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은 장미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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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쪽, 나는 왜 떠나온 것일까. 누군가를 더이상 미워하고 싶지 않을 때 혼자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규칙적이고 또 가시적으로 발전이 드러나는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한다는 생각. 대체 왜 그런 진지한 생각을 했을까. 그런 점 역시 내가 아는 범주 안에서 틀을 만들고 그 틀에 맞도록 의미를 재단하는 독선적인 진지함의 한 방식이 아니었을까. 나를 증오에 빠지고 용서를 외면하고 또 결별에 이르도록 만든 순정의 무거움, 그리고 서로 다름에서 생겨나는 일상의 수많은 상처와 좌절들, 낙관적이지 못한 복잡한 생각과 그것을 납득시키기 위한 기나긴 말다툼을 통과하고도 나는 여전히 그 틀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 내가 과연 떠나오기는 한 것일까.

은희경, 장미의 이름은 장미

은희경이고, 뉴욕을 배경으로 한 연작소설이고, 그래서 여행을 떠나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고, 쓰러졌다. 비행기로 14시간을 가야 하고 적금을 깨야 하는 멀고 비싼 그 도시에 그와 그녀들이 찾고자 했던 것들은 없다. 결국 주인공들이 도달하는 지점은 ‘나’뿐이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이듯 나는 아무리 멀리 떠나도 나일 뿐이다.

몇년 전 구글 세계지도를 켜서 떠나고 싶은 도시를 찍어가던 과거의 내가 도달한 지점도 같다. 자아를 찾아 내 일상의 틀을 깨고 말겠다는 선언 역시 또 하나의 고정된 틀이었을 뿐이다. 뉴욕에서 내 얼굴이 들어간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린다 해도, 내가 도달한 도시가 나를 증명하지 않는다. 내가 증명해야 할 것은 나 자신의 특별함이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 은희경의 이름은 은희경, 나의 가장 오래된 덕질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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