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연인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2
찬 쉐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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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을 기점으로 그는 머릿속에 웅대한 계획을 구상했다. 그것은 평생 읽은 소설의 이야기들을 다시 한번 더 읽고 난 뒤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신이 책을 들기만 하면 한 이야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로 끊기지 않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존 자신도 휩쓸려 들어가서 외부의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찬쉐, [마지막 연인], 9쪽

찬쉐의 [마지막 연인] 첫 장을 읽은 뒤, 당연하다는 듯 위스키를 가득 채운 잔을 옆에 두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술을 마셨다. 알코올의 힘이라면 주인공 존과 같이 책을 펼쳐 다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보통의 나는 존의 아내 마리아처럼 '심연으로 떨어지는' 벽걸이 카펫을 지어낼 수 없고, 존이 다니는 회사 사장의 아내 리사와 같이 '장정'을 떠날 수 없다. 내 눈은 등장인물들이 종종 마주치는 검은 옷을 입은 여자를 보지 못하고, 검은 그림자와 마주칠 일이 없고, 술집 안의 블랙홀을 찾아낼 수 없다...

...이게 다 무슨 소리냐고 물을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뭔데? 줄거리가 어떻게 되는데? 존이라는 남자가 의류 회사에 다니는데 그의 취미는 독서인데 책을 읽으면 그 책 속에 등장한 기모노를 입은 여자가 실제 세계에서도 보이는데 존의 아내 마리아는 온 집에 전기가 통하게 만드는데 자기 아버지의 초상화와 대화를 하고 존이 읽은 책 내용을 담은 카페트를 만드는데 존의 상사인 사장 빈센트는 꿈 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여자를 만나는데 그의 아내 리사는 남편을 찾아 꿈으로 떠났다가 '장정'을 떠나 황하 강을 건너는데 존의 고객이자 고무나무 농장주인 레이건은 농장 직원인 에다와 사랑에 빠지는데 또 에다는...이걸 줄거리라 부를 수 있을까.

몇 문장으로 요약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사실상 요약이 불가능한 소설이다. 찬쉐의 대표작인 [마지막 연인]은 실험적이다, 소설의 전통을 해체한다, 따위의 말로 이 소설을 설명할 수 없다. 이 소설은 깨어있는 채로 꾸는 꿈이다. 글로 마시는 술이다. 술에 취하면 세계의 경계가 연약해지고 불가능하다 여긴 일들이 가능해지듯 소설 속 주인공들도 아무렇지 않게 상식의 경계를 부순다. 독한 소설 한 권은 목을 태우고 위장을 덥히며 머리를 깨운다. 어느새 나는 이 소설을 정신없이 들이켜고 있었다.

"대니얼, 평생 혼신의 힘을 쏟아 자신을 이야기의 숲으로 만들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우리에게 속할까?"

"그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지만 날마다 우리와 함께 있어요."

"고마워, 아들."

"하지만 엄마, 엄마 자신도 저와 아버지에게 속하지 않아요. 전 엄마가 숲을 걷는 것을 보았어요. 엄마의 모습은 너무나 가늘고 비현실적이었고, 엄마의 온몸에는 전기가 흐르고 있었죠."

책의 숲에는 희미한 빛이 있었지만 마리아가 고개를 들어 보았을 때는 하늘을 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하늘은 있을까? 여기에 풀도, 돌도, 오솔길도 있고 샘물 흐르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공기 중에는 해묵은 책의 아름다운 내음이 가득했다. 이것은 존의 이야기고 그 이야기는 영원히 그녀에게 속했다.

찬쉐, [마지막 연인], 503쪽

한국에 처음 번역되는 찬쉐의 소설은 쉽게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까다롭다. 읽기 어려워 쉬이 내게 속하지 않으나, 매일 나와 함께 있다. 어느새 나는 아침을 먹다 마리아가 여행을 떠났던 북도라는 이름의 황금거북을 키우는 마을에서 대나무숲을 헤매고 있었다. 레이건의 고무나무 농장의 뱀을 피해 달리고 있었다. 독한 위스키의 뒷맛처럼 줄거리도 교과서적인 주제도 흐릿한 이 소설이 내 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떠나질 않았다. 이것은 찬쉐의 이야기고 그 이야기는 영원히 내게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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