 찾아 굶주린 짐승처럼 세계를 어슬렁거린다. 발톱 대신 카메라를 내민 채로. 때로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찍으려 시도하고, 가끔 이에 성공한다. 생각, 시간, 운명 같은 추상적인 것들. 제프 다이어의 섬세한 해석 속에서 사진들은 숨기고 있던 '순간'들을 내보인다. 순간은 쉼없이 흘러내리고 우리는 현재라는 시간을 가질 수 없지만 사진이라면 가능하다. 이 사진속의 유일한 순간과 저 사진 속의 또 다른 순간. 사진을 통해 순간은 영원이 된다.

백 년도 넘는 시간 전, 이 순간이 현재이던 때가 있었다! 망토를 두른 그 남자도 '현재'가 '과거'가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남자는 길을 건너와 카메라를 갖고 있는 사람을 지나치면서 분명히 어떤 사진이 찍혔는지 보려고 뒤를 돌아, 그 순간을 사진으로 만들어 준 바로 그것-그 남자 자신-이 더 이상 없음을 보았을 것이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그는 왔다가 사라졌고, 그의 발자국만 남았다. 그에게 주어진 운명은-또는 사진이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은-뒤를 돌아보는 시점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고, 여전히 거기 있는 대기 중인 말과 건물들만큼 끈기 있게, 일시적이면서도 영원해지는 것이다. - 제프 다이어, 같은 책, 247쪽

*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도서협찬
#도서제공
#제프다이어
#예술
#비평
#재즈
#사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미의 이름은 장미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17쪽, 나는 왜 떠나온 것일까. 누군가를 더이상 미워하고 싶지 않을 때 혼자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규칙적이고 또 가시적으로 발전이 드러나는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 대체 왜 그런 진지한 생각을 했을까. 그런 점 역시 내가 아는 범주 안에서 틀을 만들고 그 틀에 맞도록 의미를 재단하는 독선적인 진지함의 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나를 증오에 빠지고 용서를 외면하고 또 결별에 이르도록 만든 순정의 무거움, 그리고 서로 다름에서 생겨나는 일상의 수많은 상처와 좌절들, 낙관적이지 못한 복잡한 생각과 그것을 납득시키기 위한 기나긴 말다툼을 통과하고도 나는 여전히 그 틀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내가 과연 떠나오기는 한 것일까.

은희경, 장미의 이름은 장미

은희경이고, 뉴욕을 배경으로 한 연작소설이고, 그래서 여행을 떠나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고, 쓰러졌다. 비행기로 14시간을 가야 하고 적금을 깨야 하는 멀고 비싼 그 도시에 그와 그녀들이 찾고자 했던 것들은 없다. 결국 주인공들이 도달하는 지점은 ‘나’뿐이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이듯 나는 아무리 멀리 떠나도 나일 뿐이다.

몇년 전 구글 세계지도를 켜서 떠나고 싶은 도시를 찍어가던 과거의 내가 도달한 지점도 같다. 자아를 찾아 내 일상의 틀을 깨고 말겠다는 선언 역시 또 하나의 고정된 틀이었을 뿐이다. 뉴욕에서 내 얼굴이 들어간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린다 해도, 내가 도달한 도시가 나를 증명하지 않는다. 내가 증명해야 할 것은 나 자신의 특별함이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 은희경의 이름은 은희경, 나의 가장 오래된 덕질의 주인공.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지막 연인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2
찬 쉐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년을 기점으로 그는 머릿속에 웅대한 계획을 구상했다. 그것은 평생 읽은 소설의 이야기들을 다시 한번 더 읽고 난 뒤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신이 책을 들기만 하면 한 이야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 끊기지 않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존 자신도 휩쓸려 들어가서 외부의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찬쉐, [마지막 연인], 9쪽

찬쉐의 [마지막 연인] 첫 장을 읽은 뒤, 당연하다는 듯 위스키를 가득 채운 잔을 옆에 두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술을 마셨다. 알코올의 힘이라면 주인공 존과 같이 책을 펼쳐 다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보통의 나는 존의 아내 마리아처럼 '심연으로 떨어지는' 벽걸이 카펫을 지어낼 수 없고, 존이 다니는 회사 사장의 아내 리사와 같이 '장정'을 떠날 수 없다. 내 눈은 등장인물들이 종종 마주치는 검은 옷을 입은 여자를 보지 못하고, 검은 그림자와 마주칠 일이 없고, 술집 안의 블랙홀을 찾아낼 수 없다...

...이게 다 무슨 소리냐고 물을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뭔데? 줄거리가 어떻게 되는데? 존이라는 남자가 의류 회사에 다니는데 그의 취미는 독서인데 책을 읽으면 그 책 속에 등장한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실제 세계에서도 보이는데 존의 아내 마리아는 온 집에 전기가 통하게 만드는데 자기 아버지의 초상화와 대화를 하고 존이 읽은 책 내용을 담은 카페트를 만드는데 존의 상사인 사장 빈센트는 꿈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여자를 만나는데 그의 아내 리사는 남편을 찾아 꿈으로 떠났다가 '장정'을 떠나 황하 강을 건너는데 존의 고객이자 고무나무 농장주인 레이건은 농장 직원인 에다와 사랑에 빠지는데 또 에다는...이걸 줄거리라 부를 수 있을까.

몇 문장으로 요약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사실상 요약이 불가능한 소설이다. 찬쉐의 대표작인 [마지막 연인]은 실험적이다, 소설의 전통을 해체한다, 따위의 말로 이 소설을 설명할 수 없다. 이 소설은 깨어있는 채로 꾸는 꿈이다. 글로 마시는 술이다. 술에 취하면 세계의 경계가 연약해지고 불가능하다 여긴 일들이 가능해지듯 소설 속 주인공들도 아무렇지 않게 상식의 경계를 부순다. 독한 소설 한 권은 목을 태우고 위장을 덥히며 머리를 깨운다. 어느새 나는 이 소설을 정신없이 들이켜고 있었다.

"대니얼, 평생 혼신의 힘을 쏟아 자신을 이야기의 숲으로 만들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우리에게 속할까?"

"그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지만 날마다 우리와 함께 있어요."

"고마워, 아들."

"하지만 엄마, 엄마 자신도 저와 아버지에게 속하지 않아요. 전 엄마가 숲을 걷는 것을 보았어요. 엄마의 모습은 너무나 가늘고 비현실적이었고, 엄마의 온몸에는 전기가 흐르고 있었죠."

책의 숲에는 희미한 빛이 있었지만 마리아가 고개를 들어 보았을 때는 하늘을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하늘은 있을까? 여기에 풀도, 돌도, 오솔길도 있고 샘물 흐르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공기 중에는 해묵은 책의 아름다운 내음이 가득했다. 이것은 존의 이야기고 그 이야기는 영원히 그녀에게 속했다.

찬쉐, [마지막 연인], 503쪽

한국에 처음 번역되는 찬쉐의 소설은 쉽게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까다롭다. 읽기 어려워 쉬이 내게 속하지 않으나, 매일 나와 함께 있다. 어느새 나는 아침을 먹다 마리아가 여행을 떠났던 북도라는 이름의 황금거북을 키우는 마을에서 대나무숲을 헤매고 있었다. 레이건의 고무나무 농장의 뱀을 피해 달리고 있었다. 독한 위스키의 뒷맛처럼 줄거리도 교과서적인 주제도 흐릿한 이 소설이 내 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떠나질 않았다. 이것은 찬쉐의 이야기고 그 이야기는 영원히 내게 속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트]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시집 +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 - 전2권
강지희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두 권의 점심이 도착한 날, 진짜 점심 그러니까 먹는 점심 메뉴는 계란프라이를 올린 짜장라면이다. 풀무원에서 새로 나왔다는 파기름 짜장라면에 도전해보았다. 풍미가 깊은 짜장의 맛을 음미하며 책은 잠시 멀리 두었다. 자칫 흰 책장에 검은 짜장소스가 튀면 큰일나니까. 슬쩍 무작위로 한 페이지씩 열어 본다. 마음의 점-백은선의 시, 한자로 풀면 점심, 좋아. 산문집도 펼쳐 본다. '뒷산에서 잔디를 뜯어 된장찌개를 넣어 끓여 먹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잔디 된장찌개-심너울, 아주 좋아. 당분간의 점심에 이 두 권과 동행하기로 결정했다.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시집


제목부터 흡족하다. 나는 직장인이 아니고 점심시간을 같이 보내는 동거인과 나의 나이 차이가 30년도 더 나기에 같은 메뉴를 고를 수 없다. 두 돌 아기의 점심을 먼저 챙겨준 뒤, 서른여섯돌 어른의 점심을 먹는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면 밖으로 나간다.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식당을 찾아서.


길을 가다 흘러나오는 노래 같아요. 제가 선택하지 않았고 오래 감상할 수도 없지만, 예상치 못한 설렘과 소소한 기쁨을 주는.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산문] 점심의 의미에 대한 강지희 작가의 답-298쪽


점심은 마음을 점검한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때론 어쩌면 자주 그렇습니다.

[혼자 점심 먹는 사람을 위한 시집] 점심의 의미에 대한 김현 시인의 답-151쪽

나는 점심 메뉴 고르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다. 한창 다이어트 한답시고 난리치면서 온갖 다이어트 이론을 끌어모을 때, 이론적으로 하루 한 끼 일반식을 먹을 수 있는 때가 점심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겼다. 그 결과 하루 세 끼 일반식을 먹고 그 중 점심엔 가장 먹고 싶은 것을 먹는 훌륭한 통통인으로 거듭났다. 칼국수나 라면, 비빔국수 등 면 요리는 반드시 점심에 배치한다. 명동교자의 마늘이 김치로 변신한 수준의 김치를 오물거리며 성다영 시인의 <점심 산책>을 음미한다. 상하목장 아이스크림이 가득 올려진 라떼를 퍼마시며 한정현 작가님이 '점심 산책자'(269쪽)로 거듭나는 과정을 따라간다. 나 역시 점심이 좋고 산책도 좋고, 점심 산책이면 완전 좋고! 그리하여 책을 가방에 넣고 집까지 걸어간다. 1키로 이상 골목 산책을 하다 보면 부른 배도 충분히 가라앉을 테니까.


점심을 주제로 한 글이 있는가 하면 점심에 쓰인 시가 있기도 하고 점심과 전혀 관계 없어 보이는 글 같아 자세히 읽어보면 점심의 흔적이 느껴지는 글도 있다. 점심 하면 떠오르는 풍경, 점심에 급히 쓰인 글, 점심을 핑계로 하고 싶은 말들,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후식을 먹듯 하나씩 읽을 수 있는 산문과 시. 눈 앞에 신선한 메뉴판 하나가 둥실둥실 떠오른다.


main menu

너의 잠은 샌드위치처럼 쉽게 흩어진다-9.0

너의 신년 계획은 김밥처럼 위태롭고 무모하다-4.5

너의 허기는 들깨미역국처럼 불어난다-8.5

너의 앞날은 두유크림파스타처럼 뿌옇고 고소하다-13.0

너의 오후는 아보카도롤처럼 속이 편하다-9.0

오늘 기분은 김치찌개처럼 중간이 없다-7.5

오늘의 할 일 목록은 설렁탕에 먹는 깍두기처럼 제멋대로다-10.0

Dessert

티라미슈처럼 씁쓸하고 달달한 거울 보기-6.5

에그타르트처럼 푹 빠지기 쉬운 타임슬립-3.5


*금일 준비된 재료 소진 시 영업을 종료합니다


<알찬 하루를 보내려는 사람을 위한 비유의 메뉴판> 안미옥


꼭 한 번 해 보고 싶은 대사가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늘 먹던 걸로.'

알찬 점심 한 권, 오늘은 두 권으로 부탁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렇지 않다
최다혜 지음 / 씨네21북스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다 읽은 뒤 제목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무렇지 않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그럴 수 있어?


내가 그린 그림을 내 이름으로 낼 수 없는 일러스트레이터 지현,

다음 학기 강의도 보장받지 못하는 대학 시간강사 은영,

점심값을 아껴 물감을 사야 하는 무명의 화가 지은.


나의 결과물은 정당히 인정받지 못하고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아 왔는데 편의점에서 도시락 대신 컵라면을 골라야 하는 얇은 지갑 앞에서 그녀들의 표정은 얼핏 덤덤해 보인다. 아크릴 물감으로 덧칠된 얼굴 아래 숨겨진 감정은 어두운 방 안이나 바퀴벌레가 나오는 꿈, 낮은 채도의 배경으로 암시된다.


이 불행은 나 때문일까?

나의 무능과, 나의 재능 없음과, 나의 돈 없음 탓이었을까?


불행이 닥치면 우리는 탓할 대상을 찾아 거기에 부정적인 감정들을 쏟아붓는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나-너-탓이야. 다 내 잘못이야! 혹은 내 잘못 아니야! 격정의 감정이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린다.


그러나 그녀들은 담담하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저작권 양도를 강요하는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고,

다음 강의를 맡지 못했다는 소식에 밥 챙겨 먹고 다른 일을 찾아 면접을 보러 가고,

그림을 잠시 넣어두고 재취직을 한 회사 창 밖으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화가의 눈으로 담아 둔다. 다음 작품 활동을 예비하며.


화내지 않는다. 욕하지 않는다. 끼니를 챙기고 지금 해야 할 일을 한다. 살아 있어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그녀들은 아무렇지 않다.


받아들이지 마라. 스스로 무례해지지 마라.

최다혜 [아무렇지 않다], 작가의 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