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 서울대학교 최고의 ‘죽음’ 강의 ㅣ 서가명강 시리즈 1
유성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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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만 보면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미처 밝히지 못한 살인사건의 뒷이야기를 다루고 있을 것 같지만, 아니었다. 제목은 섹시했지만, 내용은 오히려 차분하다.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 입문서에 가깝다.

 

   법의학, 죽음의 정의, 자살, 안락사, 영생의 가능성, 죽음의 준비를 200여 쪽 되는 책에 얼마나 충실히 담을 수 있을까? 이 책에서는 이 모든 주제를 조금씩 다 다루고 있지만 말 그대로 ‘조금씩’이기 때문에 감질이 난달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단언컨대, 서울대학교라는 이름에 걸맞는 최고의 강의였다’는 표지의 평가는 이 책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실제 강의에 대한 평가일 것 같다. 1학기 강의의 커리큘럼으로는 충분할 텐데, 범위가 너무 넓어서 강의의 깊이까지 담기에는 집중도가 떨어졌다.

 

  그래도 충분히 유익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라는 경구처럼 우리의 삶과 전혀 동떨어진 것 같아도, 오늘 아니면 내일이라도 갑자기 대면할 수 있는 것이 죽음이다. 이 책을 읽어서일까, 얼마 전 출근길에 갑자기 ‘유언장을 미리 써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청승맞다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을 텐데,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유언장을 작성하는 것이 ‘삶의 끝’에 어울리는 일 같지만, 오히려 삶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새해에 해야 하는 일 중에 하나가 아닐까 하고.

 

국내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28만 여명이 사망하는데, 실제로 타살은 500여 명 정도, 즉 10만 명당 1명이 안 된다. 2017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0만 명당 0.8명이며, 흔히 10만 명당 2명 정도로 나오는 통계는 살인미수까지 포함된 경우다. 반면에 자살은 10만 명당 24명이 넘는다. 타살의 30배에 달하는 수치다. - P26

그렇게 문국진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아무도 하지 않는 외로운 법의학의 길을 가게 된다. 그러던 중 너무 힘들어 다시 장기려 박사를 찾아가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더 이상은 법의학을 못하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외과에 받아 주십시오"라고 하자, 장기려 박사는 문국진 교수를 뚫어져라 보더니 도리어 "못된 놈. 의학이란 건 쉬운 데가 없어. 네가 생각했던 대로 안 된다고 다른 걸 하면 또 똑같을 게다. 3년 넘게 쏟아부은 네 노력을, 네 정열을 버리지 마라. 돌아가서 한 우물을 파라"라고 질책했다고 한다. 이에 다시 문국진 교수는 스스로 배움의 길을 찾아 미국으로 가 법의학을 공부함으로써 우리나라 1세대 법의학자로 등극하게 된다. - P39

이는 우리나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건강의학과 안용민 교수가 실제 자살 시도자를 진료하면서 들었다는 이야기와 이를 연구한 내용들과 놀랍게도 일치한다. 그들은 모두 말한다. 죽음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해왔고, 자기가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해서 실제로 실행했는데, 막상 죽으려는 순간에는 살고 싶었다고 말이다. 그 순간에는 모두 다 자기 판단을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 P175

2010년 기준으로 자살자 중 80대는 인구 10만 명당 123.3명, 70대는 83.5명, 60대는 52.7명이다. 우리는 보통 자살 하면 치열한 입시를 견디지 못한 청소년 자살을 많이 생각하는데, 사실상 청소년 자살률은 입시 제도가 잘 갖춰진 핀란드보다 적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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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을 결산하기에는 많이 늦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2~3일 상간이야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아 페이퍼를 남깁니다. 2019년은 동해안에서 해돋이를 보며 희망차게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몸도 여기저기 안 좋았고, 가족들도 너도, 나도 아프다했고, 회사생활도 편치 못했습니다. 몸이 바쁘고, 일이 많은 것은 어떻게 참겠는데, 경쟁심과 자아도취가 지나친 사람들과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것은 정말 힘들더군요. 직장을 바꾸지는 못했고, 2020년은 해돋이를 보지 않았습니다. 올 해는 좀 다른 한 해가 되길 바라면서요. ㅎㅎ

 


  보통 1년에 책 100권 읽기를 목표로 많이 삼더군요. 하지만 저는 언제부턴가 연간 50권으로 슬그머니 수치를 내렸는데, 독서기록을 뒤져보니 작년에는 총 47권을 읽었네요. 목표에는 조금 모자라지만, 이만하면 잘했다 싶습니다..

 


  제가 올해에 읽었던 책 중 BEST 3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안나카레니나1














왜 고전이라고 불리는지 알겠더라고요. 1권은 정말 순식간에 읽었고, 현재는 2권을 읽는 중입니다. 인물 한 명 한 명에 몰입하게 만들고, 이야기는 마치 어제 벌어진 일처럼 생생합니다.


 

2. 진이, 지니


정유정은 대단한 작가입니다. 박진감과 스릴이 넘치게 이야기를 끌어가면서, 독자를 미소짓게도 울컥이게도 합니다. 책을 덮고 난 이후에도 가슴이 뭉클했어요.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3. 팩트풀니스













‘단지 세상은 생각보다 살기 좋아요’라는 ‘반일종족주의’류의 팩트나 통계에 대한 책이라고 단정 짓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 책은 그것보다 훨씬 큰 책입니다. 사회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관점, 학문을 대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해줍니다. 많은 영감을 주는 책이고,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읽은 가장 중요한 책, 세계를 명확히 이해하기 위한 유용한 안내서’라는 빌 게이츠의 평가는 정확하다고 봅니다.


 

그 외에도 『일의 기쁨과 슬픔』, 『90년생이 온다』, 『여행의 이유』 3권도 좋았어요. 이 책들은 2019년을 상징하는 책들이죠.
















  지난 해에 읽은 책을 보니 가벼운 책들이 많고, 최근 출간된 책들의 비중이 많네요. 2020년에는 고전과 쉽게 읽을 수 없는(많이 고민하게 만드는) 책들의 비중을 좀 높이려고 합니다.

 


  얼마 전 한지혜의 『참 괜찮은 눈이 온다』를 보니, 이런 문장이 있더군요.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 되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모든 자리는 무모하게라도 시도했을 때 한 걸음이나마 앞으로 나아갔다. 염려하고 망설이고 현실과 타협하면서 이루고 성취한 일은 없었다.- P71

 


  그래서 올해의 목표는 100권 읽기로 잡으려고요. 그리고 북플 친구분들의 글에서 영감을 받고, 생각의 반경도 넓히기, 읽은 책들은 단 몇 줄이라도 메모를 남기고 정리하기가 올해 저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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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별 2020-01-03 1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응원합니다 ~~^^

송도둘리 2020-01-03 18:4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초록별님도 새해에 목표하신 바 이루시길 바랍니다!! ^^

scott 2020-01-03 1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루고 성취한것이 없다는 인용문이 제이야기인것 같아요.2020년에는 아프지 마시고 가족모두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송도둘리님의 100권목표 응원합니다.!

송도둘리 2020-01-03 20:0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정말 건강이 제일인 것 같아요...scott님도 건강하고 알찬 한 해 보내시길 비랍니다!!

서니데이 2020-01-04 08: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송도둘리님 새해 인사 드립니다.
올해는 건강하고 하시는 일도 잘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올해는 더 좋은 해가 되실 거예요.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첫 주말 잘 보내세요.^^

송도둘리 2020-01-04 09:02   좋아요 1 | URL
벌써 주말이네요. 휴일 아침이 참 좋습니다. 서니데이님도 행복하고 건강한 한 해 보내시길 바래요. 감사합니다! ^^

읽다가 2020-01-06 2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이, 지니를 읽다가 취향에 안맞나 싶어 초반에 포기했는데 다시 읽어봐야겠군요!

송도둘리 2020-01-07 06:54   좋아요 1 | URL
저도 처음에는 이게 뭐지? 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에는 눈물, 콧물 다 쏟았습니다.ㅎㅎ추천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ㅣ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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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첫 책이다. 글이 참 예쁘다. 담긴 생각도 곱다. 지은이는 ‘성찰적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 자신의 경험, 가족, 유년의 추억에서 쓸만하고 아름다운 실을 뽑아낸다. 하루하루 일기를 적는 일조차 버겁고, 일상에서 무엇을 하나 깨닫는 일이 어려운 나에게는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지은이의 삶의 농도는 나보다 훨씬 짙은 것 같다. 늘상 하는 다짐이지만, 새해에는 좀 더 두터운 삶을 살고 싶다.

사람은 저마다 개별적인 존재이다. 모든 환경과 경험도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 비슷한 경험은 있지만 똑같은 경험은 없다. 그러므로 나도 너와 똑같이 경험해봤다는 말이나 한 발 더 나아가 해봐서 안다는 말은 매우 신중히 해야 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 많은 인생을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시련에 혹독하거나 냉정하기 쉽다. 경험이 누군가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고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해 준다면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이지 타인의 삶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누군가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첫마디는 ‘나는 너를 모른다’여야 할 것이다. - P46

사람도 그렇고 사물도 그렇고 작품도 그렇고 좋고 빼어난 것은 흔하지 않다. 신인의 것이든 기성의 것이든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원고지 백 장, 천 장을 채운다는 건 도깨비 방망이로 금 만들 듯 맘만 먹으면 뚝딱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천 장을 쓰고 버려야 백 장의 소설이 나오고, 만 장을 쓰고 버려야 헌 장의 소설이 나오는 건,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은 누구나 아는 법칙이다. 그 시간과 노력에 헌신한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고 싶었다. 그 예의는 단 하나, 그들의 수고가 담긴 작품을 끝까지 읽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P48

그러다 서른 살이 되었다. 최승자 시인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 했는데, 나는 조금 반대였다. 서른 살이 되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일만 생겼다. - P63

되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모든 자리는 무모하게라도 시도했을 때 한 걸음이나마 앞으로 나아갔다. 염려하고 망설이고 현실과 타협하면서 이루고 성취한 일은 없었다. - P71

어쩌면 행복이란 즐겁고 만족 가득한 상태, 그 자체를 말하는 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정지되고 멈춰있는 어떤 순간이 아니라 생의 움직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낙천적이고, 그리하여 생의 곳곳에서 행복을 찾는 이들과 틈만 나면 삶의 비의를 찾는 이들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움직임에 있는 것 같다. - P90

아니다 싶을 때 과감히 돌아서는 용기도 중요하지만, 아니다 자신 없을 때는 한 발 더 내디뎌보는 용기도 필요할 것이다. 삶의 소망은 문을 열었다고 해서 이룬 것이 아니라 그 문을 연 이후에 또 한참을 더 가야 하는 법. 어찌 방향을 바꾸는 것만 터닝 포인트일까. 한 단계 깊어지는 것은 변화가 아닌가. 삶이 제자리뛰기라고 투덜거리지 말자. 잘만 뛰면 제자리에서 뛰어도 한 계단 위니까. - P97

그래도 한 가지는 배웠다. 순간의 경험이, 체험이 삶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 지나가는 자는 머무는 자의 고충을, 행복을 절대 알 수 없다는 것. 안다는 말은, 알겠다는 말은 매우 오만하고 경솔한 말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농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아니, 농사 흉내를 그만두기로 했다는 말이 맞겠다. 땅을 대한다는 건, 삶을 이해한다는 건, 폼으로 낭만으로 자랑삼아 될 일이 아니었다. - P148

자식 키우는 일이 농사와 아무리 비슷해도 다른 건 다르다. 밭이야 내가 들인 노고만큼 내 것이지만 아이는 내가 들인 노고가 얼마든 내 것이 아니다. 밭에서는 내가 심은 열매가 나지만, 아이는 저 홀로 심은 꿈으로 열매를 맺는다. 그런 마음으로 보면 안 자란 열매도 없고, 잘못 자란 열매도 없다. 우리가 들여야 할 정성은 밭을 향한 것이지 열매를 향해서는 안 될 일. 그러니 밭만 가꾸어주고 열매는 간섭하지 말자 수시로 다짐하는데, 사춘기 농사가 여름 농사라 그런지 마음속 천불 다스리기가 쉽지는 않다. - P150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말하고 싶어하면서 네가 누구인지도 내가 규정하고 싶어하는 이기심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까. - P153

가족은 지겹고 무겁지만, 그 하중으로 나를 지그시 눌러주는 어떤 안온함도 있는 것이다. 가족이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많은 일들이 가족이기 때문에 견뎌지기도 하는 것이다. 증오와 애정 사이의 연민과 이해의 공동 운명체, 가족이란 건 결국 그런 게 아닐까. - P189

희망이 외려 아픈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 꿈은 꾸는 자의 몫이 아니라 컨트롤하는 자의 몫이라는 생각을 한다. 성장에도 통이 있고, 씨앗도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발아열을 견뎌야 한다. 마라토너들은 달리다보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사점死點과 만나게 된다고 한다. 그 사점을 통과하고 나면 다음은 비교적 쉽게 달리게 된단다. 아프고 괴롭고 불안하고 막막한가.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삶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도망치지 마라. 원래 희망은 아프다. 그래서 꽃이 피는 것이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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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논쟁(?)의 중심에 있던 그 책은 아직 읽지 못했다. 어떤 이야기가 풀어질지 너무 분명해서 불편했고, 내가 거기에 취할 입장이 어떤 것일지 불안하기도 해서였다. 그 책이 영화화됐다고 아내가 보러 가자고 했지만, 호기롭게 그러마고 대답하지 못했던 이유다. 하지만, 막상 보고 나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영화였다. 2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이 짧게 느껴질 만큼 공감했다. 연기자들의 연기도 하나같이 훌륭했다. 어디서 이런 배우들을 데려다 놨는지 놀라웠다. 물론, 이야기가 너무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워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영화 속에서 김지영이 하는 집안일들의 대부분을 내가 하고 있기 때문에 아내에게는 ‘내가 바로 김지영이다’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집안일의 분장이 김지영이 겪고 있는 고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여자는 시집만 잘 가면 된다’ 등등의 말은 자주 들어왔던 말이다. 공공화장실에서의 불안 등 갖가지 형태의 불안도 모두 현실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불안과 차별이 얼마나 많을 것이고, 그런 크고 작은 차별들이 행동과 사고를 얼마나 제약할지 생각하면 정말 슬픈 일이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결혼의 문제, 육아의 문제도 엄연한 현실이다. 육아 때문에 희생되는 여성의 삶, 딸만큼은 자기처럼 살게 하지 않으려고 딸들의 어머니들이 짊어지는 육아의 고통, 개인의 삶에 너그럽지 않은 회사, 육아휴직을 내지도 안 내지도 못하는 남자들의 고민 등. 어디 하나 가짜가 없다. 82년생 김지영의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허상이 아니다. 우리 세대라면 남자든, 여자든 충분히 공감할만한, 그리고 공유하고 있는 세계다.

 

  하지만 이 영화가 논란이 되고, 별점 테러를 당하는 것을 보면, 00년생 김철수가 82년생 김지영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들에게는 분명 이와는 다른 고민과 고통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00년생 김철수의 세상과 82년생 김지영의 세계를 비교하여 누구의 고통이 더 무거운지 비교할 이유는 없다. 왜 우리는 내 고통이 더 크므로 네 고통은 별게 아니라고 꽥꽥 소리를 지를 만큼 각박해졌을까. 82년생 김지영의 세계를 개선해야 00년생의 세계가 행복해진다. 그 세계는 이 세계의 연장이므로. 누가 불행해지는 만큼 내 이웃이, 내 가족이 아픈 것이므로. 00년생 김철수의 고통은 다른 무대에서 심도 있게 다뤄져야 한다. 82년생 김지영의 무대에 난입해서 주장할 이유는 없다.

 

  아직 책은 읽지 못했지만, 영화가 책보다는 부드럽게 다뤄졌다고 한다. 일단 남편의 모습이 ‘공유’로 형상화 되어 현실성을 많이 잃기도 했고. ㅎㅎ 사실 내가 가장 마음이 쓰이는 인물은 지영이 아버지였다. 그라고 딸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차별할 마음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자기가 경험한 지식과 경험 때문에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준다. 우리는 오랜 세월 그렇게 자라왔다. 그 결과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하지만 이제 상처를 준다는 것을 알았으면 바뀌어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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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유감 - 개정증보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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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문유석 판사가 법관 게시판이나 「법원회보」 등에 올렸던 글을 모은 책이다. 그래서인지 『개인주의자 선언』과 같이 정돈된 느낌은 없다. 하지만 글쓴이에 대한 팬이라면 한 번쯤 찾을 법한 책이다.

 

 

  회사의 직원 게시판에 누군가가 글을 줄곧 올리면 ‘이 친구 할 일이 없나?’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성 들여, 또 재미있게, 여러 번 올렸다는 것이 참 대단하다. 게다가 실명으로! 아마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닐까 싶다. 어쩌면 글쓴이의 평상시의 태도나 글에 담긴 위트가 동료들의 질시로부터 지켜준 것도 같다.

 

 

  언제 읽든 글쓴이의 글은 늘 유쾌하고 공감이 간다. 이 책에서도 법원 조직, 더 나아가 공무원 조직의 생리에 대해 분석하고,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려는 글이 참 좋았다. 그리고 판사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화들을 소개한 꼭지도 재미있었다. 9쪽과 25쪽에 밑줄 그은 문장은 당분간 내 삶의 죽비소리가 될 것 같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책으로서의 짜임새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Anyone can be cynical. 냉소적으로 구는 건 누가나 할 수 있어.
Dare to be an optimist. 담대하게 낙관주의자가 되라구. - P9

법복을 벗으면 저는 그냥 삼십대 초반의 젊은이일 뿐이었습니다. 저라는 개인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남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대신해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라는 직책을 맡았기에 그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 P25

야근이 생활화된 파산부에서 일하다보면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도 돌려막기를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돌려서,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할 시간을 돌려서, 아름다운 음악과 책을 즐길 시간을 돌려서, 그저 몰려드는 일을 막아내는 데 쓰며 살고 있는 것 아닐까. 일만 하다보면 어느새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누구를 위해서 하고 있는지를 잊기 쉽습니다. 그게 진짜 중요한 것인데 말입니다. - P50

결국 사람들은 자기 수입의 범위 내에서 근검절약하던 미덕을 촌스러운 시대착오적 행동으로 치부하게 되고, 실현 가능성 없는 미래의 수입을 당겨쓰기 시작합니다. (중략) 유감스럽게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전장은 게임의 규칙을 지배하는 극소수의 승자들이 독식하는 피비린내 나는 곳입니다. 감히 어리바리한 양민들이 들어와 푼돈이라도 건져 살아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 P104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자각하게 하기 위해 평생을 가르쳤는데, 한국의 인터넷상에는 한국 경제의 모순구조, 국제사회의 역학관계, 한국 근현대사의 진실, 국제 과학계의 파워게임과 음모 등을 훤하게 꿰뚫는 현자, 예언자들이 득시글거립니다. - P148

그런데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시스템의 차이, 학문 풍토의 차이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차이는 이곳(미국학교)에서는 ‘정성’, ‘성실’ 같은 평범해 보이는 가치를 우리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당연한 문화. 교수들도, 학사 행정을 담당하는 직원들도, 도서관의 사서들도, 스쿨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들도 다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찾는 것 같습니다. 밥벌이하려고 마지못해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 P172

다른 것이 있다면 각자의 일에 대한 존중인 것 같습니다. 자기 일을 소중히 여기기에 남의 일도 존중합니다. 그 일에 관한 한 그 사람의 권한과 판단을 존중해줍니다. 아무리 바빠도 민원 창구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이 창구에 자기 서류를 들이밀며 빨리 처리해달라고 빽빽 소리 지르는 경우는 상상하기도 힘듭니다. 일 미터 뒤에서 묵묵히 기다리다가 다음 사람 오라는 허락이 떨어져야 앞으로 갑니다. 은행에 가도, 슈퍼 계산대에서도, 지하철 매표소에서도 손님은 왕이 아닙니다. 일하는 사람이 왕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기다리라면 기다려야 하고, 안 된다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런 문화가 어느 일을 하든지 자기 일과 자기 권한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게 하는 것 같습니다. - P173

당장에는 우리나라의 미래가 암울해 보일 때도 있지만 장기적인 눈으로 보면 우리나라같이 모든 분야에서 대단히 발전하고 있는 기적 같은 나라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P186

또 설령 자기 결론이 틀렸다고 비판받더라도 그건 그 결론이 틀렸다는 것이지 나라는 존재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니 자기 방어적으로 대응할 필요도 없습니다. 상대방 이야기를 들어봐서 수긍이 가면 바로 쿨하게 시인하고 결론을 바로 수정하면 되지요. - P219

문제는 재판이라는 사법 서비스의 수요자는 재판 당사자, 즉 국민인데 얼마나 열심히 좋은 재판을 해서 당사자가 만족했는지는 쉽게 비교 가능한 수치로 환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건처리 수 통계, 판결문의 길이와 형식 등 법원 내부에서 평가받기 쉬운 양적인 측면에만 경쟁이 집중되기 쉽다는 것이죠. - P250

그래서 합격-불합격Pass/Fail식의 절대평가 방식 업무평가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국민, 당사자에게 피해를 주는 수준의 허용 불가능한 나태함은 당연히 엄격하게 평가해 페널티를 주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에는 차이를 줄이고 다양한 재능을 인정하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 P286

게다가 인간에겐 인정 욕구라는 엄청나게 강렬한 욕구가 있기 마련이고, 피라미드식 행정조직은 더더욱 그것으로 돌아가기 마련. 어느새 애초에 왜 이 일을 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성찰은 사라지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해내서 ‘아주 칭찬해~’, ‘수고 많았어~’라는 당근을 베어 물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 그러다보면 아주 괜찮은 판사라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 정도까지는 괜찮아’, ‘이게 다 사법부를 위한 일인데 누군가는 궂은일도 해야지’ 등등 다양한 자기합리화 기제가 발동되면서 선을 넘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 P298

사실 저는 다른 월급쟁이들처럼 적당히 나쁜 짓 할 때도 있고, 게으름도 피우고, 불평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지독한 이기주의자에 개인주의자라서 멸사봉공할 뜻도 없고 제 자유와 행복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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