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트랑으로 떠난 가족 여행에서 책을 많이 챙기지 않았다. 얇고 가벼운 전자책 리더가 하나를 챙겼다. 밀리의 서재 앱에 을유문화사에서 최근 재출간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리플리 5부작'이 있어 미리 다운받아 두었다. 리플리 증후군으로 익숙한 리플리라는 캐릭터가 궁금했다. 시리즈 첫 권인 [재능 있는 리플리]를 읽기 시작했다.
호텔 침대에서, 수영장 썬배드에서, 책을 쉽게 내려놓기 어려웠다. 사기꾼이자 두 명이나 죽인 살인자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는지 되물으며 끝까지 읽었다. 어느새 톰 리플리를 응원하는 나 자신이 웃겼다. 그만큼 리플리라는 전무후무한 캐릭터를 창조한 하이스미스의 필력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지만.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거짓된 말과 행동을 상습적으로 하는 리플리 증후군이 이 소설에서 유래했지만, 사실 과학적으로 인정받는 증상은 아니라 한다. 심지어 원작의 리플리는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는 몽상가가 아니다. 그는 분명히 자기 자신을 확실하게 인지한다.
리플리는 리플리 증후군에 속하지 않는다. 물론 그는 뛰어난 연기자이자 타인의 필체나 목소리 흉내에 능하여 이를 통해 여러 사기 행각을 벌인다. 가장 큰 사건은 부유한 집안 아들인 디키를 살해한 뒤 디키 흉내를 내며 그의 돈을 갈취한 행위다. 디키를 연기하며 디키의 서명을 위조해 수표를 현금으로 받아 펑펑 쓰며 유럽 여행을 즐기는 리플리는 자신이 톰 리플리임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