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시연 1
키오 시모쿠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5년생>의 작가 키오 시모쿠의 신작 <현시연>이 나왔다. 낭만적인 분위기는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는 연애 이야기에, 에로틱함은 고사하고 들여다보고 있으면 불쾌할 정도인 정사 장면으로 독특한 색깔을 보여준 <5년생>은, 5권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 진눈깨비가 내릴 듯한 11월의 흐릿한 오후의 막연한 답답함에 가슴이 막힌다. 설렘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남자주인공과 이쁜 구석 하나 없이 되려 밉살맞아 보이는 여주인공의 텁텁한 연애담을 그렸던 작가가 신작의 소재로 삼은 것은 놀랍게도 '오타쿠'이다.
'어떤 한 분야에 있어서 마니아의 수준을 넘어 전문가적 지식을 가진 사람. 새로운 문화주류라는 찬사와 더불어 배타적 성향으로 인한 사회 부적응자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다'라고 설명되는 특이한 인간들, 오타쿠. 그 오타쿠들이 득실득실하게 나오는 이 작품의 제목 <현시연>은 '각문화구회'의 줄임말이다. 별볼일 없는 그저 그런 대학의, 뚜렷한 활동도 없이 모여 있는 집단, 현대시각문화연구회. 현시연은 거창하게도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장르를 넘어선 종합적 연구서클의 기치를 내걸었지만 바꿔 말하면 무엇 하나 제대로 연구한 분야가 없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만화연구회와 애니메이션연구회에서는 호시탐탐 회원을 빼내가려고 노리고, 서클 자치회의 폐부 명령에는 제대로 항의조차 못한다. 그런 현시연에 네 명의 신입부원이 들어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캐릭터지만 실상은 오타쿠인 사사하라 칸지와 반질한 외모 뒤에 끝을 알 수 없는 게임 내공을 지닌 코사카, 그리고 코사카를 쫓아 들어온 여자친구 사키와 코스프레에 빠져 있는 귀국자녀 카나코가 그들이다. 그리고 척 보면 한눈에도 오타쿠라 여겨지는 선배들의 '빠져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만화(동인지), 애니메이션, 게임, 코스프레, 프라모델 오타쿠들의 생활이 유쾌하게 펼쳐진다.
- 프라모델은 장난감과는 달라. 이건 스스로 조립하는 거니까.
- 아, 그럼 장난감보다도 못해? 
- 아냐!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하나하나 부품을 조립하다 보면 혼이 담긴단 말야!
  애착도 장난감이랑은 비교도 안 돼!
프라모델을 만드는 데 가장 알맞은 계절은 봄이라고 주장하는 그들, 밤을 새고 줄을 서서 동인지를 사는 그들, 전치 2개월의 부러진 손목을 하고도 코믹페스티벌의 레어카드를 모으기 위해 줄을 서는 그들, 코스프레 이야기만 나오면 성격이 바뀌는 그들. 그들 오타쿠들의 열정은 '만화 따위'는 쳐다보지 않고, 코스프레는 정신나간 놀음이라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짐짓 한심한 부류의 한심한 모양새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무언가에 빠져들 때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열정과, 그것에 빠져든 동류만이 공감할 수 있는 짜릿한 희열을 어떤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잣대만으로 단순명쾌하게 판단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일생에서 어떤 한 가지에 '빠져' 오타쿠임을 자처할 수 있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 아닐까. 맨홀 오타쿠, 언덕길 오타쿠, 담장 오타쿠, 빨래집게 오타쿠, 간판 오타쿠... 자신만의 즐거움과 열정을 찾기만 한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
<5년생>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유쾌하고 가벼운 작품이어서 섬세한 심리묘사와 관계의 명료하고 무거운 통찰은 느낄 수 없지만 도심의 마천루와 주가 상승과 번듯한 명함, 고액연봉 들과 하등 관련없는 것들에도 시선을 둘 수 있는 여유가 있는 독자라면, 오타쿠=변태 혹은 범죄, 성도착 같은 편견을 가진 독자가 아니라면, 그들 오타쿠의 이야기에서 충분히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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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6-16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년생>을 참 재미있게 봤었는데... 장바구니에 넣어야겠습니다..^^

superfrog 2005-06-16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날개님, 근데요, 5년생이랑은 많이 달라요..^^;;
그래도 좀 정신 없는 1권을 지나면 재미나더군요.ㅎㅎ

비로그인 2005-06-16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잼나겠어요. 뭔가에 빠져들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짜릿함..요즘 제 상황과 비교해선 아주 먼 옛날 얘기 같습니다, 그려. 그래서 그런 열정들이 더 그리워지는 거 있죠?

superfrog 2005-06-1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님, 그 '열정', 바로 그것이 그립고 부러운거죠, 허허..;;

어룸 2005-06-17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오타쿠군요!!! 반가워라...흐흐흐 ^m^
근데, 맞아요! 프라모델은 장난감과는 다르다구요!! >.,<

superfrog 2005-06-17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oofool님은 이쁜 녀석들을 데불고 스냥쑈로 승화시킨 '디카쑈 오타쿠'세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