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이고, 뉴욕을 배경으로 한 연작소설이고, 그래서 여행을 떠나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고, 쓰러졌다. 비행기로 14시간을 가야 하고 적금을 깨야 하는 멀고 비싼 그 도시에 그와 그녀들이 찾고자 했던 것들은 없다. 결국 주인공들이 도달하는 지점은 ‘나’뿐이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이듯 나는 아무리 멀리 떠나도 나일 뿐이다.
몇년 전 구글 세계지도를 켜서 떠나고 싶은 도시를 찍어가던 과거의 내가 도달한 지점도 같다. 자아를 찾아 내 일상의 틀을 깨고 말겠다는 선언 역시 또 하나의 고정된 틀이었을 뿐이다. 뉴욕에서 내 얼굴이 들어간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린다 해도, 내가 도달한 도시가 나를 증명하지 않는다. 내가 증명해야 할 것은 나 자신의 특별함이다. 장미의 이름은 장미, 은희경의 이름은 은희경, 나의 가장 오래된 덕질의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