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 동지들에게
일전에 어떤 친구를 만났더니 날더러 다시 포로수용소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고 정색을 하고 물어봅니다. 나는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것은 포로로서 나온 것이 아니라, 민간억류인으로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라고, 그랬더니 그 친구가 빨리 삼팔선을 향하여 가서 이북에 억류되고 있는 대한민국과 UN군의 포로들을 구하여내기 위하여 새로운 싸움을 하라고 합니다. 나는 정말 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북에서 고생하고 돌아오는 상병포로들에게 말할 수 없는 미안한 감이 듭니다.-116쪽
5.16 직후 김수영에게는 밀리터리즘에 대한 공포 외에도 다른 또 하나의 골치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큰아이 준의 중학 입시 문제였다. (중략) 박재삼이 그런 김수영을 보고, '그렇게까지 아이들 공부에 신경 쓸 게 무어가 있느냐' 고 했다. 지나치지 않냐는 어조였다. 김수영은 고개를 돌리면서 '재삼씨도 나중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보세요, 그럼 알어요.' 하고 말했다. - 아이들은 그의 천국-215쪽
이병주의 종횡무진한 화제를 가로막으면서 "야, 이병주, 이 딜레땅뜨야" 하고 말했다. 이병주가 "김선생 취하셨구먼" 하면서 말을 피했다. 김수영은 그 뒤에도 몇차례 공격을 가했다. 이병주는 껄껄껄 웃으면서 우회해 나갔다. - 풀잎처럼 쓰러지다-250쪽
'적당히' 쓸 줄 아는, 때가 묻은 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든다. 나는 아직도 글을 쓸 때면 무슨 38선 같은 선이 눈 앞을 알찐거린다. 이 선을 넘어서야만 순결을 이행할 것 같은 강박관념. 우리는 무슨 소리를 해도 반토막 소리 밖에는 못 하고 있다는 강박관념. 4.19 이후에 8개월 동안 잠깐 누그러졌다가 다시 굳어진 강박관념을 우리 나라만의 불행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후 거기에 세계의 얼굴이 담겨있는 것을 알고 약간의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여기에 비친 세계의 얼굴이 이중이나 삼중 유리 겹창에 비치는 얼굴 모양으로 윤곽이 엇갈려서 어떤 것이 어떤 얼굴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는 새로운 불안이 생겼다. 따라서 얼마전까지만 해도 38선이 없어지면 그것은 해소되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38선이 없어져도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또 다른 선이 얼마든지 연달아 생길 것이라는 예측이 서 있다. 결국 자유가 없고 민주주의가 없다는 귀결이 온다. 민주주의가 없는 나라에서는 작가의 책무가 이행될 수 없다. 아직도 우리 나라는 이러한, 달결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수수께끼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경우에 이북보다 이쪽이 '비교적' 자유가 있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사회는 말대답을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가 있는 사회이다. 그런데 이 지대에서는 아직까지도 이 '절대적인' 권리에 '조건'을 붙인다. - 히프레스 문학론-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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