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275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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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시인의 시집들을 끼고 다니며 까까머리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되고, 군대에 갔다 와 예비군이 되었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성복이라는 이름은 세 음절의 단어 이상의 어떤 것이다. 어제 저녁 술자리에서 만난 친구와 선배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은 이성복 시인이 10년 만에 새 시집을 펴낸 데 대해 기쁨과 반가움이 뒤섞여 밤 1시가 넘도록 말을 이어야 했다.

개인적인 어조로 말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생각도 든다. 저 암울한 80년대, 이성복 시인이 아픔과 치욕을 이야기하며 누더기 삶을 긍정하는 내면의 힘을 일깨울 때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시인과 젊은이들이 그의 시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가. 그런 시인이 시를 멀리한 날들을 접고 10년 만에 새 시집을 출간한 것은 문학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큰 사건이 되기에 충분하다. 더욱이 새 시집은 다행스럽게도, 그리고 놀랍게도 보다 낮아진 목소리지만 더욱 또렷해진 눈으로 세계를 응시하고 있다.

'봄밤에 별은 네 겨드랑이 사이로 돋아난다 / 봄밤에 어둠은 더 멀지도 가깝지도 않고 / 바람 불면 개나리 노란 가시 담장 불똥을 / 날린다 이 순간의 괴로움을 뭐라고 하나 / 봄밤에 철없이 인생은 새고 인생은 찻길로 / 뛰어들고, 치근덕거리며 별이 허리에 달라 / 붙어도 넌 이름이 없다, 넌 참 마음이 없다'('봄밤에 별은' 전문)

어떤 시를 인용해도 좋을 것 같아서 눈에 띄는 대로 옮겨봤는데, 이 시 한 편을 통해서도 과거와는 달라진 시인의 시선이 느껴진다. 봄밤의 풍경을 무심한 듯 스케치하고 있는데, 바람에 날리는 개나리 꽃잎에서 찰나의 움직임을 느끼면서 봄밤의 별빛에 들뜨는 마음을 시인은 애써 무념으로 돌려세운다.

다른 시를 보아도 상황은 비슷하다. '저 꽃들은 회음부로 앉아서 / 스치는 잿빛 새의 그림자에도 / 어두워진다 //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 가득한 것들 // 나는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나간다 / 소금밭을 종종걸음 치는 갈매기 발이 / 이렇게 따가울 것이다 // 아, 입이 없는 것들'('아, 입이 없는 것들' 전문)

'살아가는 징역의 슬픔'으로 축약시킨, 더 화려할 것도 없고 더 구차할 것도 없는 삶 자체에 대한 긍정을 '꽃나무 앞으로 조용히 걸어나'가는 걸음걸이로 단순화해 보여주고 있는데, '입이 없는 것들'에 다가설 수밖에 없는 정황이 길게 이어지지도 않는다.

흔히들 어떤 시에 대해서 투명한 언어에 도달했다느니, 간결한 이미지로 많은 것을 보여준다느니 하는 말들을 하는데, 이 시집을 통해 만나는 시편들이야말로 실존의 무게 자체를 지극히 투명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아울러 80년대에 토해낸 생에 대한 부정과 이미지와의 격렬한 교감은 뒤로 물러서면서도 또 다른 지평을 열고 있다.

'내가 세상을 욕하고 엿 먹이고 / 내 안의 에이즈 균을 다 퍼주어도 / 밤새도록 깨어 있는 저 예릿한 / 달맞이 노란 꽃은 어쩔 수가 없다 // 내가 세상에 침 뱉고 누런 가래 / 억지로 끌어올려 마구 퍼부어도 / 밤 오는 숲 속으로 마저 들어가지 못한 / 저 산길의 한 자락은 어쩔 수가 없다'('밤 오는 숲 속으로' 전문)

시인은 시집의 맨 앞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참으로 곤혹스러운 것은 곤혹의 지지부진'이라고 털어놓고 있지만, 그 지지부진이야말로 '밤 오는 숲 속으로 마저 들어가지 못한 저 산길'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언어의 한계니 표현의 진부함이니 하는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생의 모든 것이 오고 가는 것을, 생의 모든 것이 나고 죽는 것을 응시하는 시편들.

나는 시집을 연 순간부터 시인의 생에 대한 연민으로 떨리기 시작해, 시집의 중반에 다다랐을 때는 급기야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왜 시인이 '입이 없는 것들'에게 입을 빌려주려 했는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질긴 연민을 거둘 수 없다면 그대로 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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