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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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첫 책이다. 글이 참 예쁘다. 담긴 생각도 곱다. 지은이는 성찰적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 자신의 경험, 가족, 유년의 추억에서 쓸만하고 아름다운 실을 뽑아낸다. 하루하루 일기를 적는 일조차 버겁고, 일상에서 무엇을 하나 깨닫는 일이 어려운 나에게는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지은이의 삶의 농도는 나보다 훨씬 짙은 것 같다. 늘상 하는 다짐이지만, 새해에는 좀 더 두터운 삶을 살고 싶다.

사람은 저마다 개별적인 존재이다. 모든 환경과 경험도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 비슷한 경험은 있지만 똑같은 경험은 없다. 그러므로 나도 너와 똑같이 경험해봤다는 말이나 한 발 더 나아가 해봐서 안다는 말은 매우 신중히 해야 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 많은 인생을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시련에 혹독하거나 냉정하기 쉽다. 경험이 누군가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고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해 준다면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의 삶이지 타인의 삶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누군가를 위해 고민하고 있다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첫마디는 ‘나는 너를 모른다’여야 할 것이다. - P46

사람도 그렇고 사물도 그렇고 작품도 그렇고 좋고 빼어난 것은 흔하지 않다. 신인의 것이든 기성의 것이든 마찬가지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원고지 백 장, 천 장을 채운다는 건 도깨비 방망이로 금 만들 듯 맘만 먹으면 뚝딱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천 장을 쓰고 버려야 백 장의 소설이 나오고, 만 장을 쓰고 버려야 헌 장의 소설이 나오는 건,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은 누구나 아는 법칙이다. 그 시간과 노력에 헌신한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고 싶었다. 그 예의는 단 하나, 그들의 수고가 담긴 작품을 끝까지 읽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P48

그러다 서른 살이 되었다. 최승자 시인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 했는데, 나는 조금 반대였다. 서른 살이 되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는 일만 생겼다. - P63

되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모든 자리는 무모하게라도 시도했을 때 한 걸음이나마 앞으로 나아갔다. 염려하고 망설이고 현실과 타협하면서 이루고 성취한 일은 없었다. - P71

어쩌면 행복이란 즐겁고 만족 가득한 상태, 그 자체를 말하는 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정지되고 멈춰있는 어떤 순간이 아니라 생의 움직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낙천적이고, 그리하여 생의 곳곳에서 행복을 찾는 이들과 틈만 나면 삶의 비의를 찾는 이들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움직임에 있는 것 같다. - P90

아니다 싶을 때 과감히 돌아서는 용기도 중요하지만, 아니다 자신 없을 때는 한 발 더 내디뎌보는 용기도 필요할 것이다. 삶의 소망은 문을 열었다고 해서 이룬 것이 아니라 그 문을 연 이후에 또 한참을 더 가야 하는 법. 어찌 방향을 바꾸는 것만 터닝 포인트일까. 한 단계 깊어지는 것은 변화가 아닌가. 삶이 제자리뛰기라고 투덜거리지 말자. 잘만 뛰면 제자리에서 뛰어도 한 계단 위니까. - P97

그래도 한 가지는 배웠다. 순간의 경험이, 체험이 삶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 지나가는 자는 머무는 자의 고충을, 행복을 절대 알 수 없다는 것. 안다는 말은, 알겠다는 말은 매우 오만하고 경솔한 말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농사를 그만두기로 했다. 아니, 농사 흉내를 그만두기로 했다는 말이 맞겠다. 땅을 대한다는 건, 삶을 이해한다는 건, 폼으로 낭만으로 자랑삼아 될 일이 아니었다. - P148

자식 키우는 일이 농사와 아무리 비슷해도 다른 건 다르다. 밭이야 내가 들인 노고만큼 내 것이지만 아이는 내가 들인 노고가 얼마든 내 것이 아니다. 밭에서는 내가 심은 열매가 나지만, 아이는 저 홀로 심은 꿈으로 열매를 맺는다. 그런 마음으로 보면 안 자란 열매도 없고, 잘못 자란 열매도 없다. 우리가 들여야 할 정성은 밭을 향한 것이지 열매를 향해서는 안 될 일. 그러니 밭만 가꾸어주고 열매는 간섭하지 말자 수시로 다짐하는데, 사춘기 농사가 여름 농사라 그런지 마음속 천불 다스리기가 쉽지는 않다. - P150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말하고 싶어하면서 네가 누구인지도 내가 규정하고 싶어하는 이기심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까. - P153

가족은 지겹고 무겁지만, 그 하중으로 나를 지그시 눌러주는 어떤 안온함도 있는 것이다. 가족이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많은 일들이 가족이기 때문에 견뎌지기도 하는 것이다. 증오와 애정 사이의 연민과 이해의 공동 운명체, 가족이란 건 결국 그런 게 아닐까. - P189

희망이 외려 아픈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 꿈은 꾸는 자의 몫이 아니라 컨트롤하는 자의 몫이라는 생각을 한다. 성장에도 통이 있고, 씨앗도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엄청난 발아열을 견뎌야 한다. 마라토너들은 달리다보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사점死點과 만나게 된다고 한다. 그 사점을 통과하고 나면 다음은 비교적 쉽게 달리게 된단다. 아프고 괴롭고 불안하고 막막한가.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의 삶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도망치지 마라. 원래 희망은 아프다. 그래서 꽃이 피는 것이다.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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