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모퉁이의 중국식당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나 새 책이 나오거나 새 영화가 개봉할 때 이 책은 꼭 읽어야지, 이 영화는 이번 주에 봐야지 했다가 놓쳐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다른 일이나 약속 때문에 바빠서 또는 영화가 조기종영해서 그랬던 건데, 그럴 때면 며칠 혹은 몇 달씩 아쉬워하곤 했다.또 가끔은 다른 이유 때문에 그런 적도 있다. 이를테면, 이 책은 어떤 책을 먼저 읽고 나서 읽어야지 했다가 잊어버리거나, 이 영화는 ○○하고 봐야지 했다가 그 사람이 그 영화를 보고 난 후여서 놓쳐버리거나 하는 이유로 말이다.

예전에는 그런 경우, 나중에라도 생각 나면 구해 읽거나 비디오라도 보았는데, 요새는 읽고 싶고 보고 싶은 욕심이 적어진 건지 아니면 좋은 책이나 영화가 줄어든 건지, 자주, 많이 놓친다. 그리고 놓쳐도 조바심치는 일이 많지 않다.다행스럽게도 허수경의 산문집이 나왔다는 신문 기사를 보고 나서는 바로 책을 구하게 됐다. 다행스럽다고 한 건 허수경의 책을 빨리 보고 싶어 서둘렀다는 것 외에도 그녀가 지치지 않고 새 책을 써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길 모퉁이의 중국식당>을 통해 허수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대부분 '한국'에 관련돼 있다. 허수경은 독일에 온 한국 친구들과 하이델베르크에 소풍 갔다가 내장산 단풍을 그리워하는가 하면('단풍'), 어린 시절 호박잎에 은어를 싸서 먹던 기억을 털어놓기도 한다('호박잎 바나나잎').무엇보다도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동생')나 어머니, 또는 가까운 지인들을 회상할 때, 그녀가 한국을 떠나 독일에서 고고학 공부를 하며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몇 번씩 불러내는 추억과 이야기가 눈앞에서 오롯이 살아난다.

하지만, 한국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지만, 그녀의 추억이 단순히 독일에서의 삶과 대비하기 위해 불려지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무국적적(비국적적)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투영한 후 드리워지는 그늘에서 시작되고 있다.

...일요일, 연구소에 나가서 공부랍시고 자료를 조금 들여다보고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한인교회 목사님을 우연히 만난다. 목사님은 반갑게 인사를 하시며 '공부하시느라 힘드시지요?' 하신다. 목사님 역시 대학에서 공부하는 신학생이다. 식구들과 함께 유학을 오신 것이다. 아이가 둘이다. 목사님은 아이들과 함께 오전에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는 딸기밭으로 소풍을 갔다 왔다고 하신다. 그리고 아픈 분이 있어서 병문안을 가는 길이라고 하신다. 가끔 만나는 나를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살갑게 대해주시는 목사님께 은근히 믿음이 갔던지 나는 다짜고짜 이런 말을 한다. '잘 모르겠어요. 저는 저를 위해서만 사니까... 불안해요,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목사님은 못 들은 척 창 밖을 내다보신다.-'나를 위해서만 사는 삶'에서

그녀는 고고학을 전공하며 겪은 발굴 등의 에피소드, 고고학을 전공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들을 조근조근 이야기할 때와는 달리 이렇게 불쑥, 불안해한다. 이 그늘, 이 불안이 그녀의 글에서 잊을 수 없는 추억, 버릴 수 없는 세계를 자꾸 불러오게 하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을까.그것은 곧 사춘기 시절 뚱뚱하고 우울한 소녀였던 자신을 회상('우울했던 소녀')하는 데서도, 근처 성당에 들어가 있으면 그저 위로를 받는다고 이야기할 때('울고 있는 마리아')도 확인할 수 있지만, 그것들은 지금 그녀를 구속하고 있는 것들은 아닐 것이다.

흔히 지나간 날들을 회상하면 힘든 일들은 잊혀지고, 아름답고 즐거웠던 일들만 떠오른다고 한다. 그런 것도 같다. 하지만 아닌 것도 같다. 길이는 짧고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꾹꾹, 연필 자국이 많이 났을 허수경의 글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추억을 담은 이야기들보다 그것을 바라보는 자리에 눈길이 더 간다. 그녀의 그늘 말이다.

그늘에서 불러오는 이야기들. 그것은 버릴 수 없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버릴 수 있는 세계와 달리 무척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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