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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유감 - 개정증보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평점 :
이 책은 문유석 판사가 법관 게시판이나 「법원회보」 등에 올렸던 글을 모은 책이다. 그래서인지 『개인주의자 선언』과 같이 정돈된 느낌은 없다. 하지만 글쓴이에 대한 팬이라면 한 번쯤 찾을 법한 책이다.
회사의 직원 게시판에 누군가가 글을 줄곧 올리면 ‘이 친구 할 일이 없나?’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렇게 정성 들여, 또 재미있게, 여러 번 올렸다는 것이 참 대단하다. 게다가 실명으로! 아마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닐까 싶다. 어쩌면 글쓴이의 평상시의 태도나 글에 담긴 위트가 동료들의 질시로부터 지켜준 것도 같다.
언제 읽든 글쓴이의 글은 늘 유쾌하고 공감이 간다. 이 책에서도 법원 조직, 더 나아가 공무원 조직의 생리에 대해 분석하고,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려는 글이 참 좋았다. 그리고 판사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화들을 소개한 꼭지도 재미있었다. 9쪽과 25쪽에 밑줄 그은 문장은 당분간 내 삶의 죽비소리가 될 것 같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책으로서의 짜임새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Anyone can be cynical. 냉소적으로 구는 건 누가나 할 수 있어. Dare to be an optimist. 담대하게 낙관주의자가 되라구. - P9
법복을 벗으면 저는 그냥 삼십대 초반의 젊은이일 뿐이었습니다. 저라는 개인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남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대신해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라는 직책을 맡았기에 그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 P25
야근이 생활화된 파산부에서 일하다보면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도 돌려막기를 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할 시간을 돌려서,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할 시간을 돌려서, 아름다운 음악과 책을 즐길 시간을 돌려서, 그저 몰려드는 일을 막아내는 데 쓰며 살고 있는 것 아닐까. 일만 하다보면 어느새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누구를 위해서 하고 있는지를 잊기 쉽습니다. 그게 진짜 중요한 것인데 말입니다. - P50
결국 사람들은 자기 수입의 범위 내에서 근검절약하던 미덕을 촌스러운 시대착오적 행동으로 치부하게 되고, 실현 가능성 없는 미래의 수입을 당겨쓰기 시작합니다. (중략) 유감스럽게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전장은 게임의 규칙을 지배하는 극소수의 승자들이 독식하는 피비린내 나는 곳입니다. 감히 어리바리한 양민들이 들어와 푼돈이라도 건져 살아나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 P104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자각하게 하기 위해 평생을 가르쳤는데, 한국의 인터넷상에는 한국 경제의 모순구조, 국제사회의 역학관계, 한국 근현대사의 진실, 국제 과학계의 파워게임과 음모 등을 훤하게 꿰뚫는 현자, 예언자들이 득시글거립니다. - P148
그런데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시스템의 차이, 학문 풍토의 차이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차이는 이곳(미국학교)에서는 ‘정성’, ‘성실’ 같은 평범해 보이는 가치를 우리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당연한 문화. 교수들도, 학사 행정을 담당하는 직원들도, 도서관의 사서들도, 스쿨버스를 운전하는 기사들도 다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찾는 것 같습니다. 밥벌이하려고 마지못해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 P172
다른 것이 있다면 각자의 일에 대한 존중인 것 같습니다. 자기 일을 소중히 여기기에 남의 일도 존중합니다. 그 일에 관한 한 그 사람의 권한과 판단을 존중해줍니다. 아무리 바빠도 민원 창구 앞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이 창구에 자기 서류를 들이밀며 빨리 처리해달라고 빽빽 소리 지르는 경우는 상상하기도 힘듭니다. 일 미터 뒤에서 묵묵히 기다리다가 다음 사람 오라는 허락이 떨어져야 앞으로 갑니다. 은행에 가도, 슈퍼 계산대에서도, 지하철 매표소에서도 손님은 왕이 아닙니다. 일하는 사람이 왕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기다리라면 기다려야 하고, 안 된다면 안 되는 겁니다. 그런 문화가 어느 일을 하든지 자기 일과 자기 권한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게 하는 것 같습니다. - P173
당장에는 우리나라의 미래가 암울해 보일 때도 있지만 장기적인 눈으로 보면 우리나라같이 모든 분야에서 대단히 발전하고 있는 기적 같은 나라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P186
또 설령 자기 결론이 틀렸다고 비판받더라도 그건 그 결론이 틀렸다는 것이지 나라는 존재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니 자기 방어적으로 대응할 필요도 없습니다. 상대방 이야기를 들어봐서 수긍이 가면 바로 쿨하게 시인하고 결론을 바로 수정하면 되지요. - P219
문제는 재판이라는 사법 서비스의 수요자는 재판 당사자, 즉 국민인데 얼마나 열심히 좋은 재판을 해서 당사자가 만족했는지는 쉽게 비교 가능한 수치로 환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건처리 수 통계, 판결문의 길이와 형식 등 법원 내부에서 평가받기 쉬운 양적인 측면에만 경쟁이 집중되기 쉽다는 것이죠. - P250
그래서 합격-불합격Pass/Fail식의 절대평가 방식 업무평가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국민, 당사자에게 피해를 주는 수준의 허용 불가능한 나태함은 당연히 엄격하게 평가해 페널티를 주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상에는 차이를 줄이고 다양한 재능을 인정하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 P286
게다가 인간에겐 인정 욕구라는 엄청나게 강렬한 욕구가 있기 마련이고, 피라미드식 행정조직은 더더욱 그것으로 돌아가기 마련. 어느새 애초에 왜 이 일을 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한 성찰은 사라지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잘해내서 ‘아주 칭찬해~’, ‘수고 많았어~’라는 당근을 베어 물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 그러다보면 아주 괜찮은 판사라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 정도까지는 괜찮아’, ‘이게 다 사법부를 위한 일인데 누군가는 궂은일도 해야지’ 등등 다양한 자기합리화 기제가 발동되면서 선을 넘을 수 있는 것 아닐까요. - P298
사실 저는 다른 월급쟁이들처럼 적당히 나쁜 짓 할 때도 있고, 게으름도 피우고, 불평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지독한 이기주의자에 개인주의자라서 멸사봉공할 뜻도 없고 제 자유와 행복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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