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다 읽은 뒤 제목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무렇지 않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그럴 수 있어?
내가 그린 그림을 내 이름으로 낼 수 없는 일러스트레이터 지현,
다음 학기 강의도 보장받지 못하는 대학 시간강사 은영,
점심값을 아껴 물감을 사야 하는 무명의 화가 지은.
나의 결과물은 정당히 인정받지 못하고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아 왔는데 편의점에서 도시락 대신 컵라면을 골라야 하는 얇은 지갑 앞에서 그녀들의 표정은 얼핏 덤덤해 보인다. 아크릴 물감으로 덧칠된 얼굴 아래 숨겨진 감정은 어두운 방 안이나 바퀴벌레가 나오는 꿈, 낮은 채도의 배경으로 암시된다.
이 불행은 나 때문일까?
나의 무능과, 나의 재능 없음과, 나의 돈 없음 탓이었을까?
불행이 닥치면 우리는 탓할 대상을 찾아 거기에 부정적인 감정들을 쏟아붓는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나-너-탓이야. 다 내 잘못이야! 혹은 내 잘못 아니야! 격정의 감정이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린다.
그러나 그녀들은 담담하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저작권 양도를 강요하는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고,
다음 강의를 맡지 못했다는 소식에 밥 챙겨 먹고 다른 일을 찾아 면접을 보러 가고,
그림을 잠시 넣어두고 재취직을 한 회사 창 밖으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화가의 눈으로 담아 둔다. 다음 작품 활동을 예비하며.
화내지 않는다. 욕하지 않는다. 끼니를 챙기고 지금 해야 할 일을 한다. 살아 있어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그녀들은 아무렇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