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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289
이수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5월
평점 :
흔히 어떤 허황된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꿈 같은 얘기라고 한다. 또 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할 때도 꿈 같은 이야기라고 한다. 꿈 같은 얘기란 결국, 한낮에 꾸는 백일몽처럼 '있을 법한' 이야기'지만, 결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가리킨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꿈 같은' 얘기일 뿐인데도 믿고 싶거나 이뤄졌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바로 꿈이기 때문이다.
현대에 있어 시를 통해 꿈을 그린다는 것은 내면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단순히 시적 자아를 서정적으로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즉물적으로 자신을 사물들과 동일시하거나 서정성을 파괴하고 아예 숫자 같은 기호에 자신을 맡기기도 한다. 이 같은 행위는 실존이 딛고 있는 현실에 대한 도피 행위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현대사회 속에서 위협받고 있는 자아를 되살리는 힘을 주기도 한다.
이수명 시인은 95년 첫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를 통해 시단에 등장한 이후 꾸준히 사물이 갖고 있는 ‘의미 대 무의미’의 긴장관계를 탐구해 오고 있다. 특히, 최근 나온 네 번째 시집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은 다소나마 남아 있던 서정성마저 과감히 도려내며 극히 메마른 어조로 의미 대 무의미의 대결을 그려낸다. 그 결과가 모두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 이처럼 말-의미, 의미 대 무의미에 천착하는 시인도 달리 없다는 생각이다.
눈은 없고 / 피만 있다. / 피가 눈을 뜬다 // 어둠 속에 들어선 빛 / 빛 속에 들어선 어둠 // 입은 없고 / 입 속으로 사라진 비명 소리도 없고 / 피만 있다. / 피가 입을 벌린다. // 집은 없고 // 집을 들고 / 유리창들이 일시에 날아가버리고 // 빛 속의 빛 / 어둠 속의 어둠 // 너는 없고 / 너를 디자인하는 / 피만 있다. // 나는 피를 닦는다. // 피는 없고 / 나는 피투성이다. - ‘해부’ 전문.
아무렇게나 뽑아본 이 시는 자신의 의식을 들여다보는 자의 탄식 어린 고백을 담고 있는데, 이수명 시인의 많은 시에 나타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정리해보면, ‘피’는 ‘없는’ 눈을 뜬다, 피는 ‘입’을 벌린다, 피는 ‘없는’ 너를 ‘디자인’한다, 나는 피를 ‘닦지만’, 피는 ‘없고’, 나는 ‘피투성이’다. 달리 말하면, 피를 바라보는 데서 시작한 시적 자아는 어느새 피투성이가 돼 있다. 이러한 주체-객체의 전도 혹은 뒤섞임이 시인의 시에서 주요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이렇게 주체-객체의 전도를 일으키고, 또는 의미와 무의미가 강한 긴장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은 거칠게 말하자면, 일반적인 세계에서 대상과의 거리를 통해 확보돼 있는 ‘앎’에 대해 시인이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왜 부정하는가. 그것은 세계 속에 존재하는 ‘앎’을 흔들어야 사물과 사람을 바로 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흔들어대는 손길은 가끔 둔중한 무게로 다가오기도 한다.
고양이 비디오를 틀어놓고 / 고양이가 하나 둘 셋 / 의자에 하나 둘 셋 / 바닥에 하나 둘 셋 / 창틀에 하나 둘 셋 // 고양이를 관람하는 고양이들 // 고양이를 / 관람하는 고양이를 / 관람하는 고양이들 // 거대한 고양이 인형들 // 모두들 고양이를 추모한다. / 고양이 비디오를 틀어놓고 // 모두들 고양이 흉내를 낸다. / 고양이를 끄고 싶은데 / 고양이 비디오를 끄고 잠들고 싶은데 / 비디오는 계속 돌아가고 // 고양이도 계속 돌아가고 // 고양이를 따라 / 고양이를 소비할 뿐 // 고양이 흉내를 내지는 않고 // 고양이 비디오 앞에 / 고양이가 하나 둘 셋 -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전문.
이 시편은 미디어에 중독돼 자신만의 사유가 없는 현대인들, 또는 그러한 현대인을 양산하는 미디어의 폐해를 섬뜩하게 그려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이번 시집은 곳곳에서 현대사회의 물신주의, 일상 속의 폭력 등을 들추어내며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할지 되묻고 있다. 즉, 세상의 무수한 '고양이 비디오'를 끄고 잠들고 싶지만, 잠들 수 없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과거 이수명 시인의 시에서는 이러한 무의 대 무의미의 싸움이 서정적인 울림과 함께 그려져 있어 동감의 눈으로 바라보기 쉬웠으나, 이제는 극히 메마른 어조만이 앞서는 시도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저 70, 80년대 이승훈 시인을 비롯한 일군의 시인들의 작업과도 일맥상통하는데, 과연 시의 순수, 시의 자유가 말-의미 사이에만 놓인다고 믿고 있는 것인지 반문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