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 > 학고재-조선후기 명화전을 다녀와서

 기와 세라는 낱말의 의미를 살펴 보자면, 기(氣)는 동양회화론에서의 사혁의 6법 가운데 '기운생동(氣韻生動)'에서의 기(氣)를 의미하고 세(勢)는 위세/기세를 의미한다. 사혁이 활동하던 시대의 회화는 주로 초상화와 고사인물도였기 때문에 본래 기운의 의미는 인물의 정신적인 기질을 가리켰다. 그러나 후에 그 범위가 산수 등의 여러 그림에 확대되었고, 전체적인 회화의 예술성을 평가하는 것이 되었으며, 필묵의 쓰임까지 포괄하는 평가기준이 되었다. 즉 기(氣)는 붓과 먹의 쓰임에서 표출되는 에너지인데, 그 에너지는 필획의 속도에 내재된 육체적 에너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고매한 정신적인 기상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세(勢)는 작가의 정신적인 에너지와 그러한 정신에서 나오는 기세등등하고 거침없는 태도, 양자 모두를 포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시되고 있던 귀한 그림들은 그런 낱말의 의미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겸재 정선이 <박연폭포>,<어촌도>,<관폭도>는 망설임 없는 붓의 쓰임새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필치가 당당하면서도 거칠지 않고, 농익은 풍성함이 있으면서도 기교적인 면이 천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은 일정 경지에 오른 대가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이지 싶었다. 익히 들어온 대가이니만큼 한 눈에 잡아끄는 세련됨과 화려한 멋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혹은 추측은 순전히 나의 부족한 수양에서 비롯된 오해 내지는 착각이었다. 최북의 그림은 다른 작가의 작품들에 비해서 비교적 현대적인 느낌을 주었다. 전대에 비해 관습에 비교적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이 전시 작품을 아우르는 공통점이기는 하지만, 최북의 그림은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현대적인 맛이라면 차라리 김홍도가 더 현대적이다- 별나고 특이하다고나 할까. 기세가 드러내는 태도의 당당함과 고매한 정신력보다는, 기존 전통을 의식하지 않는 자유분방함이 먹의 농담조절과 필치의 표현력에 있어서 엿보였다. 자유분방함의 느낌은 장승업의 <산수인물영모8폭 병풍>을 감상함으로서 지속되었는데, 먹과 채색물감의 번지기와 흘리기, 뛰어난 묘사력과 색채감각, 공간구성감각 등은 능히 관객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기량의 능숙함과 그 표현의 아름다움은 마치 서양회화가 제시하는 3차원의 환각세계처럼 시/지각을 자극했다. 고고하고 적적한 아름다움은 적었으나 오로지 화가가 지닌 재능에는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고 다른 그림에서보다 오랜 시간 머물러 감상했다. 윤두서, 채용신, 김홍도 등 옛 대가들의 작품은 모두 존경스러웠으나 그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가를 꼽는다면 능호관 이인상을 들겠다. 특히 <장백산도>는 고상한 기품과 한없는 고요함이 감돌았고, 나는 그러한 절제미 속에서 쓸쓸함을 맛보았으며 휴식과 같은 편안함도 맛보았다. 주관적인 미적취향 때문이겠지만 이인상의 그림들은 감상 후에도 그 여운이 매우 길었다. 집으로 와서 유홍준 선생의 저서인 화인열전을 뒤적여 보니, 타협을 모르는 완고한 성격의 대단히 원칙적인 도덕 군자였다는 이야기가 쓰여 있다. 역시 그림에서 보여지는 고고한 기상은 인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구나 했다. 동양화란 서양화와는 다르고 동양미학은 서양미학과는 달라서 예술작품의 품격 속에서 작가의 인품을 읽어낼 수 있다 하였는데, 그의 인품마저 마음에 드는 바람에 그림을 더욱 좋아하게 될 것 같다.

 학고재에서 전시관람을 끝낸 후 돌아오다가 옆 블록에 자리한 현대갤러리에 들러 <근대&현대미술 거장전(Mordern&Contemporary Masters>을 관람했다. 한국과 서양의 모더니즘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는 중이었는데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도 전시중이었다- 학고재 에서의 정서적인 안정감은 일시에 날아가고 자극적인 감각의 즐거움이 어느덧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블록 하나를 건넌 것이 200-300년의 시대를 훌쩍 뛰어넘은 꼴이 되었는데, 진경산수와 한국 모더니즘 회화 간에는 일말의 내적인 연결점도 보이지 않았다. 선조들의 그림에 스며있는 저 고결한 정신세계의 아름다움이 정작 후손인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된 것은 도대체 언제부터인 것일까. 서글픈 마음에 전시장을 나서서 걷다 보니 가로수의 벚꽃이 만발해 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어 벚꽃을 폰카메라에 담고서 가던 길을 재촉한다. 바람이 제법 쌀쌀하다. 리바이스 청자켓도 사월의 황사바람을 막기엔 역부족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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