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욕망의 얼굴들을 가리키며

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오랜만에 신인 작가의 소설을 읽었다. 처음 책을 들었을 때는 다소 필명의 냄새(?)가 풍기는 정이현이라는 이름에다가 ‘낭만적 사랑과 사회’라는 거창한 제목까지 달고 있어서 기대 못지않게 우려도 있었다는 것을 먼저 밝혀야겠다. 다행스럽게도 소설은 꽤 읽을 만하다.

그녀의 소설이 보여주는 세계는 일견 위악(僞惡)적인 여성들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비치기도 한다. 소설집의 제목이 된 데뷔 단편에 나오는 여주인공은 아직 대학도 졸업하지 않았지만,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과는 별도로 신랑감을 잘 골라내 상류층으로 진입할 기회를 노리고 있으며, '소녀시대'의 여주인공은 아직 어리다고 할 고등학생임에도 아버지의 원조교제 여자를 떼어내기 위해 자신의 남자친구와 공모, 납치극을 꾸민다.

이 같은 위악을 통해 그녀들이 희망하는 것은 인간의 평등이나 사회의 안녕이 아니며, 그렇다고 여성의 정체성 찾기도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욕망들이 이러한 위악을 저지르게 한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 욕망들은 더 이상 ‘여성적’이지 않고, 차라리 ‘남성적’이라고 불러야 어울릴 듯하다.

여기서 ‘남성적’이라는 말은 여성성이 가진 포용성, 즉 용서하고 창조하는 세계가 아닌, 확정성, 즉 경쟁하고 거래하는 세계를 가리킨다. 달리 말하면, 정이현의 여주인공들은 사회적 지위나 권력으로 환원 가능한 세계를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여주인공들은 남자들과 다름없이 2000CC 중형차의 오너가 되기를 바라며('트렁크'), “언덕 위의 하얀 집”의 여주인으로서 “운전기사와의 밀회”('순수')를 즐긴다.

이러한 변화는 기실,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표제작에서 여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는 다르다. 나는 혼자 힘으로 이 척박한 세상과 맞서야 한다. 진정으로 강한 여성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25쪽) 우스꽝스러운 것은 그녀가 바라는 강한 여성이란 미국 로스쿨에 다니는 남자의 여자가 되기 위해 영악하게 구는 여자라는 점이다. 정이현의 손끝은 바로 이러한 여성의 어긋난 욕망의 얼굴들을 가리키고 있다. 그 얼굴은 화사한 화장과 향긋한 향수 냄새로도 가릴 수 없다.

90년대 이후 등장한 작가들의 소설은 영화나 TV 드라마 등과 비교할 때 은희경, 성석제 등 몇몇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많은 경우 대중성을 상실한 채 활력을 잃고 있다. 이는 90년대 이후 등장한 많은 작가들이 사소설에 가까운 작품들을 발표해오며 소설이 가져야 할 재미와 이야기성을 잃은 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정이현의 소설들은 이전에 등장한 작가들의 작품들과는 달리, 지극한 개인성의 영역을 구현하면서도 사회성의 코드들을 곧잘 잡아내는 장점을 갖추고 있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문득문득 세태소설을 읽는 느낌이 드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특히, 최근 들어 더욱 두드러지는 사회적으로 팽배한 욕망의 양상을 그리는 데 솜씨를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진정한 여성성의 구현 없이는 인간에게 희망과 구원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고 믿는다. 더 이상 ‘여성적’이지 않고, 차라리 ‘남성적’이라고 불러야 어울릴 듯한 정이현의 여주인공들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