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 있는 리플리 리플리 5부작 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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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트랑으로 떠난 가족 여행에서 책을 많이 챙기지 않았다. 얇고 가벼운 전자책 리더가 하나를 챙겼다. 밀리의 서재 앱에 을유문화사에서 최근 재출간한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리플리 5부작'이 있어 미리 다운받아 두었다. 리플리 증후군으로 익숙한 리플리라는 캐릭터가 궁금했다. 시리즈 첫 권인 [재능 있는 리플리]를 읽기 시작했다.


호텔 침대에서, 수영장 썬배드에서, 책을 쉽게 내려놓기 어려웠다. 사기꾼이자 두 명이나 죽인 살인자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는지 되물으며 끝까지 읽었다. 어느새 톰 리플리를 응원하는 나 자신이 웃겼다. 그만큼 리플리라는 전무후무한 캐릭터를 창조한 하이스미스의 필력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지만.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고 거짓된 말과 행동을 상습적으로 하는 리플리 증후군이 이 소설에서 유래했지만, 사실 과학적으로 인정받는 증상은 아니라 한다. 심지어 원작의 리플리는 허구의 세계를 진실이라 믿는 몽상가가 아니다. 그는 분명히 자기 자신을 확실하게 인지한다.


리플리는 리플리 증후군에 속하지 않는다. 물론 그는 뛰어난 연기자이자 타인의 필체나 목소리 흉내에 능하여 이를 통해 여러 사기 행각을 벌인다. 가장 큰 사건은 부유한 집안 아들인 디키를 살해한 뒤 디키 흉내를 내며 그의 돈을 갈취한 행위다. 디키를 연기하며 디키의 서명을 위조해 수표를 현금으로 받아 펑펑 쓰며 유럽 여행을 즐기는 리플리는 자신이 톰 리플리임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


그는 물건을 소유하는 게 좋았다. 잔뜩 소유해서 좋은 게 아니라, 엄선해서 고른 몇 가지를 쭉 쓴다는 게 좋았다. 그런 물건들이 그의 자존심을 채워 주었다. 과시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엄선된 물건의 품질이, 그리고 그 품질을 고이 간직하려는 애정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덕분에 톰은 자기 존재를 즐기게 되었다. 이렇게 간단할 수가. 그렇다면 자기 존재를 즐긴다는 게 뭔가 가치 있는 일 아닐까? 톰이라는 존재는 존재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기 존재를 즐길 줄 아는 이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았다. 돈만 많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라, 확실한 담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자기 존재를 즐기는 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재능 있는 리플리



톰 리플리가 그저 그런 사기꾼이자 파렴치한 살인자를 넘어 그 이상의 매력을 느끼게 하는 캐릭터인 이유가 '존재를 즐길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미국 하류 인생을 전전하던 이가 우연과 살인과 사건을 겪고 돈을 얻게 되자 세련된 미적 감각을 돋보이며 지금 봐도 더 없이 알찬 유럽 여행을 누린다. 리플리는 리플리 본인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 말대로 그건 돈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나는 리플리의 범죄 행각을 절대 옹호하지 않는다. 그가 법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처벌을 받았으면 좋겠다. 한편으론 소설을 읽으면서 그가 어떻게 위기를 벗어나는지 궁금하고 따라가게 된다. 그를 옹호하거나 응원하지는 않겠다. 리플리라는 캐릭터를 '즐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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