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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
조순 외 지음 / 월간조선사 / 2004년 11월
평점 :
품절
지적 전통의 단절 같은 문제를 한글 교육 탓으로 돌리는 것은 적반하장이다. 한자에 그렇게 빠삭하다는 양반들이 그럼 번역이라도 좀 열심히 해보던가. 고전 중국어 텍스트의 독해 능력과, 한자-어휘를 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중국 가서 필담 나눠보니, 정확한 의사소통이 되던가. 한두세기 전의 조상이 남긴 문집은 명확히 이해가 가는가. 전자는 한자-어휘 익히기가 아닌 엄연한 외국어로서의 중국어를 익혀야 할 문제요, 후자 역시 한자-어휘 습득을 넘어서는 고된 훈련과 독서를 거친 뒤에야 가능한 일이다. 요즘 애들은 한자를 몰라서.. 이런 말씀 하는 어르신 치고, 고전을 제대로 읽은 소양이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지 궁금해진다. 명보나 연합보 같은 현대 중국어의 문어체 기사 정도도 전전긍긍할 분들이 대다수인데, 19세기 이전의 본격적인 한자 저작들을 대체 어떻게 읽었다는 것인지. 대학까지 나온 중국인들도 전공자가 아니라면 알아먹기 힘든 글들을 말이다. 문자 기호를 안다는 것을 곧 지식 추구와 습득 자체로 이해하고 있는 사고방식부터가, 무슨 책으로 어떤 공부를 해왔다는 것인지 의심스럽게 만들 뿐인데.
TEPS 팔아먹는 한편으로, 한자로 공갈 치는 일 같은 것도 이제 그만 좀 했으면 한다. 지적 전통의 단절이 그렇게 한탄스럽거든, 본인들의 허약한 실력부터 반성하고 고전 번역 씨리즈 같은 거라도 기획해 보든지. 서해문집이나 태학사에서 내는 책 같은 거, 한자 타령이나 하고 있는 신문들과 노친네들은 좀 하면 안 되나. 서유견문록 같은 문체는 하고 싶은 사람들끼리나 쓰면 된다. 그리고 읽지 않은 책을 읽은 척 하고, 가지고 있지 않은 소양을 가진 척 하는 놀음도 하고 싶은 사람들끼리 하면 될 일이다. 왜 모든 한국인이 그 장단을 반드시 같이 맞춰줘야 하는가. 한국과 중국의 고전이라 하면, 뜻있고 재능있는 소수의 연구자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당대의 훌륭한 한국어로 번역해내면 될 일이다. 기업 등에서 중국어 구사자가 필요하다면 마찬가지로 중국어를 제대로 배우면 될 일. 교육의 하향평준화을 평소 우려하고 비판해온 분들이 왜 한자 같은 것에선 하향평준화을 굳이 옹호하는 모순을 보이는 것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한자 배우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주장은 뭐 확인이 안 되는 얘기니까 할 말이 없다. 확실히 조갑제씨의 하이 개그는 보통 머리에서 나온 것이란 생각은 안 들지만서도.
연구 집단의 외연은 확장되고 내공은 깊어지고 독서 대중과의 소통 역시 활발해지는 것. 가야할 길은 멀지만서도, 방향은 대략 나와 있지 않은가. 애들에게 한자 가르쳐야 한다고 난리라니, 애들은 또 뭔 죈가.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한자 외울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북학의 번역본을 권유할 일이다. 한자 물귀신들은 세종어제를 매일 백번씩 암송하기를, 생전의 대왕께서도 글이라면 자못 백번씩 읽었다 하시니. 그렇게 신구와 노장이 함께 전통과의 관계 복원과, 남한의 지적 후진성 극복과, 미래를 위한 가능성의 준비를 조금씩 해나가는 것이다. 이런 쓰잘데기 없는 책 같은 것으로 종이 낭비 하지 말고.
p.s 여기까지 읽어오면서 한자 표기가 안 되어 있는 탓에 해독이 불편하거나 어렵다는 분은 설마 없을거라 믿는다. 물론 동음이의어로 인한 심각한 오해와 혼란이 초래될 상황이 있었다면 당연히 안 쓸 이유가 없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작성자와 독자에게 소통 상에 어떤 이익이 있는지도 아울러.
"그렇게 新舊와 老長이 함께 傳統과의 關係 復原과, 南韓의 知的 後進性 克復과, 未來를 위한 可能性의 準備를 조금씩 해나가는 것이다."